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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5 04:04:42

전장의 자매들



1. 개요2. 1편: 묵은 상처3. 2편: 잠들지 못한 망자들4. 3편: 돌이킬 수 없는 상처

1. 개요

녹서스와 관련된 단편 소설이다. 작중 리븐이 등장하며, 시네마틱 Awaken으로 내용이 이어진다.

2. 1편: 묵은 상처

파일:old-wounds-splash.jpg

"혹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라도?"

어둠 속에서 티팔렌지는 무릎을 꿇었다. 목소리가 들려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목소리는 어둠의 일부이기 때문이었다. 뜨끈하고 역겹도록 달콤한 그 어둠은 썩어 버린 꽃의 냄새처럼 방 안을 채웠다. 어리지만, 평생을 룬과 함께했던 티팔렌지는 자신을 둘러싼 어둠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없습니다."

"좋아."

어둠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스승이 높이 평가하더구나. '유능'하다고." 어둠은 티팔렌지의 스승 목소리를 흉내 내더니 덧붙였다. "유능한 아이들은 쓸데가 많지."

그녀는 마른침을 삼켰다. 공기가 옅어지면서, 마치 사람들로 가득 찬 것처럼 방안이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옆을 힐끗 바라보자 예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녀와 목소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달을 주시해라." 갑자기 빛이 번쩍이더니 바닥이 은빛으로 빛났다. "달의 움직임과 위상의 변화를 살펴라."

그녀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했다.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빠져나가듯, 허락된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무엇보다 과업을 우선시해라." 어둠 속에서 손이 뻗어 나와 티팔렌지의 턱을 잡았다. "네가 찾아야 할 것은 대체될 수 없다." 손이 머리를 들어 올리자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은 자신과 똑같이 생겼지만, 처음 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대체될 수 있지."

에라스는 녹서스의 아들이었다. 제국에 편입된 이후 태어난 첫 세대였던 그는 걸음마를 뗀 순간부터 훈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용기와 규율, 의지에 관해 배웠다.

그는 목자들과 함께 자랐다. 가축과 짐 나르는 짐승을 수확철이 올 때까지 돌봤다. 살생하는 법도 배웠다. 늘 몸에 지니는 단검으로 빠르고 깔끔하게 해치웠다. 녹서스의 부름을 받았을 때 필요한 기술이었다.

그는 제국의 적을 죽이더라도 미워하지는 말라고 배웠다. 명예와 목적의식을 심어 주면 녹서스의 형제자매들처럼 동지가 될 수 있다고, 그래야 강해질 수 있다고 했다.

'죽이든지 가족이 되게 하라.' 전쟁이 남긴 흉터를 보여 주며 그의 아버지가 했던 말이다. 에라스는 적을 미워한 적이 없었다. 다만 주변을 둘러보고 나니, 정체조차 모르는 적을 동정하게 됐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이 거리를 채웠다. 수만의 병사가 불멸의 요새 도로를 행진했다. 전투 구호와 행진 신호, 전쟁 노래가 수십 가지 언어로 울려 퍼졌다. 제국 전역에서 활약하던 녹서스 군의 진정한 힘이었다. 가죽옷과 의식용 예복을 입은 부족 전사들 뒤로 검은 판금 갑옷을 입은 병사들, 밝은 복장의 슈리마 출신 해군이 보였다.

그 외에도 수많은 병력이 뒤를 이었다.

하나의 제국을 위해 모인 그들의 무력시위에 에라스는 숨을 죽였다.

수도 북쪽의 달라모르 평원에서 온 에라스의 부족은 아직 배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그는 동료들과 노를 저으며, 도착 이틀 전부터 보이던 불멸의 요새를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에 거의 도착했을 때, 족장 야비가 갑판수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에라스는 훨씬 더 가까워진 요새를 올려다보았다. 요새 중앙에 자리 잡은 세 개의 거대한 탑 뒤로 태양이 보석처럼 빛났다.

에라스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녹서스의 적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대체 누가 이 힘에 맞서겠어?'

그때 창병 도니스가 에라스를 쿡 찔렀다. 고개를 돌리니 족장이 손짓하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앞에 가서 섰다. 야비의 손에는 막 지급받은 명령서가 들려 있었다.

"곧 이동한다." 명령서를 훑어보며 야비가 부족의 언어로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 들으셨어요?" 에라스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아니." 인상을 쓰며 명령서를 읽던 야비가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상관없어. 넌 따로 갈 데가 있으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에라스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저는 족장님의 종자인데요." 출정하기 직전 피의 시험을 통과해 쟁취한 자리였다. 야비의 무기를 보관하고, 전투 전야에 유물검의 날을 갈고 기름을 칠하며, 장비를 입히고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종자의 임무였다. 야비가 전사하면 시신도 수습해야 했다. '내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종자 역할은 하게 될 거다. 다만 다른 곳으로 파견됐을 뿐이지." 에라스가 당황하자 야비는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녹서스를 위하여."

궁금한 게 많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곧추세우고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경례했다. "제국을 위하여."

야비는 경례에 화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든 제국의 부름을 받으면 응답해야지. 날카로운 검과 강인한 정신으로 무장한 채로 말이야."

심호흡을 하며, 에라스는 실망감을 떨쳤다. "전 준비됐어요."

줄곧 굳은 표정이었던 야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다, 에라스. 그분도 널 보며 자랑스러워하실 거야." 에라스가 고개를 떨구자 야비가 단단하게 묶인 두루마리를 건넸다. "앞에 보이는 운하를 건너 요새의 아홉 번째 관문으로 가라. 군단병이 막거든 이 두루마리를 보여 줘."

트리파르 군단을 생각하자 그는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두루마리는 표백된 종이였다. 생전 처음 본 종이는 부족의 임무가 적힌 양피지보다 부드러웠다.

"운명이 네 길을 정해 주었나 보다, 엔하시." '엔하시'는 부족 언어로 출정을 앞둔 전사를 뜻했다. 야비는 흉터투성이인 손을 에라스의 어깨에 올리며 덧붙였다. "잘 따라가 봐."
에라스는 전투에 임할 각오를 다지며 도시의 인파 사이로 걸었다. 외딴 목자 마을에서 자란 그는 수도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군대의 행진으로 다져진 거리 옆으로 돌과 철, 유리로 만든 기념물과 건물이 줄지어 있었다. 사람도 어찌나 많은지 팔을 들지 못할 정도였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과 언어가 있으리라고 생각 못 했던 그는 정신이 혼미했지만, 임무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부족에서 녹서스어를 배운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에라스는 공용어인 바-녹서스어와 제국의 옛 문자는 어느 정도 알았다. 덕분에 표지판을 보고 새 지휘관이 기다리는 아홉 번째 관문으로 갈 수 있었다.

장비가 든 자루를 어깨에 멘 채로 에라스는 조끼로 손을 뻗었다. 손은 목에 건 뼈 펜던트를 만졌다가, 표백된 종이로 된 명령서로 옮겨 갔다. 누구를 섬기게 될지, 어떤 중요한 임무를 맡을지 생각하니 두근거렸다. 너무 정신이 팔린 나머지 관문 앞에 도착한 사실도,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두 형체 앞에 선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코시스 그비아르!"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금속음에 에라스는 얼어붙었다. 키보다 큰 도끼창 두 자루의 날이 가슴 높이에서 번득였다. 창의 주인은 검은 판금 갑옷을 입은 거구의 병사들이었다. 어깨에서는 핏빛 망토가 뻗어져 나왔고, 징 박힌 투구에 달린 무표정한 가면은 얼굴을 가렸다.

에라스는 숨을 죽였다. 그들은 트리파르 군단병이었다. 관문에는 빗장이 없었다. 녹서스 최고의 정예 병사 두 명이 지키고 있었기에 빗장은 필요 없었다.

다른 군단병이 또다시 수하를 했다. 가면 때문인지 그들은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들어 보는 방언에 에라스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바-녹서스어인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배운 내용을 떠올려 보려고 했다. 군단병 하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거칠게 헛기침을 했다.

"어디로 가느냐, 꼬마야?" 한결 또렷한 목소리였다.

마침내 알아듣게 되자 에라스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극도로 긴장한 탓에 여전히 말은 할 수 없었다. 그저 천천히 조끼 안으로 손을 뻗어 두루마리를 꺼냈다. 군단병들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두 병사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에라스에게 말을 걸었던 쪽이 도끼창을 어깨에 메고, 묵직한 발걸음을 내디디며 앞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들었지만, 군단병의 가슴팍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명령서를 건넸다.

