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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3 10:24:28

장 2세 드 리외

이름 장 2세 드 리외
Jean II de Rieux
출생 1342년
프랑스 왕국 리외
사망 1417년 9월 7일 (향년 75세)
프랑스 왕국 로슈포르 앙 테르
아버지 장 1세 드 리외
어머니 이자보 드 클리송
아내 잔 드 로슈포르
자녀 장 3세, 이자벨, 베아트리스, 마리, 피에르, 미셸
직위 리외와 로슈포르 영주, 앙스니스 남작, 프랑스 원수
1. 개요2. 행적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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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에 맞섰다.

2. 행적

1342년경 프랑스 왕국 리외에서 리외와 로슈포르 영주인 장 1세 드 리외와 마르쉐 영주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의 딸인 이자보 드 클리송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초기엔 에드워드 3세의 장남인 흑태자 에드워드가 다스리는 아키텐 공국에 속했다. 1367년, 에드워드가 이베리아 반도로 원정할 때 동행했고, 나헤라 전투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에 맞섰다. 그러나 에드워드가 원정에서 돌아온 뒤 막대한 군자금 사용으로 인한 재정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난로세를 강제로 거둬들이자, 이에 반감을 품고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귀순했다.

1373년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의 가신이 되었고, 1379년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드 브르타뉴가 샤를 5세에게 축출되어 잉글랜드에 망명했다가 잉글랜드의 지원에 힘입어 귀환했을 때 그의 편에 섰다. 1381년에는 장 4세의 대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게랑드 조약을 체결해 장 4세의 브르타뉴 공작으로서의 권리를 회복시키면서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포기하는 걸 받아들였다.

1382년 프랑스군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해 루즈베케 전투에 참여했으며, 1384년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알랑송 공작 피에르 2세 달랑송간의 분쟁을 중재했다. 1386년 9월 8일, 브르타뉴 공작이 샤를 6세의 원정에 참여하기 위해 파견한 창병 500명의 지휘관으로 선임되었다. 1387년, 장 5세가 반의 헤르미뇌 성에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을 가두자, 다른 귀족들과 함께 집단으로 항의해 올리비에 5세가 풀려나도록 했다.

1392년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프랑스 국왕 샤를 6세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샤를 6세는 군대의 선두에 서서 브르타뉴로 원정을 떠났다가 르망 숲을 지나던 중 갑작스러운 광기에 걸리는 바람에 행군이 중단되었다. 그해 7월 29일, 그는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과 함께 왕을 만나러 가서 투르에서 왕의 섭정단과 협상한 끝에 평화 협약이 체결되도록 했다. 이후 올리비ㅣ에 5세 드 클리송과 장 5세간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프랑스 국왕 편으로 돌아섰다. 1397년 121월 19일, 샤를 6세에 의해 프랑스 원수에 선임되었고, 1403년 1월 7일 신임 브르타뉴 공작 장 6세가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사에 참여했다.

1404년 잉글랜드군의 브르타뉴 침공을 물리쳤고, 1405년 이를 보복하는 차원에서 웨일스에서 잉글랜드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를 돕고자 원정군을 이끌고 출항하기로 했다. 그해 7월, 3,000명이 넘는 기사 및 군인을 이끌고 브레스트를 떠났지만, 항해 도중에 물 부족으로 인해 많은 말이 갈증에 시달리다가 사망했다. 이후 웨일스에 도착한 그는 오와인 글린두르에게 우수한 공성 장비를 제공했고, 글린두르의 군대와 함께 웨일스 내륙으로 진군해 헤이버포드웨스트 시를 공략했지만 성채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이후 그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잉글랜드를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브레스트로 돌아온 그는 브르타뉴 공작 장 6세와 함께 팡티에브르 백작부인이자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의 미망인인 마르그리트 드 클리송과 그녀의 아들 올리비에 드 샤티용 사이의 분쟁을 중재했다. 1411년 질병에 걸려 직위에서 사임했고, 1413년 10월 24일에 프랑스 원수에 복직했지만 고령의 나이인데다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스스로 사임하겠다고 요청했고, 1417년 8월 12일 직위 해제되었다. 그 대신 그의 아들 피에르 드 리외가 프랑스 원수 직위를 물려받았다. 1417년 9월 7일 로슈포르 앙 테르에서 사망했고, 라 트롱샤예의 성모 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