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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1:49:22

재정 군사 국가

1. 개요2. 기원3. 사례
3.1. 에스파냐3.2. 네덜란드3.3. 스웨덴3.4. 영국3.5. 프랑스3.6. 독일3.7.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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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정 군사 국가(Fiscal-Military State)초기 근대 유럽 국가 형태를 설명하는 이론이자 개념이다. 이 말은 영국 역사가 존 브루어(John Brewer, 1947-)의 1989년 저작 The Sinews of Power: War, Money and the English State, 1688–1783에서 비롯되었는데, 오늘날 역사학계에서 17~18세기 국가 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대규모 군대와 이를 뒷받침하는 재정 체계를 운영할 수 있었던 유럽의 초기 근대 국가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즉 재정 군사 국가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국민 국가와 대비되는 초기적 형태의 근대 국가를 가리키는 용어이며, 이전 패러다임인 절대주의 개념을 대체한다. 한국에서도 서양사강좌를 비롯한 대학 개설서에 이어 22 개정 교육 과정 역사 교과에도 도입되면서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2. 기원

재정 군사 국가 개념은 조지프 슘페터조세 국가(Tax State/Steuerstaat)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슘페터는 "조세 국가의 위기(Die krise des Steuerstaat)"(1918)라는 에세이에서 군주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에 기반하여 운영되는 영지 국가(Domain State)가 18세기 이후 증가하는 재정 수요를 확보하기 위해 신민에 대한 과세를 바탕으로 하는 조세 국가로 전환된다고 하였는데, 슘페터의 영지 국가-조세 국가 이론은 이후 재정사 연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독일 역사가 게르하르트 외스트라이히(Gerhard Oestreich)는 1967년 "독일의 신분 집단과 국가 건설(Ständetum und Staatsbildung in Deutschland)"이라는 에세이에서 초기 근대 유럽 국가가 16세기 재정 국가(Finanzstaat)에서 17세기 중반 군사-경제-행정 국가로 발전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어 외스트라이히의 제자인 케르스텐 크뤼거(Kersten Krüger)는 16세기 헤센이 영지 국가에서 조세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을 연구했다.[1]

영미권에서는 P.G.M. 딕슨(P.G.M. Dickson)이 재정사 연구에 중요한 자극을 제공했다. 딕슨은 18세기 영국[2]마리아 테레지아 시대 오스트리아의 재정[3]을 연구한 중요한 저작을 출간하며 전후 재정사 연구를 선도하였는데, 딕슨은 특히 공공 부채와 신용 등 금융의 중요성을 부각하면서 재정사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후 1999년 영국의 프랑스사 연구자 리처드 보니(Richard Bonney)와 중세사가 마크 옴로드(Mark Ormrod)는 재정 국가의 발전을 모델화한 보니-옴로드 모델을 제시하면서 재정 국가라는 용어가 보편화되는 데 기여했다. 보니-옴로드 모델은 재정을 기준으로 국가 발전 형태를 1. 조공 수취 국가(Tribute State) 2. 영지 국가 3. 조세 국가 4. 재정 국가로 개념화하였는데, 외스트라이히와 다르게 재정 국가를 조세 국가의 발전된 형태이자 17세기 후반 이후 단계로 보았다. '신재정사(New Fiscal History)'라 불리는 이러한 흐름은 근대 국가 형성에 있어 재정과 조세의 중요성을 부각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재정 군사 국가 개념은 위와 같은 재정사 연구에 더하여 마이클 로버츠, 제프리 파커 등이 주도한 군사 혁명 이론과 결합하면서 출현했다. 재정-군사 국가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브루어의 The Sinews of Power는 18세기 영국이 유럽 대륙의 전쟁에 개입하게 되면서 대규모 군대 및 공공 행정을 운영하기 위한 재정 체계를 조세 수입과 금융 체계를 바탕으로 수립할 수 있었다고 보았고, 이러한 18세기 영국 국가를 재정 군사 국가로 개념화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유럽에서 중세 후기부터 빈번했던 국가 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군대 조직과 국가 조직의 합리화가 더욱 촉진되었다는 막스 베버오토 힌체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재정 국가 형성에서 전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브루어의 재정 군사 국가 이론은 1990년대 니콜라스 헨셜의 비판을 시작으로 역사학계에서 절대주의 개념이 전면적으로 의문시되면서 그 대안 개념으로 더욱 각광받기 시작했다.[4] 이후 스웨덴 역사가 얀 글레테(Jan Glete)는 War and the State in Early Modern Europe: Spain, the Dutch Republic and Sweden as Fiscal-Military states(2001)에서 이 개념을 에스파냐, 네덜란드, 스웨덴으로 확장시켰고, 이를 기점으로 재정 군사 국가 개념은 영국을 넘어 유럽 대륙에도 도입되기 시작한다.