군단병은 두루마리를 낚아챘다. 철갑을 두른 두꺼운 손 안에서 종이 두루마리는 보잘것없어 보였다. 주먹을 쥐자 붉은 봉랍이 바스러져 쏟아지면서 명령서가 풀어졌다. 내용을 확인한 후, 군단병은 홱 돌아서더니 도끼창의 자루로 매끈한 돌바닥을 세 번 두드렸다. 자루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굉음이 아치형 관문 안에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가죽신을 신은 발소리가 들리더니 어둠 속에서 예복을 입은 여성이 나타났다. 붉은 두건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군단병의 기세에 전혀 위압되지 않은 그녀는 두루마리를 건네받았다.

"따라와." 여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말하더니 안뜰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에라스는 서둘러 따라가며 뒤를 돌아봤다. 군단병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운하를 건너 분주한 도시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병력이 오가고, 막사가 양쪽에 줄지어 서 있는 대로를 피해 좁은 골목만 골라서 걸었다.

얼마 후, 강렬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목자라면 누구나 익숙한 지푸라기와 풀, 배설물의 냄새였다. 낮게 짖는 소리도 들렸다. 일부는 에라스도 처음 듣는 소리였다.

좁은 골목이 끝나고 넓은 광장이 펼쳐졌다. 그곳은 동물을 돌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수많은 동물이 우리 안에서 먹이를 먹고 있었다. 남녀 할 것 없이 양의 상태를 확인하고 닭의 머릿수를 세었다. 원래는 공원이나 정원으로 쓰이던 곳 같았지만, 지금은 대규모 병력 동원을 위해 징발된 듯했다.

익숙한 광경에 에라스는 마음이 편해졌다. 잠시 후, 여자는 광장 외곽에 있는 막사 앞에 멈추더니 두루마리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입구를 열어젖힌 후,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여자는 곧바로 사라졌다.

막사 안의 공기는 차가웠고, 강한 향냄새로 가득했다. 어찌나 강한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에라스는 코를 찡그리며 내부를 살폈다. 막사 중앙에 무릎을 꿇은 한 여성에게서만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공중에 떠 있는 검에 빛나는 초록색 룬 문자를 새기고 있었다.

에라스는 룬 문자가 춤을 추며 검날에 새겨지는 광경을 감탄하며 바라봤다. 어릴 때 봤던 부족의 주술사들이 떠올랐다. 주술사들은 의식을 치르기 위해 공기로 불꽃을 만들어 내곤 했다. 그는 룬 문자를 똑바로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저 곁눈질만 해도 불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마지막 룬 문자를 새겨 넣자 검이 떨어졌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에라스를 바라보더니, 떨어지는 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고드립니다." 에라스는 재빨리 차려 자세를 취하고 경례했다. 그리고 두루마리를 건네며 덧붙였다. "제 명령서입니다."

여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검을 받침대에 올렸다. 그리고 막사 중앙에 있는 등불을 켰다. 황색의 부드러운 불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여자는 키가 컸으며 피부색이 어두웠다. 에라스가 나고 자란 북부 지방 출신은 분명 아니었다. 그녀는 에라스를 바라봤다. 두 눈은 룬 문자와 같은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글을 읽을 줄 아나?"

에라스는 머뭇거렸다. 바-녹서스어로 말했지만, 수도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경쾌하고 감미로운 억양이었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말했다.

"글을 읽을 줄 아느냐고 물었다." 표정으로 볼 때 여자는 지쳤거나 지루한 듯했다.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에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압니다, 마님."

"명령서를 읽어 보았나?" 언제 낚아챘는지, 여자는 명령서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아닙니다."

"좋아." 여자는 종이를 소매 안으로 찔러 넣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나는 티팔렌지다. 지금부터 내 말은 곧 법이다. 내가 명령하는 대로만 읽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만 지키면 별 탈은 없을 거야. 이해했나?"

에라스는 다시 경례하며 대답했다. "예, 마님."

"수도를 벗어나면 경례는 금지다." 그녀는 탁자에서 장부를 집어 들더니 내용을 살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마님?"

"이번만 허락하지."

"어떻게 모시면 되겠습니까?"

그녀는 장부를 덮으며 대답했다. "어린 짐승들을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 달라모르 평원 출신이지?"

"그렇습니다. 저는 양치기였습니다." 에라스는 화가 났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족장의 종자가 되기 위해 피의 시험에서 사촌을 반죽음으로 만들었는데, 다시 짐승이나 돌보라고?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등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는 좀 더 특별한 동물을 돌보게 될 거야."

그때 누군가 막사의 입구를 열어젖혔다. 에라스는 단검에 손을 뻗으며 돌아섰다.

"가만히 있어." 티팔렌지가 말했다. 에라스는 조금 전 소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용 사냥개 네 마리가 막사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물결 모양의 탄탄한 근육과 가시가 돋친 껍질, 날카로운 발톱이 보였다. 평원의 부족들이 제국에 편입될 때, 대족장이 용 사냥개 새끼 한 마리를 하사받았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 들었다. 새끼 한 마리는 마차 세 대 분의 은화보다 더 값지다고 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사냥개들 뒤로 빛나는 갑옷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판금 가면 뒤로 눈빛이 번득였다. 피처럼 붉은 머리칼은 질끈 묶어 마치 갈기처럼 찰랑였다. 여자가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 사냥개들이 두 마리씩 좌우로 움직이며 길을 냈다.

"아렐." 티팔렌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빨리 왔네, 추적자."

에라스는 아렐을 바라봤다. 용 사냥개를 네 마리나 거느린 그녀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채로 물었다. "마님은 귀족이십니까?"

아렐은 갑옷만큼이나 차가운 눈빛으로 힐긋 보더니 다시 티팔렌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종자야." 티팔렌지는 에라스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귀족을 토코골로 보내는 일은 없어."

"서부 전선이군요." 에라스가 대답했다. "토코골은 어떤 곳인가요, 마님?"

"추웠지." 아렐의 목소리는 낮았고, 억양이 매우 독특했다.

"그렇군요. 돌아오는 길은 어떠셨나요?"

"멀더군." 아렐은 티팔렌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아?"

에라스는 깜짝 놀랐다. "저 때문에 불쾌하셨습니까, 마님?"

"넷째야." 아렐이 부르자 용 사냥개 한 마리가 에라스와 그녀 사이에 섰다. 근육질의 몸에서 사나움이 느껴졌다. 비쩍 마른 얼굴로 으르렁거리는 녀석은 거품을 물며 침을 흘렸다.

"불쾌했다면 이 녀석이 먼저 반응했을걸. 그리고 난 네 마님이 아니야."

"죄송합니다." 에라스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불러 드리면 될까요?"

"어지간하면 부르지 마." 자꾸 말을 시켜서 목이 아프다는 듯 그녀는 날카롭게 대답하더니,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손을 저었다.

"밖에 병참 장교가 보급품을 싣고 있을 거야." 티팔렌지가 요청서를 건네며 말했다. "찾아가 봐."

에라스는 조심스럽게 아렐과 사냥개들을 피해 막사 밖으로 나갔다. 안에서 아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역시 하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왜 나를 불렀지, 룬 세공사?"
"바실리스크는 처음 보나?"

거대한 야수에 정신을 팔린 나머지 에라스는 병참 장교의 얘기를 못 들을 뻔했다. 거대한 도마뱀처럼 생긴 바실리스크의 초록색 피부는 쇠처럼 단단했고, 통나무처럼 두꺼운 다리와 꼬리에는 근육이 가득했다. 잘못 걸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예전에는 어떤 동물을 돌봤지?" 병참 장교가 물었다.

"전 양치기였어요."

"걱정하지 마." 에라스의 등을 치며 그가 말했다. "덩치가 큰 양이라고 생각해. 아직 새끼라서 사납지는 않아."

"이게 새끼라고요?"

병참 장교가 키득거렸다. "다 자란 녀석은 성벽을 부술 수 있지."

에라스는 티팔렌지가 준 요청서를 살폈다. 다행히도 쉬운 내용이었고 그마저도 숫자가 대부분이었다. 모르는 부분은 병참 장교가 설명해 주었다. 이 바실리스크는 야영지 구축에 필요한 물건 대부분을 짊어질 예정이었다. 다만 세 사람이 쓰기에는 터무니없이 많았다. 아렐의 용 사냥개를 고려해도 마찬가지였다.

"다 준비됐나?" 등 뒤로 티팔렌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옷으로 완전히 무장한 그녀는 등에 룬 문자가 새겨진 검을 메고 있었다. 발치에는 천으로 만든 배낭이 보였다.

"거의 다 됐습니다. 가죽 부대만 실으면 출발할 수 있습니다."

