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47:30

저우커화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파일:저우커화.jpg
이름 저우커화(周克华, 주극화)
출생 1970년 2월 6일, 중화인민공화국 충칭시 사핑바구
사망 2012년 8월 14일 (향년 42세), 중화인민공화국 충칭시 사핑바구
신체 167cm
학력 중졸
사인 총격사
1. 개요2. 생애
2.1. 총기와의 인연
3. 사건 목차4. 여담

[clearfix]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연쇄살인범. 충칭시 출신으로 범죄방식은 주로 은행 주변에서 돈을 인출해 가는 사람들을 총으로 쏴서 살해하고 돈을 챙겨서 도주하는 식의 방식을 썼다. 2012년 저우커화는 공안에게 추적당하자 총을 쏘며 저항하다가 결국 공안의 사격으로 사살된다.

2. 생애

저우커화는 1970년 2월 6일에 태어났고 온화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 저우정시는 당시 흔치 않은 지식인이자 문화인이였기에 인민공사에서 몇 년간 회계일을 했다. 60년대 말에 저우커화의 부친은 아이가 둘이나 있는 한 이혼여성과 결혼했는데 그녀가 훗날의 저우커화의 모친이다. 저우커화의 집안은 가난했는데 이 때 당시의 중국은 모두가 가난했었다.

어릴 때 그와 같이 놀며 유년을 보냈던 천치홍에 따르면 저우커화는 매우 능력 있고 수영을 좋아하고 잘했으며 같이 게를 잡아 구워 먹고 친구들 중에서 불을 피울 때 집에서 성냥을 가져오는 친구가 주로 저우커화라고 했다.

한 농부는 저우커화 부자는 다른 사람들은 뭉쳐 다닐 때, 그들은 그들끼리만 다닌다고 했고 천치호우라는 고향사람은 저우커화의 집안은 이웃들과 왕래가 적고 동네의 결혼, 장례식 등의 참여빈도도 적었으며 저우커화는 부친 저우정시와 이런 점이 빼닮았다고 했다. 또 다른 농민은 저우커화는 일을 하면 매우 부지런히 했는데 앉아서 쉴 때도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웃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저우커화는 다 좋은데 내성적이고 별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먼저 웃어른께 인사를 잘 못하고 나이를 먹어가도 내향적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 저우커화의 성적은 매우 좋았으며 선생님과 동창들 모두 그를 똑똑하다고 여겼고 운동회를 하면 거기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특히 운동을 좋아했는데 80년대 초 개봉한 <소림사>> 영화를 보고 그것에 빠져 쿵푸를 배우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저우커화는 내향적이었지만 공부를 잘하고 운동도 잘했다. 특히 책을 좋아했는데 무협소설, 탐정소설을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책에 빠지며 공부를 소홀히 하더니 결국 고등학교 시험에서 낙방했다.

저우커화는 2000년에 총기소유로 징역을 살다 출소 후, 쓸모없어 보이는 컨테이너 박스를 찾았는데 그건 그의 사촌형이 차린 회사였다. 저우커화는 버스 운전을 배우고 사촌형 밑에서 버스기사 일을 했다. 그 와중에 고향사람들은 그들이 밖에서 뭘 하는지 잘 몰랐으며 저우커화는 쉬 모씨를 알게 되어 결혼도 하고 아들도 한명 낳았다. 하지만 저우커화가 일을 하던 도중 교통사고를 내었는데 이를 계기로 아내와 이혼하고 경력이 끊겼다. 모친의 증언에 의하면 26살에 아들이 결혼해서 충칭시 난안구로 이사를 간 후로 10여년 동안 별로 아들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2.1. 총기와의 인연

2005년에 기차역에서 경찰에게 권총 소지를 걸려 징역을 살기 전에도 그런 일이 몇 번 있었다. 한 번은 1993년으로 저우커화가 충칭시를 떠나 우한시로 넘어갔을 때인데, 고향사람들 모두 저우커화가 일을 하러 우한에 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해 저우커화는 엽총을 소지하고 있다가 우한시 경찰에게 적발되어 2년의 징역을 살게 되었는데 그 엽총은 1991년 9월에 고향에서 훔쳐온 것이였고 무슨 생각으로 1미터가 넘는 장총을 우한시로 들여오려는 것이였는지는 의문이었다.

2년을 복역 후 출소한 그는 총을 소유하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1997년 윈난성에서 54식 권총을 구매했다. 엽총을 소유했었다가 총의 크기 때문에 적발 되었던 것을 감안해서 몸에 숨기기 좋고 휴대성이 좋은 권총을 구매한 것이다.

