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1-10-24 13:19:22

장용하

파일:장용하.jpg
성명 장용하(張龍河)
생몰 1900년 4월 22일 ~ 1978년 9월 15일
출생지 강원도 원주군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용하는 1900년 4월 22일 강원도 원주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로 상경해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했다. 그러다가 3학년이던 1919년 3월 7일, 그는 중앙학교 학생 서정기, 이춘봉(李春鳳)과 함께 관훙동에 사는 이기찬(李基燦)의 집에서 “조선은 독립할 수 있으니 일동은 분기하라”는 내용의 격문 20여 매를 복사해서 3월 7일에서 3월 8일까지 서울 내의 각 집에 배포했다. 그리고 3월 15일에는 이봉순(李鳳舜)·이춘봉과 함께 이기찬의 집에서 <조선 민족은 자신을 가져라>라는 제목의 문서 20여 매를 등사하여 배포했고, 28일에는 이춘봉과 함께 이기찬의 집에서 <조선 독립신문 제16호>라는 제목으로 조선 독립의 날이 가까워졌으니 자유독립을 위하여 용왕매진(勇往邁進) 하라는 내용의 문서를 300여 매 인쇄하여 배포했다.

4월 1일, 그는 서정기의 집에서 <반도의 목탁 제1호> 100여 매를 인쇄하여 배포했으며, 12일에도 역시 서정기의 집에서 <반도의 목탁 제2호> 100매를 인쇄했으며, 13일에도 서정기, 이춘봉, 염형우 등과 함께 <8면에서 관찰한 조선의 참상>이라는 제목으로 일제 식민통치 아래 조선인의 참상과 억압을 폭로하는 내용의 8매짜리 문서 20여 부를 등사하여 배포했다. 4월 22일에는 <반도의 목탁 제3호> 100매를 인쇄 및 배포했으며, 25일에는 <반도의 목탁 특별호>라는 제목으로 서양인들이 조선인에 대하여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유인물 70여 매를 등사하여 배포했다.

그러나 이 일이 경찰에 발각되면서 동지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1919년 9월 22일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배재학교 교사와 교장을 역임하는 등 육영사업에 헌신했으며, 1978년 9월 15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장용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자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