"잘됐군." 티팔렌지가 해의 높이를 확인하며 말했다. "남쪽 관문의 마차들과 함께 해가 지기 전에 길을 떠나야 해."

"길이라고요?" 에라스가 물었다. 수도에 도착한 후로, 자기 부족을 비롯한 녹서스 병력이 부두의 수송선으로 향하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바다를 건너지 않고요?"

티팔렌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본토에서 할 일이 남았어. 찾아야 할 사람이 있거든."
일행은 혼돈 속 질서가 유지되던 수도에서 출발했다. 에라스와 아렐, 티팔렌지는 대규모의 병력과 함께 불멸의 요새를 뒤로 하고 녹서스 남부의 초원 지대를 통해 동쪽으로 향했다. 행렬은 붉은 깃발과 검은 강철로 된 거대한 뱀처럼 보였다. 평원을 건너며 에라스는 고향 달라모르를 생각했다.

"우린 수가 너무 많아." 야영을 하던 어느 밤,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하사관이 배급을 기다리며 말했다. "수도의 부두는 규모가 크고 밤낮으로 가동되고 있지만, 총동원에는 부족한 수준이지."

"그래서 동쪽으로 가는 건가요?" 에라스가 물었다.

하사관은 투덜거렸다가, 양철 그릇에 스튜와 딱딱한 빵 한 조각이 채워지자 미소 지었다. "나머지 병력이 눅눅한 수송선에 처박혀서 쥐새끼들과 동침하는 동안 우리는 잠시나마 편하게 지내야지. 어차피 곧 배를 타야 하니까."

"어디로 가나요?" 식사를 배급받은 에라스가 요리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무도 얘기 안 하던가? 우린 아이오니아로 간다."

에라스는 휘청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하마터면 음식을 쏟을 뻔했다. 그리고 가슴팍에 있는 펜던트에 손을 가져갔다. '아이오니아.'

"다음 사람도 받게 비켜." 하사관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에라스는 나직이 말했다. "지난번에 제국에서 전쟁을 한답시고 부족 남자들을 절반이나 데리고 갔어요.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죠."

"그럼 이번에 복수하면 되겠군." 하사관이 상의를 내리자 가슴에 난 붉은 흉터가 보였다. 마치 번개처럼 갈라진 기이한 형태였다. "마법 때문에 이렇게 됐지. 나 말고도 빚이 있는 자들이 많아. 오래 참았으니 이제 갚아 줘야지."

에라스는 억지로 희미하게 웃어 보인 다음 숙소로 돌아갔다. 더는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료한 행진이 계속되는 동안, 병력은 지정된 항구로 조금씩 흩어졌다. 냉담한 티팔렌지와 아렐 때문에 소외감을 느낀 에라스는 바실리스크를 돌보는 임무에 집중했다.

몸집이 거대하고 힘도 어마어마했지만, 수도의 병참 장교 말대로 녀석은 새끼였다. 순하고 말도 잘 들었다. 언젠가 아렐의 용 사냥개도 그렇게 되면 좋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오직 주인만 따라다니며 순종하는 짐승이었다.

그는 바실리스크에게 '탈츠'라는 이름도 지어 주었다. 어릴 때 기르던 목양견의 이름이었다. 풀을 뜯으러 가거나 수송대와 함께 이동할 때, 녀석도 새 이름을 알아듣고 에라스를 따랐다.
출발 일주일째, 티팔렌지는 에라스와 아렐을 불렀다. 본대가 동쪽으로 행군을 계속하는 동안, 남쪽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블러드클리프로 간다." 티팔렌지가 말했다. 에라스는 멀어지는 수송대의 모습을 바라봤다. 녹서스 전사들은 흐트러짐 없이 해안으로 향했다.

"거기는 왜요?"

"사람을 찾아야 하거든."

일전에 티팔렌지가 했던 말이 떠오른 에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탈츠의 등에 실은 보급품을 살피며 물었다. "누구인가요?"

"건방지기 짝이 없는 '나아드'지." 아렐이 손바닥에 물을 부어 사냥개들에게 먹이며 말했다. 첫째의 귀가 쫑긋했다. 에라스는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아렐은 티팔렌지를 비웃으며 덧붙였다. "시간 낭비야. 그 여자는 없어도 돼."

"판단은 내가 해." 티팔렌지는 딱 잘라 대답하더니, 에라스를 보며 한숨을 쉬듯 말했다. "마리트라는 여자를 찾아야 해."

"허구한 날 혁명이 일어나기 전, 자기가 얼마나 잘나가는 귀족이었는지 떠벌리는 여자야." 아렐이 툴툴거렸다. "토지와 권력을 빼앗긴 지금도 꿈속에서 사는 듯하더군."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덧붙였다. "자기네 가문 영토가 얼마나 근사한지 자랑하더니. 완전히 시궁창이잖아?"

"대신 군인으로서는 뛰어나지. 실전 경험도 많아서 도움이 될 거야. 불평은 그만해."
일행은 메마른 평원과 무더운 구릉 지대를 지나 블러드클리프로 향했다. 늘 안개로 뒤덮인 달라모르에서 살아온 에라스에게 더위는 낯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지독히 더운 날씨가 이어지자 그는 식수를 신경 써서 관리했다.

순간 아렐이 걸음을 멈췄다. 에라스는 아렐을 바라보며 탈츠의 등을 쓰다듬었다. 정지하라는 신호였다. 아렐은 무릎을 꿇더니 땅에 손바닥을 대며 말했다. "뭔가 접근하고 있어."

탈츠의 등에 탄 티팔렌지가 허리띠에서 놋쇠 망원경을 꺼내 전방을 살폈다. "기수들이다. 녹서스인은 아니군."

언덕 위로 두 개의 작은 형체가 보였다. 말을 타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손을 내려 가죽으로 감싼 언월도의 자루를 쥐었다. 따분한 여정이 지겨웠던 그는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둘째, 셋째야." 아렐이 호출하자 용 사냥개 두 마리가 앞으로 나왔다.

"잠깐." 티팔렌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게 다가 아니야."

후방과 양쪽에 더 많은 형체가 나타났다. 일행을 향해 언덕을 내려오는 동안 나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약탈조야. 원형으로 진형을 갖춰." 티팔렌지가 룬 검을 뽑으며 말했다.

땅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수들이 가까워지자 천둥이 치는 듯 요란했다. 에라스는 탈츠 쪽을 돌아봤다. 날뛸 때를 대비해 묶어 둘 요량이었다. 그때 티팔렌지가 머리를 치며 말했다.

"집중해!"

그는 탈츠를 내버려 두고 언월도를 뽑았다. 그리고 아렐과 티팔렌지의 사각을 방어했다. 약탈조의 모습이 완전히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경량 갑옷으로 무장한 채 망토를 휘날리며 달려왔다. 미늘창 끝에는 청록색 깃발이 달려 있었다.

일행은 돌격에 대비했다. 에메랄드빛 불꽃이 티팔렌지의 검에서 피어올랐다. 아렐의 사냥개들도 울부짖었다.

그러나 기수들은 공격하지 않고 일행 주위를 둘러쌌다. 말들이 일으킨 먼지가 시야를 차단해, 에라스에게는 적들의 윤곽밖에 보이지 않았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 몸을 피하자 에라스가 서 있던 자리에 창이 박혔다. 그때 아렐이 명령을 내렸다. 사냥개 한 마리가 먼지 속으로 돌진했다. 티팔렌지는 귀가 아플 정도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검에서 초록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사이-라-데크!"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두르자 초록색 파동이 발사되었다.

적에게 명중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어쩌면 아렐의 사냥개가 맞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때 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변의 먼지가 요동쳤다. 그리고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라스는 뒷걸음질 쳤다.

그는 멀뚱히 선 채로 생각했다. '안 도와주고 뭐 해?'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에라스는 용기를 냈다. 그리고 언월도를 들고 부족의 전투 구호를 외치며 전방의 그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흙먼지가 옅어짐과 동시에 눈을 뜨자, 말이 아닌 다른 동물이 보였다.

그리고 기수는 에라스의 목에 창을 들이댔다.

"진정하라고." 그때 나긋나긋하고 고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이쁜이가 오늘 배불리 먹긴 했지만, 그렇다고 먹이를 마다하진 않을 테니까."

여자는 창날을 에라스의 턱밑에 대고 들어 올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으나, 얼굴은 철가면과 검은 가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창끝에는 녹서스의 깃발이, 양어깨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의 깃발이 망토처럼 묶여 있었다.