3. 사례

재정 군사 국가는 국가에 의한 조세 권한 확보가 중요하였다. 이는 엘리트 집단을 대표하는 신분제 의회와 군주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는지에 따라 각국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대표적으로 영국과 네덜란드는 군주가 의회의 과세 동의 권한을 인정하고 상호 타협하는 양상으로 발전한 반면, 프랑스는 군주가 신분 집단에 광범위한 특권을 양보하는 대신 이들의 묵인하에 조세 권한을 확보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

3.1. 에스파냐

펠리페 2세 시대의 에스파냐는 재정 군사 국가의 형태를 선취한 국가로 평가된다. 에스파냐는 특히 아메리카 식민지를 바탕으로 재정을 확보하였다.

3.2. 네덜란드

17세기 네덜란드는 의회주의에 기반한 재정 군사 국가를 수립한 케이스로, 암스테르담 은행이 세계 최초의 은행인 데서 알 수 있듯 공공 금융 부문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인도 회사로 대표되는 상업과 식민지 역시 재정 확보의 주요 원천이었다. 군사 부문에 있어서도 마우리츠 판 나사우군사 혁명[5]의 중심 인물로 평가되며, 바우르탕어 요새로 대표되는 성형 요새가 유명하다.

3.3. 스웨덴

17세기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시대의 스웨덴은 강력한 군대를 기반으로 한 재정 군사 국가를 수립했고, 30년 전쟁에 개입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패권에 도전하기도 했다. 칼 11세 시대에 스웨덴은 신분제 의회의 간섭 없는 고전적인 의미에 걸맞는 '절대주의' 체제를 수립했는데, 이는 프레데리크 3세 후반의 덴마크(1660~1666)와 더불어 유럽에서 유일한 케이스로 평가된다. 칼 11세와 칼 12세 시대의 스웨덴은 '스웨덴 제국'이라고도 불리며 북유럽의 패자로 군림하였는데, 1718년 칼 12세의 사망과 함께 스웨덴 절대주의도 종식된 것으로 평가된다.

3.4. 영국

의회와 군주의 협력하에 수립된 재정 군사 국가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영국 내전명예혁명을 거치며 근대적 의회주의 체제의 원형을 수립했다. 특히 18세기 이후 안정된 조세 체계 및 영란은행으로 뒷받침되는 막강한 공공 신용을 바탕으로 한 재정 체계를 수립했으며, 현대적 재정 국가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3.5. 프랑스

고전적인 견해로는 절대 왕정을 대표하는 국가로 여겨졌으나, 현재 프랑스사 연구에서 구체제 프랑스 왕의 권력을 '절대적'으로 보는 경향은 낡은 것으로 여겨진다. 루이 14세로 대표되는 강력한 군주제는 귀족들에 대한 광범위한 타협과 양보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고, 만연했던 매관매직은 국가 권력을 더욱 파편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제 프랑스는 군주를 중심으로 관료제와 군대에 기반한 강력한 재정 군사 국가를 수립했고, 명실상부한 유럽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3.6. 독일

신성 로마 제국 독일 지역의 각 제후국은 30년 전쟁의 피해를 수습하는 과정 속에서 국가 권력의 확장을 도모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그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드러낸 군주로, 조세 제도와 군대, 관료 조직을 정비하면서 재정 군사 국가로의 길을 닦았다. 이 과정에서 동프로이센의 신분제 의회가 과세에 반발하자 군대를 보내 진압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재정 군사 국가 역시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엘리트 귀족의 타협과 협력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서 전체 영방 의회(Landtag)는 1666년 이후 개최되지 않았지만, 귀족들의 권력은 쿠어마르크,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클레베-마르크 등 브란덴부르크를 구성하는 각 지역의 지방 의회를 바탕으로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17세기 이후 영방 의회가 열리지 않은 바이에른이나 헤센 등에서도 신분 집단은 신분 위원회 등의 형태로 국가 재정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한편 뷔르템베르크와 작센 등에서는 신분 집단의 발언권이 여전히 강력하였고, 18세기까지도 과세를 위해 신분제 의회가 소집되었다. 뷔르템베르크는 영국과 유사한 의회주의적 정부 형태가 나타났고, 이는 19세기까지도 이어져 독일 자유주의의 보루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3.7. 오스트리아

17세기까지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이질적인 가문 영지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체계가 부실하였고, 각 지방의 신분제 의회의 권한이 강력했다. 18세기 중반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광대한 영지를 통합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오스트리아는 재정 군사 국가로 거듭났다.



[1] Finanzstaat Hessen 1500-1567. Staatsbildung im Übergang vom Domänenstaat zum Steuerstaat(1980)[2] The Financial Revolution in England: A Study in the Development of Public Credit, 1688–1756[3] Finance and Government under Maria Theresia, 1740–1780[4] 절대주의가 영국, 네덜란드의 사례를 설명하지 못하는 반면 재정 군사 국가는 다른 유럽 국가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기 때문.[5] 현 시점에서 '혁명'으로 보는 견해는 세가 약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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