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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0-18 13:51:55

전금진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대남문제의 전문가로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걸쳐 대남 협상을 전담하였다. 전금철이란 가명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932년 2월 15일, 함경북도 선봉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사촌형 전형철은 빨치산이었다고 한다. 만주 용정의 대성중학을 졸업하고 무산광산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해방 후 공산당 열성분자로 활동했고 이로 인하여 1947년에 김일성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사단 정치부 선동원으로 배치되어 참전했고 1962년에 복교하여 1954년에 졸업하였다고 한다. 이후 당 사회부 지도원으로 배치, 1960년 조직지도부 과장으로 승진했으며 1963년 정치대학 당건설 강좌장에 임명되어 교편을 잡았고 정치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고 하는데, 북한에선 박사 학위 따기가 정말 어려우니만큼 대단한 경력인 셈이다.

1963년 문화부 과장에 임명되면서 대남 업무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1972년 문화부 부부장으로 승진하였다. 1972년 11월, 3차 남북 적십자 회담에서 북측 대변인으로 등장, 1973년 남북조절위원회 간사로 임명되었다. 1973년 3월 2차 간사회의, 5월의 3차 간사회의에 참석했고 1974년 6월,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1980년 12월, 조평통 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85년 7월, 남북국회회담 북측 대표단장으로 나타났다. 1985년 10월, 조평통 서기국장 임명이 확인되었다. 7기 및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는 정보도 있지만 대의원 명단 어디에도 전금철 혹은 전금철의 본명인 전금진의 이름은 없다. 비슷한 이름인 전금 대의원을 보고 혼동한 것으로 추정.

1989년 8월, 반핵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씅며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통일정책심의위원에 선출되었다. 1990년 7월, 범민족대회 북측 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 8월에 사회과학원 부원장 및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을 맡았다. 1991년 1월, 범민련 북측본부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며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2년 10월, 남북화해공동위원회 북측위원장이 되었다. 1994년 7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1994년 10월, 통전부 부부장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1994년 12월,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참사가 되었다.

1995년 6월, 베이징에서 열린 대북 쌀지원 회담에 북측 대표로 나타났는데, 남한 사정에 대해 굉장히 빠삭해서 남측 대표들이 대단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 1998년 4월, 남북 당국대표회담 북측 수석대표로 등장했다. 1998년 10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1998년 11월, 남북 비료회담에 등장했다. 이때 남한으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얻어내지 못하자 자주권과 비료는 바꿀 수 없다고 말하고 퇴장했다. 2000년 6월, 내각 참사 직함으로 등장했다. 2000년 6월, 1차 남북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의 안내원을 맡았으며 2000년 7월부터 12월까지 열린 1~4차 남북장관급회담 수석대표로 등장했으나 4차 회담 이후 돌연 사라졌다. 이 때문에 숙청설이 돌았으나 2002년 9월, KBS 교향악단 일행의 방북 때 공항에서 영접하였다. 2003년 7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2003년 9월,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이후 비전향장기수, 및 6.15공동선언실천 관련 모임에 등장하였으나 2006년 이후로는 동정보도가 끊겼다. 2007년 9월 미국의 소리 방송이 전금진 사망설을 제기하였고, 2010년에 전금진의 유해가 애국렬사릉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책임참사 직함으로 안장되면서 사망이 완전히 확인되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