호기로운 모습의 그녀는 두 발로 걷는 짐승을 타고 있었다. 근육은 날렵했고 꼬리는 채찍처럼 길었다. 마치 도마뱀과 새의 중간 모습이었다. 사나운 얼굴의 그 생명체는 피로 물든 송곳니를 드러내 보였다.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자 약탈조의 시체가 보였다. 하나같이 처참한 모습이었다.

에라스는 가면 뒤로 여자의 눈빛이 느껴졌다. 마치 뚫어질 듯이 그를 살피더니, 즐거운지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창을 휘둘러 약탈조의 깃발을 잘라 냈다. 다시 보니 나머지 깃발도 이미 안장에 달려 있었다. 그때 티팔렌지와 아렐이 다가왔다.

"아렐, 이 지독한 '나아드' 같으니." 여자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어디 있다가 불려 왔어? 듣기로는 자운의 시궁창에서 현상범들을 잡고 있다던데." 그러더니 과장되게 몸을 떨며 덧붙였다. "거기는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네."

"마리트." 에라스는 무심하게 대꾸하는 아렐을 바라봤다. 평소에도 냉담한 그녀였지만, 마리트를 대하는 태도는 훨씬 차가웠다. 심지어 눈빛도 사뭇 달랐다.

"친구들이야?" 마리트가 에라스와 티팔렌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지나가던 길은 아닌 것 같네."

"반갑군." 티팔렌지가 고개를 까딱했다. "그리고 당신 말대로야. 제국의 명령을 전하러 왔지."

티팔렌지가 두루마리를 건넸다. 가면 아래로 마리트의 검은 눈동자가 두루마리와 티팔렌지를 번갈아 살폈다.

"명에 따르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 마치 배우가 대사를 읊듯 내용을 읽고는, 다시 티팔렌지에게 두루마리를 돌려주었다. "가짜 같지는 않네. 언제 출발하면 돼?"

"당장."

"좋아. 그런데 이 녀석은 종복인가?"

에라스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뇨, 저는 종자입니다..."

"마님이라고 해야지." 마리트는 자신이 탄 짐승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이 우아한 아가씨는 오로곤티스의 레이디 헨리에타 엘리자 바스페이시언 4세야. 넌 그리 똑똑해 보이진 않으니 그냥 헨리에타로 불러."

헨리에타가 근육질의 목을 돌려 에라스를 바라보더니, 송곳니 사이로 쉭쉭거리는 소리를 냈다.

"헨리에타는 뭘 먹나요?" 에라스가 물었다.

"내 신경을 긁는 것들." 마리트는 자신의 천막으로 몸을 돌렸다. "잘 보살펴 줘, 꼬마야. 그리고 나한테 먼저 말 걸지 마."

에라스는 대꾸하려고 하자 헨리에타가 다시 쉭쉭거렸다. 분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일행은 함께 마리트의 천막을 해체해 탈츠에 실었다. 바실리스크에게 그 정도 무게는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 다 자란 녀석은 성벽을 부순다던 그 말이 납득되기 시작했다.

"준비는 끝났나?" 티팔렌지가 물었다.

에라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출발 신호를 했다. 마리트는 광택이 나는 가죽 안장에 올라 녹서스 깃발을 창에 묶고, 다른 깃발을 목에 망토처럼 멨다.

"탈츠, 출발해!" 축축한 땅에서 풀을 뜯고 있던 바실리스크에게 에라스가 소리쳤다.

마리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바실리스크한테 이름까지 붙였어?"

"그래." 아렐이 대답했다.

마리트는 비웃었다. "나중에 잡아먹어야 할 상황이 되면 질질 짜겠네."

"저 약탈조 말인데." 생존한 기수들이 도망친 방향을 보며 티팔렌지가 말했다.

"왜?"

"당신이 없으면 또 약탈하지 않을까?"

마리트는 손을 저었다. "어림도 없지. 여긴 우리 가문의 영토야. 말썽을 피우면 갔다 와서 죽이면 돼. 인상 쓰지 마, 주름 생겨."
며칠을 달린 끝에 일행은 블러드클리프에서 벗어났다. 티팔렌지의 지시에 따라 번갈아 가며 이동 중에 눈을 붙였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멈추지 않았다. 이동 중이거나 야영을 할 때, 에라스는 티팔렌지를 지켜봤다. 그녀는 언제나 일행과 떨어져서 달을 올려다보았다.

낮은 산맥을 둘러서 동쪽으로 이동한 끝에, 해가 뜰 무렵 드라켄게이트 항구에 도착했다. 그곳 역시 다른 항구들과 마찬가지로 분주했다. 녹서스 동부 연안 전역에서 총동원이 진행되는 듯했다. 수천 명의 병사와 병기 제조자, 요리사, 건설공, 수리공, 사제, 대장장이가 수송선에 올랐다. 이제 거대한 핏빛 돛을 펼치고 노를 저어 바다를 건널 일만 남았다.

에라스는 도착하자마자 물자를 구하러 다녔다. 수송선에는 병사들과 비교적 평범한 동물을 위한 물자가 이미 준비돼 있었다. 하지만 에라스와 동행하는 짐승들은 다소 독특했고, 그것들을 돌보는 일은 그의 책임이었다. 다행히 티팔렌지의 위임장 덕분에 줄을 서거나 깐깐한 병참 장교들한테 시달리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정오가 되기 전, 일행은 승선 준비를 마쳤다.

"저게 우리 배, 아토니아드호야." 티팔렌지가 부두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라스는 배를 살펴보았다. 인상적인 선의 형태와 흑철 장갑, 어떤 파도도 뚫고 갈 듯한 붉은 돛까지 영락없는 녹서스 양식의 수송선이었다. 지금껏 그가 탔던 가장 큰 배는 부족과 함께 불멸의 요새로 올 때 탔던 나룻배였다. 하지만 아토니아드호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대했다.

이미 사람들은 배에 오르기 위해 건널판에 줄지어 서 있었다. 짐승이나 공구, 돌, 목재를 실은 운반대는 그보다 넓은 건널판을 통해 이동했다.

"병사는 별로 없네요." 에라스가 말했다.

"인부들과 석공들이 대부분이지. 아토니아드호는 본섬이 아닌 파엘로어로 가니까." 티팔렌지가 대답했다.

"파엘로어라면 대요새로 가는 건가요?"

"그래. 지금은 대부분 파괴됐지만." 아렐이 중얼거렸다.

파엘로어의 비극은 달라모르까지 전해졌다. 부족 전체가 모닥불 주위에 앉아 주술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비겁한 아이오니아인들이 녹서스 요새를 공격했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통제하지도 못할 마법을 사용하는 바람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2주 후, 동원령이 선포되었고 부족의 전투원들은 수도로 향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출발한다." 티팔렌지가 넓은 건널판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넌 짐승들을 배에 태우도록 해."

에라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렐에게 물었다. "사냥개도 제가 데리고 갈까요?"

그 말에 용 사냥개 네 마리가 에라스를 노려보았다. 화가 났는지 전부 동시에 그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내가 데리고 간다." 아렐이 손가락을 튕기자 사냥개들이 조용해졌다.

에라스는 탈츠의 고삐를 쥐었다. 마리트도 마지막으로 헨리에타의 턱을 어루만지더니 고삐를 건넸다.

"우리 이쁜이는 혼자 지내도록 해 줘." 에라스가 배에 오르는 동안 마리트가 외쳤다. "다른 것들을 같이 넣었다간 잡아먹고 말테니까."
바깥 공기는 차가웠다. 소금기 때문에 피부가 따가웠다. 열두 척의 배가 아토니아드호와 나란히 움직였다. 붉은색의 돛은 순풍을 받아 불룩했고, 덕분에 갑판 아래 노잡이들은 쉴 수 있었다. 병사들은 따분했는지 전날 해적들의 영역을 지났다는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다만 아무리 해적이라도 병사들을 가득 실은 제국 군함을 공격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터였다.

배들을 바라보던 에라스 곁으로 아렐이 다가왔다. 그는 경례하려다가 티팔렌지의 말이 떠올라 멈칫했다. 아렐은 못 본 체했다. 그리고 난간을 꽉 붙잡고 있는 에라스를 보고 물었다. "바다를 건너는 건 처음인가?"

에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한 지 사흘이나 지났는데, 아직 사흘을 더 가야 한대요." 그는 끝없이 펼쳐진 잿빛 바다와 소금에 덮인 함선들에 의해 부서지는 파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큰 바다는 처음 봐요."

아렐은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에라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시죠? 아이오니아는 어떤 곳인가요?"

아렐은 뜸을 들였다. 그저 바다를 바라보며, 둘째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잠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땅이지. 죽음의 땅이기도 하고."

