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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09:43:18

적고적

적고적의 난에서 넘어옴
1. 개요2. 상세3. 기타

1. 개요



통일신라 말기, 후삼국시대의 전간기 896년에 일어난 도적떼.

2. 상세

十年 賊起國西南 赤其袴以自異 人謂之赤袴賊 屠害州縣 至京西部牟梁里 劫掠人家而去
10년(서기 896년), 도적들이 나라의 서남쪽에서 봉기하였다. 그들은 바지를 붉게 물들여 스스로 남들과 다르게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고적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주와 현을 도륙하고, 도읍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와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노략질하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여왕
(중략) 손순은 옛 거처를 절로 하고, 홍효사(弘孝寺)로 이름하였고, 석종을 안치하였다. 진성왕(眞聖王: 진성여왕) 대에 백제의 횡포한 도적이 그 마을로 들어와,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다. 그 종을 얻은 땅을 완호평(完乎坪)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잘못 전해져 지량평(枝良玶)이라 한다.
順捨舊居爲寺, 號弘孝寺安置石鍾. 真聖王代百濟横賊入其里, 鍾亡寺存. 其得鍾之地名完乎坪, 今訛云枝良坪.
-삼국유사 제9 효선(孝善第九) 손순매아 흥덕왕대(孫順埋兒 興德王代)

파일:적고적.png
이미지 출처.
말 그대로 빨간색 바지를 유니폼으로 맞춰 입은 도적이라 하여 적고적이라 불렸다. 노란 천을 두른 황건적이랑 빨간 두건을 쓴 홍건적과 비슷한 케이스. 황건적이 태평도, 홍건적이 백련교라는 종교조직에서 시작된 무리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적고적도 종교조직에서 시작된 무리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적고적이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지역들에는 선종 불교가 들어와 있었는데 호족들이 숭배하고 있었다.

일개 도적 떼에게 서라벌 외곽 지역까지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이 시기쯤에는 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완전히 무너져 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적고적이 일어난 지역은 나라의 서남쪽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기록에 없지만 신라 영토의 서남부는 지금의 전라도 지역에 해당하고 지금의 경상도 서남부도 동해안 가에 있는 서라벌 기준에서는 꽤 서남쪽이므로 배제할 수 없다. 전라도는 이미 앞서 892년에 견훤이 난을 일으켜 봉기한 상황이었다.[1] 견훤은 신라 조정의 명을 받고 서남해 해안의 호족과 해적을 평정한 다음에 야망을 드러내어, 892년에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900년에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시)에 도읍하는 등, 점점 내륙으로 북상하던 시기였는데 적고적은 견훤 세력권 밖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1] 다만 이 때까지는 후백제의 왕이 아닌, 공식적으로는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이천호를 자칭했다. 명분상 그런 거고 어쨌든 사실상 독립국을 차린 상태였다. 공식적으로 백제의 왕을 자칭한 것은 900년 완산주를 점령하고부터.[2] 대결에서 왕건이 반칙을 써서 이겼다.[3] 어렸을 때에 왕건과 물에서 버티는 것을 겨루다가 문어가 끌고 갔는데, 왕건이 구해줬다. 수장은 자신이 왕건에게 졌다는 사실을 알자 바로 마을에서 도망쳐서 이 사실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