2000년 쯤에 총기적발이 한 번 더 있었다. 당시 다수의 경찰이 저우커화의 집에 들어와 그의 방에서 총알을 발견했고 저우커화는 순순히 보유하고 있던 엽총도 자수했다. 저우커화의 모친은 이건 말도 안되고 아들이 이런걸 가지고 있는 적도 본 적이 없다 했지만 저우커화가 스스로 우한시에 갔을 때 총을 샀고 사격연습을 혼자 해봤지만 아무한테도 해를 끼치지 않고 하늘에만 쐈다고 밝혔다. 이 불법총기보유 건으로 2년간 징역을 살았다.

그런데 1997년에 구매했던 54식 권총도 사건 목차에서 나와있듯 2005년에 경찰한테 적발되어 1993년, 2000년에 이어 한번 더 3년의 징역을 산다.

3. 사건 목차

2004년 4월 22일 오전 12시경, 충칭시 모 술집의 출납원과 회계원이 돈을 인출하자 총을 쏴서 1명이 숨지고 1명이 부상당했다. 이 날 저우커화는 17만 위안을 들고 도망갔다.

2005년 5월 16일 오전 9시 35분경, 충칭시 사핑바구의 한 고깃집 앞에서 총기살인이 발생했다. 저우커화는 돈을 인출하려는 부부를 뒤 따라서 이 둘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현금으로 17만 위안을 들고 튀었다.

5달 뒤인 2005년 10월 16일, 저녁 6시 50분경. 윈난성 쉬안웨이시, 쿤밍에서 충칭으로 향하는 기차가 쉬안웨이 기차역에 들어서고 그곳의 경찰들이 기차 내 대합실 승객들 소지품 검사를 했다. 이 기차에 타고 있던 저우커화는 충칭까지 가는데 아무 일 없을거라 여겼지만 운이 안좋게도 소지품 검사를 당했다. 저우커화의 몸을 수색하던 경찰은 저우커화의 오른쪽 허리춤에서 54식 권총과 총알 6개를 발견했고 파출소로 연행했다. 저우커화는 이 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경찰의 말을 따랐으며 불법총기소유로 징역 3년을 복역했다.

2009년 3월 19일 저녁 7시 42분경, 저우커화는 충칭시 17단영 위병소에서 초병근무를 서고 있던 18세의 한쥔량을 총으로 쏴 죽이고 이를 확인하러 온 초병도 총을 쏴서 맞아 중상을 입혔다. 사망한 초병의 자동소총을 챙겨 도주했으며 이날 특수부대가 밤낮없이 수색하고 중국 전 지역에서 용의자를 쫓기 시작했다.

2009년 10월 14일 창사성 톈신구 난자오 공원의 산쪽에서 총격사건이 발생했다. 희생자는 리청이라는 사람으로 몸에서 총알 6개를 발견했으며 저우커화는 그에게서 20위안을 들고 도주했다.

2009년 12월 4일 창사시 톈신구 푸롱난로에서 총기절도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곽 모씨가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고 나왔을 때 범인의 총에 맞아 죽었으며, 저우커화는 4.5만 위안을 들고 도주했다.

2010년 10월 25일 창사시의 한 무역회사의 사장 시아오 모씨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저우커화는 그의 노트북을 들고 달아났으며 공안측은 이 사건을 12월 4일에 발생했던 총기살인사건과 접목시켜 사건에 대해 조사했다.

2011년 6월 28일 창사시의 한 공사현장 근처에서 창사시의 한 48세 남성인 장모씨가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고 부상부위는 머리와 허리였다. 부상자는 당시 렉서스 차량을 타고 있었으며 내리던 중 총격을 당한 것이였다.

2012년 1월 6일 난징시 시아관구 허옌로의 한 은행에서 총기살인이 발생했고 돈을 인출하던 모 회사의 직원이 사망했다. 저우커화는 19.9만 위안을 들고 도주했다.

2012년 8월 10일 오전 9시 34분경, 충칭시의 한 중국은행 영업소 문 앞에서 총기살인이 발생했다. 저우커화는 2명을 총으로 쏘아 죽였으며,[1]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범인은 사망한 사람의 황갈색 핸드백을 들고 오토바이 택시를 탄 후 도주했다. 저우커화가 도주 후 경찰은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고 저우커화의 신상을 공개했다.