"아이오니아는 머리가 달아난 거대한 칼날부리나 마찬가지지." 뒤에서 나타난 마리트가 끼어들었다. "지난번에 갔을 때 우리가 머리를 잘랐거든. 지금은 죽은 줄도 모르고 날뛰고 있을 뿐이야."

"나도 칼날부리를 사냥해 봤어. 그것들은 머리가 없어도 위험해."

"그럼 아이오니아와 또 전쟁인가요?" 에라스가 물었다.

마리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들 알겠어? 다만 대장군이 대규모 병력을 보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저 이번에는 확실하게 마무리하도록 내버려 뒀으면 좋겠네."

아렐이 자리를 뜨자, 에라스는 잔잔하게 일렁이는 망망대해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바다의 이름은 뭔가요?"

"이름이 뭐든 무슨 상관이야?" 마리트가 멀어지면서 말했다. "어차피 우리 건데."
육지가 보이기 시작하자 에라스는 무척이나 기뻤다.

파엘로어의 요새가 수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토니아드호는 빨랐지만, 에라스는 항해가 괴롭기 그지없었다. 배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통에 멀미가 나서 수도 없이 먹은 것을 게워 내야 했다. 옷은 흠뻑 젖었고, 피부는 소금기 때문에 따가웠다.

그는 대부분 선창에서 시간을 보냈다. 짐승들을 돌보기 위해서였다. 탈츠는 괜찮은 듯 보였다. 먹이를 줄 때만 빼고 우리 안에서 잠만 잤다. 하지만 레이디 헨리에타는 까다로웠다. 날렵하고 힘이 넘치는 탓에 갇혀 지내는 생활을 불편해했다. 그래서 에라스는 더욱 신경 써서 보살폈다. 자칫 잘못하면 잡아먹힐 수 있었으니까. 그저 빨리 도착해서 헨리에타가 맘껏 뛰어놀 수 있기를 바랐다.

뱃머리의 파수꾼이 육지를 발견하자 에라스는 서둘러 갑판 위로 올라갔다. 상부 갑판은 구경하려는 녹서스인들로 가득했다. 처음에는 작은 점처럼 보이던 형체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지고 선명해졌다. 그리고 안개처럼 보이는 뭔가가 섬을 에워싸고 있었다. 거리가 좁혀지면서 안개의 색은 갈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파엘로어를 둘러싼 녹서스 함선들이었다.

함선들은 여러 겹의 동심원을 이룬 채, 쉬지 않고 섬 주변을 돌았다. 최외곽을 순찰하던 호위선 두 척이 접근해 아토니아드호를 세웠다. 그리고 승선용 갈고리를 걸더니 해군 병사들이 건너왔다.

해군 병사들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수송선을 검사했다. 선장의 명령서와 화물 목록을 확인하면서도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갑판 수색이 진행되는 동안, 예복을 입은 혈마법사 셋이 승선한 병사들을 심문했다. 그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눈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주문을 외웠다.

"왜 저러는 거죠, 마님?" 에라스가 티팔렌지에게 물었다.

"속임수를 밝혀내는 과정이다. 자연의 마법 말이야."

에라스는 의아했다. "전부 제국 함선을 타고 온 녹서스 병사들이잖아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요?"

"파엘로어에 상륙하면 너도 이해할 거다."

배를 샅샅이 뒤진 병사들은 일부만 제외하고 호위선으로 돌아갔고, 아토니아드호는 다음 봉쇄선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봉쇄선을 지날 때마다 검문과 수색이 진행됐고, 배에 승선한 위병들이 교대되었다. 에라스는 워낙 많이 심문받은 탓에 마침내 항구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이들이 과연 자신을 아군으로 보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파엘로어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고 나니, 모두 납득할 수 있었다.

요새는 처참하게 파괴돼 있었다. 중심부의 거대했던 성곽은 흔적만 남았고, 난공불락의 요새는 부러진 이빨처럼 허물어졌다. 망가진 것은 성벽과 망루뿐만이 아니었다. 땅조차도 갈라져서 끔찍한 자연재해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아토니아드호가 정박하자 녹서스인들은 선상과 부두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기술공들은 지정된 초소로 배치되었고 원자재와 보급품은 육지로 운반되었다. 에라스는 선창으로 내려가 탈츠와 헨리에타를 내리는 데에 집중하려고 했다. 섬의 충격적인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선창에서 육지로 이어지는 넓은 건널판을 통해 탈츠와 헨리에타를 끌고 갔다. 가축을 비롯한 평범한 동물들 사이에서 그 모습은 단연 눈에 띄었다. 파엘로어에 상륙하기 위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파괴된 군함을 향해 내려가는 선원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마치 개미 떼처럼 맹렬히 움직였다.

거대한 윈치와 쇠사슬이 잔해를 하나씩 건져 올렸다. 선원들은 창백하게 변해 버린 시체를 수습했다. 아토니아드호보다 두 배나 큰 군함이었지만, 무릎으로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듯 선체는 둘로 갈라져 있었다.

'대체 어떤 힘에 당했기에 이 지경이 됐을까?'

에라스는 불멸의 요새 아래에 서 있던 순간을 떠올렸다.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을 보며 누구도 제국의 힘에 맞설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파엘로어의 모습을 직접 보고 나니, 마음속에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마침내 에라스는 건널판 끝에 도달해 갈라진 바위 위로 건너갔다. 습하고 탁한 공기에서 알 수 없는 향신료 냄새가 났다. 그제야 그는 실감할 수 있었다.

아이오니아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헨리에타의 고삐가 손에서 빠져나가는 줄도 모른 채, 에라스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마침내 정신을 차렸을 때, 헨리에타는 야영지 안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안 돼!" 에라스는 그대로 뛰쳐나가려다 말고 탈츠에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그는 단검으로 탈츠의 고삐를 땅에 고정하고 헨리에타를 쫓아갔다.

"멈춰!" 헨리에타는 천막 사이를 뛰어가다가 멈춰 서서, 긴 목을 돌려 에라스를 바라봤다. 번쩍이는 면갑 사이로 쉬익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리트가 '헨리에타의 보석'으로 부르는 그 면갑은 얼굴과 머리를 보호하는 방어구이자 쇠로 된 칼날로 무시무시한 송곳니를 한층 더 위력적으로 만드는 무기였다.

"착하지, 가만히 있어." 에라스는 양팔을 벌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저리 안 치워?" 근처에 있던 한 병사가 소리치자 헨리에타와 에라스가 동시에 노려보았다.

"며칠 동안 배 안에 갇혀 지내서 그래요." 에라스가 쏘아붙였다. 그리고 헨리에타가 정신이 팔린 틈을 타 고삐를 낚아채고 앞다리를 가죽으로 감쌌다.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한 상태인데 혼나고 싶지 않으면 비켜요!"

에라스의 말에 병사들이 물러났다. 잠시 후, 티팔렌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탈츠와 헨리에타를 데리고 티팔렌지와 아렐, 마리트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세 사람 사이에 전에 없던 긴장감이 느껴졌다.

"빨리도 오네." 마리트가 헨리에타의 고삐를 낚아채며 비아냥거렸다. 용 사냥개에 둘러싸인 아렐은 쪼그려 앉아 바닥의 돌무더기를 만지작거렸다.

"고대 마법이야." 아렐이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마력이 깨어났어."

"마력을 감지하는 건 어디서 배웠대?" 마리트가 의심쩍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기서."

"기가 막히네." 마리트는 티팔렌지를 보며 물었다. "다음 계획은?"

"이곳 파엘로어에서 마지막 동료를 찾아야 해."

"결투장으로 가면 되겠군. 피 냄새라면 환장하니까." 아렐이 말했다.

한 마디씩 주워들으면서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익숙해진 에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혹시 그분도 맹수를 기르시나요?"

"말도 마." 마리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테네프, 그 여자가 바로 맹수니까."
아렐이 말한 대로였다. 파엘로어는 복원이 한창이었지만, 여전히 녹서스군의 주둔지로 쓰였다. 대장간의 망치보다 더 날카로운 쇳소리를 따라가자 병사들의 훈련장이 나왔다.

줄지어 있는 임시 숙소를 지나자 얕은 구덩이가 여럿 보였다. 각 구덩이 안에는 병사들이 두 명씩 들어가 대결을 펼쳤다. 그들은 무딘 검이나 나무 지팡이, 맨손으로 실력을 겨루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구경꾼이 많은 구덩이가 있었다. 일행은 구경하는 병사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구덩이 안에는 판금 갑옷을 입은 녹서스 남녀가 서로 경계하며 빙빙 돌고 있었다. 남자는 연습용 검과 원형 방패로, 여자는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로 무장했다. 두 사람이 거리를 재며 속임 동작을 취할 때마다 구경꾼들은 환호했다.

순간 남자가 빈틈을 발견하고 앞으로 돌진했다. 그는 방패로 상대의 얼굴을 노리며 검을 낮게 휘둘렀다. 그러자 여자는 검을 피하며 갈고리를 던져 남자의 방패에 걸었다. 그런 다음 강하게 당기자 남자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머리를 강하게 부딪혔다. 진흙탕에 처박힌 남자의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

"피야. 내가 이겼어." 여자가 소리치자 구경꾼들이 환호했다.

"치사하군, 테네프." 남자가 얼굴을 닦더니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두 번 피를 보는 쪽이 이기는 거로 하자고. 난 아직 안 끝났어."

"한 번으로 약속했잖아." 테네프가 단호하게 말했다. "전투에 안 나갈 거야, 세스투스?"

그러자 남자는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구덩이 밖으로 나갔다. 테네프는 사슬을 팔뚝에 감으면서, 에라스 일행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리트? 아렐?"

마리트가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사납네, 테네프."

"언제는 안 그랬나?" 테네프는 바닥에 침을 뱉더니, 웃으며 아렐이 내민 손을 잡았다.

에라스는 그녀가 올라올 수 있게 물러섰다. 테네프는 적과 근접했을 때 가장 위력을 발휘하는 방패 파괴병이었다. 가죽옷과 철갑 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피부는 흉터로 가득했다. 평생을 전장에서 살면서 새긴 피와 명예의 상징이었다. 아이오니아에서 얻은 흉터는 얼마나 되는지 에라스는 문득 궁금했다.

테네프가 말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우리는—"

"다 여기 있었지." 마리트가 끼어들었다.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에라스는 세 사람 사이의 유대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공허함 역시 존재했다. 말로 할 수 없는, 사라진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군인들과 오래 지낸 덕에 눈치가 빨랐던 그는 그게 무엇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아무튼." 테네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발로란에서 오느라 제대로 못 먹었지? 여기 요리도 자랑할 수준은 못 되지만, 배에서 먹은 음식보다는 나을 거야."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자 황금색과 주황색, 진홍색, 남색 띠가 하늘을 수놓았다. 일행은 취사장으로 이동해 모닥불 주위로 둘러앉았다. 밤이 되자 공기가 차가웠다. 오랜만에 만난 전우들이 서로의 근황과 전장에서의 옛 추억을 이야기하는 동안, 에라스는 말없이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이봐, 꼬마." 테네프가 에라스에게 물었다. "전쟁에 나간 적 있어?"

"네, 있어요."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디서?"

"달라모르 평원 서쪽 국경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였어요. 금방 끝났죠."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며, 에라스는 설명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는 단순히 전쟁에 호기심을 느낀 민간인이 아닌 노련한 전사들이었다. 언젠가 그를 데리고 싸울 날이 올지도 몰랐기에 전투 경험과 실력을 파악해야 했다.

"비옥한 골짜기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었어요. 상대는 몸집이 컸지만, 농사만 지을 줄 알았지 전투에는 서툴렀죠. 빠르게 접근해서 우측면으로 돌격하자 금세 끝났어요."

"땅을 일굴 사람은 남겼나?" 아렐이 물었다.

"그러려고 했지만, 항복한 건 노인들뿐이었어요. 결국 일꾼들을 데리고 와야 했죠. 농사는 때를 놓치면 안 되니까요."

마리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서 너는 몇 명이나 죽였지?"

"그만둬." 티팔렌지가 끼어들었다.

"저는 후방 부대에 있었어요. 전방으로 배치될 때쯤에는 이미 싸움이 끝난 상태였죠. 심하게 다친 적들을 마무리하거나 무덤을 파는 게 다였어요."

갑자기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무너진 방어벽 위를 걸어가는데 누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내려다보니 창에 맞은 남자가 꺽꺽거리고 있었다.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에라스는 남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렸다.

창을 뽑아서 목에 겨누자, 남자는 턱을 들어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게 언제지?" 테네프가 물었다.

"지난 봄이었죠."

"풋내기 같으니!" 마리트가 소리쳤다.

"그만두라니까. 어차피 짐승들만 돌보러 온 거야."

마리트가 즐거운 듯이 웃었다. 테네프는 티팔렌지를 보며 물었다. "그러는 너는 어디서 싸웠지, 룬 세공사?"

"여기서 먼 곳." 그녀의 눈빛을 보니 과거 이야기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듯했다.
병사에게 잠은 귀했다. 배불리 먹는 식사나 튼튼한 군화만큼이나 휴식은 중요했다. 에라스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아토니아드호에서 눈을 붙이려고 해 봤지만, 깊이 잠들 수 없었다. 그래서 육지에 올라온 지금, 제대로 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기뻤다. 그는 일을 다 마치고, 우리 옆 풀밭에 망토를 깔고 누웠다. 짐승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전까지 몇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목소리에 에라스는 잠에서 깼다. 목에서는 차갑고 날카로운 단검의 칼날이 느껴졌다.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해. 목이 달아나기 싫으면."

그는 눈을 떴다. 하늘에는 낫처럼 생긴 은빛 달이 걸려 있었다. 동이 트려면 아직 몇 시간 남은 듯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단검을 거두고 에라스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손을 들어 보이며, 최대한 천천히 야영지 밖으로 걸어갔다.

앞에 사람의 형체가 여럿 보였다. 가까이 가자 사냥개들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체의 주인은 아렐과 마리트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릎을 꿇은 티팔렌지가 있었다.

"꼬마, 아이오니아에는 무슨 볼일이지?" 잠을 깨웠던 여자가 에라스를 티팔렌지 옆에 꿇어앉히며 물었다. 바로 테네프였다.

"저는—"

"그 녀석은 아무것도 몰라." 티팔렌지가 덤덤히 대답하자 테네프는 단검을 에라스의 목에서 거두어 그녀에게 들이댔다.

"그러는 너는 정체가 뭐지?" 옛 전우들을 돌아보며 테네프는 덧붙였다. "위임장은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어."

"위임장은 진짜야." 그녀의 차분한 태도에 에라스는 등골이 오싹했다. "당신이 맞서려는 힘이 그렇듯이."

마리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우리가 쫓아야 할 사람, 이 녀석은 누군지 아나?"

"꼭 필요한 내용만 말해 줬어. 그 이상은 몰라."

"그럼 알려 줘야겠네." 테네프는 에라스를 보며 말했다. "네가 찾는 사람은 유령이야. 녹서스를 위해 싸우다 전사한 영웅이자 우리의 전우지." 그러더니 아렐과 마리트를 가리키며 외쳤다. "우리의 '자매'라고!"

"죽지 않았어."

"거짓말!" 테네프가 날뛰었다. "왜 네 말을 믿어야 하지? 그냥 죽여 버리면 끝인데."

"내가 섬기는 분들은 틀리는 법이 없어. 그분들이 살아 있다고 하시면 살아 있는 거야. 당신들 모두 그 여자와 함께 제국을 위해 싸웠어. 이제 그 여자를 다시 찾아오라는 게 제국의 명령이야. 내 권한은 이곳 주둔군보다 강력해. 우리 임무가 무엇인지 알릴 필요도 없지."

"증거는?" 마리트가 따졌다.

"그 여자의 검." 티팔렌지의 말에 세 사람은 움찔했다.

"검이라니?" 테네프가 물었다.

"그 여자는 검을 부수려고 했어." 티팔렌지가 심호흡을 하자 눈이 에메랄드빛으로 빛났다. "결국 실패했지만, 내가 섬기는 분들은 그 순간 검에 주입된 마력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지. 그분들은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똑똑히 보셨어. 그게 증거야."

"만약 살아 있다고 해도 탈영병일 뿐이야. 널 따라가면 우리도 그렇게 되겠지. 탈영은 곧 사형이야."

티팔렌지는 테네프의 노여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여자에게 녹서스의 심판을 내릴 수 있도록 날 돕는다면 어떠한 처벌도 없을 거야. 잘 생각해. 그 여자가 배신하면서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당신들도 정의를 원하잖아. 그 여자가 왜 그랬는지 해명을 듣고 싶잖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테네프와 마리트, 아렐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에라스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영문도 모른 채, 이곳 파엘로어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같이 가겠다."

처음으로 입을 연 아렐에게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마리트가 쏘아붙였다. "네가 결정하면 따라야 하나?"