그 와중에 그 날 오후 1시 철도경찰 한 명이 총에 3발이나 맞아 죽었다.[2] 그는 사망 후 2시간 뒤에 근처 풀숲에서 발견 되었고 공안 측은 저우커화의 소행이라고 확신했으며 범인의 신상공개 후 중국 충칭의 높으신 분들도 그 동안의 사건들과 이 사건들을 계기로 대책을 마련해가며 본격적으로 저우커화의 숨통을 조여 들어갔다.

그 날 저우커화는 거러산[3]으로 도망쳤다.[4] 군대와 경찰 모두 동원되어 거러산을 포위하고 거러산 주변의 산들도 포위해 나아갔다. 산 속에서 경찰들은 10미터 간격으로 3~5명씩 자리를 지키고 때때로 식수가 차를 통해 보급되었다. 산 속이라 곤충도 많았기에 군경은 곤충퇴치제도 발라가며 포위를 유지했다.

또한 8월 10일 당시에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치던 저우커화를 잠깐 오토바이 택시에 태웠던 기사 뤄다쥔이 진술을 했다. 택시기사는 동료기사와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누군가 그의 앞으로 왔다고 했다. 그 누구는 저우커화로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고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루다쥔은 그를 보며 "누군가에 쫓기거나 뭐라도 훔치고 도망치는건가?" 이 생각이 들었었다고 했다. 어쨌든 저우커화는 그에게 여기서 신치아오까지 얼마면 가는지 물었고 루다쥔은 5위안이면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저우커화는 오토바이 택시에 탔다. 택시를 타고 가던 중에 루다쥔은 전화가 와서 전화를 받으려는데 저우커화가 그에게 전화를 받지 말라며 그를 막았으며 1km를 달려 신치아오의 한 주유소에 도착했는데 저우커화는 그에게 5위안을 주면서 차에서 내렸다고 했다.

다음날인 8월 11일 오후 5시경, 10여대의 경찰차가 거러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모여들고 수십명의 무장경찰이 경찰견을 데리고 수색을 했다. 무장경찰 말고도 기자 1명과 탐사꾼 1명도 동행했으며, 멀지 않은 곳에서 산굴 하나를 발견했고 이게 실마리가 되었다. 산굴은 벌집과 잡초가 무성했으며 사람이 똑바로 서 있기 힘들지만 공간은 비교적 괜찮은 곳이었다. 경찰 5명이 손전들을 비춰서 그 곳을 뒤져서 담배갑 2개, 너덜너덜한 녹색 T 셔츠, 벗겨진 전선을 발견했다. 동행은 탐사꾼들은 증거사진을 찍고 물건들을 수집하며 30분간 더 그곳을 수색했다. 충격적이게도 나중에 한 소식에 의하면 그때 저우커화와 그곳을 수색하던 무장경찰간의 거리가 50m 정도가 채 안됐었고 교활하게도 저우커화가 그 곳을 몰래 빠져나갔다고 한다.

3일이 지난 8월 14일 새벽 6시 50분경, 저우커화는 한 골목길을 들어서다가 경찰 두 명이 있는걸 보았다. 몸을 돌려 그곳을 뜨려고 했지만 경찰이 눈치채고 그에게 접근했다. 그러자 저우커화는 총을 뽑아 3발을 쏘았고 경찰은 바로 전봇대 뒤에 숨어 그에게 응사했다. 경찰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저우커화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으며 중국을 공포로 몰아 넣던 살인마가 죽었다.

저우커화가 사망하고 경찰은 저우커화의 모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모친은 아들의 시신을 보고 싶다고 했고 적당한 시기에 아들의 시체를 돌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날 오후 4시 경, 충칭시는 저우커화를 사살 한 왕시아오위, 저우진 경관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4. 여담


[1] 2명중 1명은 당시 바로 사망한 것은 아니었고 중상을 입었었는데 결국 8월 16일에 사망한 것이다.[2] 희생 된 철도경찰의 이름은 주옌차오로 저우커화는 그날 8월 10일 사건을 저지르고 충칭을 벗어나기 위해 인도를 따라 걸어 도주하고 있었다. 그 때 근처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의 회상으로 누군가 철도 근처 터널에서 문서처리기를 훔치고 있었다고 했고 마침 그 날은 간편복을 입고 있던 주옌차오가 동료 3명과 같이 그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딱 동료들은 자리를 뜨고 주옌차오 혼자만 남았을 때 저우커화를 만난 것이였다.[3] 산 이름.[4] 저우커화는 거처가 따로 없고 거러산에서 침낭에서 자고 생활했다.[5] 장쥔은 이러한 점이 꼬리가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