"그래." 아렐은 딱 잘라 대답하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에라스는 그 소리가 괴롭게 들렸다. "우리는 군인이야. 군인은 명령에 따라야 해. 무엇보다 우리는 자매로서 해명을 들을 권리가 있어."

마리트가 검은 눈동자를 돌려 아렐을 노려보다가 결국 수긍했다. "해명이라."

테네프는 이를 악물더니 나머지 두 사람을 바라봤다. 마리트와 아렐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티팔렌지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풀어 주지는 않았다. "거짓말이다 싶으면 목이 달아날 줄 알아, 마녀."

"난 진실만 말해.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 당장 최초의 땅 중심부로 떠나야 해."

티팔렌지는 처음으로 에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들에게 한 약속은 네게도 해당된다. 임무를 완수하도록 우리를 돕는다면 보상이 있을 거야."

"저는 녹서스에 충성하는 전사예요. 그런 약속이나 위협이 없더라도 임무를 다할 거예요. 제국의 명령이니까요. 다만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뭐지?"

"찾아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요?"

티팔렌지는 검을 뽑아 들었다. "최초의 땅에서는 다른 이름을 쓸지도 몰라."

에라스의 눈앞에서 검에 새겨졌던 룬 문자가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길게 이어졌다. 마치 그들 앞에 펼쳐진 미지의 땅으로 향하는 길처럼.

"하지만 녹서스에서는 리븐으로 불렸지."

3. 2편: 잠들지 못한 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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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쉴 수 없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무겁고 숨 막히는 어둠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그녀를 덮치자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천천히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마셨다. 도축장의 악취 같은 냄새가 코에 박혔다. 무언가가 느껴졌다. 희미하고도 강렬한 산성의 무언가가.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그녀를 짓누르던 무게가 움직였다. 묵직한 것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진흙 위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였다. 어둠이 부분적으로 사라지며 감옥의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옷. 조각난 갑옷. 생명의 온기가 사라진 상처 난 피부.

그녀를 누르고 있던 것은 시체였다.

이곳에서 벗어나 살아남겠다는 욕구가 솟았다. 지친 혈관을 타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그녀는 자신을 누르고 있는 시체들 사이에 공간을 만들고자 몸을 좌우로 비틀었다. 아주 얇은 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희망이 그녀를 다독였다. 그녀는 틈을 긁고 할퀴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숨을 헐떡이면서도 틈을 넓혔다.

마침내 그녀는 밖으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며 그녀의 폐부에 차올랐다. 하지만 그 강렬하고 독한 무언가가 또다시 느껴졌다. 그것이 혀를 감싸며 목구멍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헛구역질하며 팔을 뻗어 벗어나려고 했다.

머리와 팔이 빠져나왔다. 숨을 쉬려고 했지만 폐가 타오르는 것 같았다. 땅이 진흙탕으로 뒤틀리며 부분부분 하늘색과 회색으로 타오르고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쓰러진 나무의 몸통이 사라진 가지를 향해 있었으며 나뭇잎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희미하게 끓어오르는 안개 사이로 움직이는 형상이 보였다. 야윈 새들과 개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에게 시체는 그저 먹이나 다름없었다.

그녀 바로 앞에 사람이 있었다. 시체 더미 위에서 떨어져 나갔던 그 사람이었다. 소년은 땅 위에 내팽개쳐져 있었고 그의 몸을 보호하던 갑옷은 부서진 상태였다.

개가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인형처럼 몸을 떨었다. 그녀는 소리를 내 짐승을 쫓아내려 했지만 목구멍에 칼날이 선 것 같았다. 매캐한 산성 안개가 모든 것을 뒤덮었다. 소년의 머리가 옆으로 축 늘어졌고 초점이 풀리며 생명력이 꺼져 가는 눈이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가 눈을 깜박였다.

아렐이 손을 땅에 짚고 앉아 어지러운 머리를 진정시키려 했다. 젖은 땅과 풀 냄새가 꿈에서 진동하던 비린 냄새와 불쾌한 공기를 씻어 냈다. 빗물이 머리 위에 있는 막사 틈으로 똑똑 떨어졌다.

옆을 보니 둘째가 앉아 아렐의 투구를 아래턱에 대고 아렐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렐은 잠시 용 사냥개를 쳐다보다 눈을 깜박거리며 굶주린 짐승의 붉은 목구멍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녀가 손짓하자 둘째가 가까이 다가와 투구를 그녀 손에 넘겨주었다. 막사가 순간적으로 펄럭거리며 열렸다.

"마님, 때가 되었습니다."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렐은 천천히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쉬어 일어서기 전 폐로 느껴지는 고통을 무시하며 투구를 바꿔 썼다. 아렐이 막사에서 벗어나 빗속으로 발을 내딛으려고 하자 축축한 침낭 천이 아렐의 발아래 짓눌렸다. 첫째가 아렐의 뒤를 따르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셋도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에라스가 막사에서 물러나 아렐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아렐은 잠을 잘 자지 못했다. 파엘로어를 떠난 이후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괜찮으세요?" 에라스가 물었다.

"막사를 정리해." 아렐이 말했다. 아렐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의 작은 터를 쳐다보았다. 야영지는 온갖 빛깔의 무지개로 반짝거리는 비에 가려져 있었다. 빗방울이 땅에 떨어졌고 작은 별처럼 공기 중에서 깜박거리며 멀리서 부드럽게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희미한 빛에 녹아들었다.

아렐은 아이오니아가 싫었다. 아이오니아는 꿈에서조차 아렐을 쫓아왔다. 아렐은 꿈을 되짚으며 리븐의 시체가 죽은 이들 사이에 있었다고 확신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일이 이렇게 복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렐이 어깨 너머로 에라스를 쳐다봤다. "자취가 남아 있어?"

에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티팔렌지 마님의 검이 아직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가야겠군." 아렐이 걸음을 떼며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테네프 마님과 제가 근처에서 마을을 하나 찾았어요. 마을에 들러 재정비를 해야 해요."

아렐이 걸음을 멈추며 주먹을 움켜쥐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마을은 피해야 해. 우리는 여기서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라고."

"식량이 떨어지고 있어요. 테네프 마님과 저만 갈게요. 테네프 마님이 마리트와 헨리에타, 사냥개가 괜히 이목을 끌 거라고 하셨어요. 빨리 돌아와서 합류할게요."

잠시 뒤 아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라스는 마을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아이오니아의 대부분이 그렇듯 친구끼리 속삭이는 비밀처럼 자신은 알아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시적인 표현을 사용한 이름이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그는 비 덕분에 정체를 숨기기 더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엘로어를 떠날 때 녹서스제 장비는 최대한 버려 지역 주민들이나 제국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일 뿐이었다. 테네프를 따라 진흙투성이의 거리를 걸으며 에라스는 위장이 무색할 만큼 모든 이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느꼈다.

"내 옆에 가까이 있어." 테네프가 말했다. 테네프의 거친 목소리는 에라스도 모르게 그를 진정시켰다. 테네프와 에라스는 모두 무장하고 있었지만 나보리에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무장한 상태였다. 에라스는 그에게 보이는 것이 무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잠깐." 테네프가 속삭였다. 둘은 물러서 찻집 벽에 기대어 섰다. 앞에서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나하게 취한 전사 무리가 아이오니아 출신 노인을 둘러싸고 있었고 구경꾼도 모여들었다.

"저 사람들이 왜 여기 있죠?" 에라스가 녹서스 전사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멀지 않은 남쪽에 전초 기지가 있어. 순찰일 수도 있고, 밤에 형제단의 습격을 받아 보복하러 온 것일지도 모르지." 테네프가 나직이 말했다.

둘은 소란을 구경하는 사람들 쪽으로 더 가까이 이동했다. 후드를 더 앞으로 당긴 에라스는 손가락으로 목에 걸린 뼈 펜던트를 쓰다듬다 허리띠에 걸린 단검을 확인했다. 무어라 고함치는지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갔을 때 그들은 멈춰 섰다.

"나는 축제에서 왔소." 노인이 바-녹서스어 발음을 내기 위해 애쓰며 설명했다. "웨흘레에서 말이오."

"웨흘레라." 병사 대장이 되풀이했다. "꽤 멀리서 왔군." 그는 노인이 쥐고 있던 종이로 포장된 꾸러미를 바라보았다.

"차, 찻잎이오." 아이오니아인 노인이 방어적으로 꾸러미를 제 가슴 쪽으로 가져갔다. "이 차는 꽃잎 차요."

대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찻잎 때문에 웨흘레에서 여기까지 왔다 갔다 한다고?"

"저도 그 축제 얘긴 들어봤습니다. 망자를 기리는 날이라던데." 다른 녹서스 병사가 말했다.

대장이 노인에게 한 발 가까이 다가갔다. "전쟁 영웅을 기리나? 추억에 젖어 아픈 상처를 들추다니. 다들 정신이 나갔나 보군."

"어젯밤에 방책에 불을 지른 것같이 말이죠." 또 다른 병사가 말했다.

"그런 게 아니오." 노인이 말했다. 그 순간 노인이 쥐고 있던 꾸러미에서 푸른 빛이 희미하게 빛났다. 녹서스인들은 재빨리 전투태세를 갖추고 늙은이에게 칼을 겨눴다.

"마법이다. 무기야!" 대장이 소리쳤다.

"아니오! 이, 이건..." 노인은 말을 골랐다. "이자리! 내 아들 이자리요. 아내가 가기엔 너무 늙어서 내가 대신 데려온 거요."

"또 거짓말이군." 녹서스 병사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늘 그렇듯 말이야." 다른 병사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녀의 눈은 끔찍한 기억의 상처로 번뜩였다. "아이오니아인들은 착하게 굴다가 우리가 등을 돌리면 욕을 퍼붓고 뒤를 치지! 보이오드는 불에 타 버렸고 이디는 다리를 잃었어. 내 친구 크론의 심장은 녹아버렸지! 그게 너희 아이오니아인들이 하는 짓이잖아!"

"상황이 안 좋아지는데요? 어떻게 하죠?" 에라스가 작게 말했다.

"가만히 있어.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야." 테네프가 무섭도록 차분히 말했다.

"무기를 버려." 대장이 도끼의 손잡이를 움켜쥐며 소리쳤다.

"무기가 아니오." 노인이 빌듯이 말했다. 그가 구경꾼들을 쳐다보았지만 그들은 녹서스 병사들이 지닌 칼을 보고는 그를 도와주지는 않았다.

"대장 말 안 들려?" 다른 병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다가가서 꾸러미를 낚아챘다. 병사와 노인이 꾸러미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자 곧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찻잎이 땅바닥에 흩어지자 무언의 고통을 내뱉으며 울부짖었다. 찻잎을 조금이라도 주워 보려 했지만 이미 찻잎은 빗물에 쓸려 가고 있었다.

"이자리..." 노인이 무릎을 꿇고 울며 찻잎이 진흙에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고운 찻잎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찻잎을 모두 쓸고 갈 때까지 찻잎에서는 푸른 빛이 점점 희미하게 꺼져 갔다.

녹서스 병사들이 모여들어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자 병사 대장이 무리를 향해 말했다. "뭐든 해 보시지. 모두 불태워 버릴 테니까."

"지르!" 노인이 비를 향해 얼굴을 쳐들며 소리 질렀다. "지르!"

에라스는 테네프가 자신의 어깨를 쥐는 것을 느꼈다.

"벗어나자." 테네프가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병사들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저 아이오니아인들 보여요? 녹서스 병사들은 살아서 이 마을을 나갈 수 없을 거예요."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야. 저들 걱정은 굶으면서 하도록 해, 종자. 덕분에 음식 없이 추격하게 생겼으니까."

"그 노인이 소리친 말이요. 무슨 뜻인가요?" 에라스가 테네프 뒤를 따르며 어깨 너머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지르." 테네프가 그 단어를 되풀이했다. "우리 같은 '포로의 땅' 출신 사람들한테 하는 욕이야. 메뚜기라는 뜻이지."
티팔렌지는 마을 밖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뽑힌 검의 표면을 따라 에메랄드빛의 희미한 장식이 아른거렸다.

"무슨 일이었지?" 티팔렌지가 물었다.

"이 근처에 있는 전초 기치가 어젯밤 습격당했어. 아마 나보리 형제단 짓일 거야. 전초 기지 대장이 실마리를 찾으려고 부대를 보낸 것 같아. 아니면 그저 지역 주민들한테 행패를 부리라고 보냈거나."

티팔렌지가 잠시 말을 멈췄다. "병사들이 너희를 봤어?"

"아니. 마을을 살펴보니 어슬렁거리면서 물건이나 구하는 게 현명한 생각은 아닌 것 같더군."

"현명이라." 티팔렌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떠나자."

에라스가 티팔렌지에게서 거대한 바실리스크 탈츠의 고삐를 넘겨받았다. 탈츠의 옆구리를 쓰다듬으며 에라스는 아렐과 용 사냥개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렐은 초췌해 보였지만 에라스는 캐묻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마리트는 어디 갔어?" 테네프가 물었다.

"기다리는 게 지루하다고 먼저 갔어." 티팔렌지가 말했다.

그들은 잠시 발목까지 오는 진흙과 빛이 나는 빗물을 밟으며 말없이 걸어갔다. 에라스는 마을에서 일어났던 일을 다시 생각했다. 녹서스 병사들 얼굴에 비치던 분노와 증오, 두려움을 떠올렸다. 에라스의 손이 목에 있는 뼈 펜던트 주위를 더듬었다.

"테네프 마님?"

테네프가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그 마을 사람들, 아이오니아인들 말이요. 그런 식으로 해서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테네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멈춰서서 에라스가 가까이 오도록 했다. "우리가 겪은 걸 겪어 보기 전에, 우리가 본 걸 보기 전에는 녹서스를 판단하지 마, 꼬맹아."

에라스는 테네프를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 형제라 불릴 이들에게 제국의 약속을 이행하고자 이곳에 왔어. 우리가 발로란과 슈리마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이 땅은... 달라. 녹서스에 충성하는 모든 병사들에게 큰 어려움이지. 우리는 모두 이곳 사람들을 일깨우고 우리에게 이끌어 모두가 부강해지길 바라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만은 아니야. 아이오니아는 간단히 해결될 곳이 아니라고."

"매우 다르긴 하죠. 그런데 아이오니아인들은 죽으면 정말 꽃이 되나요?"

티팔렌지가 툴툴거리듯 말했다. "영혼의 꽃. 죽은 자들의 영혼이 그 꽃에 살다가 꽃이 피면 살아 있는 자들을 부른다지. 내가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야."

"나도 그렇게 알고 있어." 테네프가 말했다.

"아이오니아인들만 꽃에 살 수 있나요?" 에라스가 테네프에게 물었다.

"나도 몰라. 왜?"

에라스는 조끼 밑에 손을 넣어 펜던트를 꺼냈다. "전쟁 중에 우리 부족의 모든 전사들이 이곳에 왔었어요. 그리고 몇 년 동안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죠. 한 여자가 이걸 들고 오기 전까지는요." 에라스가 손에 쥐고 있던 은 뼈를 들어 테네프에게 보여 주었다. "아버지에게 남은 건 이게 전부라고 하더군요. 우리 아버지가 그 꽃 중 하나에 있는 건 아닐까 궁금했어요. 아버지의 영혼이 아직 여기 있을까요? 제가 찾을 수 있을까요?"

"있다고 해도 그런 환상에 젖어 있을 시간 없어." 티팔렌지가 끼어들었다. "이제 집중해. 네가 여기 왜 있는지 기억해. 우리 모두의 목적은 반드시 실행해야 해. 그 외에는 생각하지 마."

에라스가 고개를 숙였다. 자매들의 목적과 달리 그의 목적은 이루기 어렵게 느껴졌다. 탈영처럼 확실한 것에 견주기는 쉽지 않았다. 에라스는 펜던트 표면을 엄지로 쓸었다. "네, 마님."

테네프가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네 아버지가 여기서 돌아가셨다면 녹서스의 영웅으로 돌아가신 거야. 그게 중요한 거지."

에라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끈을 천천히 놓고 다시 목에 걸었다.
'이 비가 멈추기는 할까?'

에라스는 진흙에서 발을 끌며 부츠가 벗겨지지 않도록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한쪽 발로 뛰며 벗겨진 부츠를 집으려 손을 뻗었다. 몸이 떨려왔다. 주변의 모든 게 그를 방해하는 듯했다.

반짝이는 빗물은 모든 것이 메스껍도록 꿈처럼 느껴지게 했다. 에라스는 생명체들이 여름의 일몰로 물든 나뭇가지 위에서 내는 소리를 들었다. 동물이 내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나뭇잎 색이 주황색에서 남색으로 시들자 나무가 소리를 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그 순간 에라스에게 현실적으로 느껴진 건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뿐이었다. 병사들이 기회를 앗아 가기 전에 마을 사람들과 물물 교환을 해야 했다. 모든 게 잘못 맞춰진 것 같아 에라스의 마음은 불편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전쟁이 이렇게 일어났던 건가? 우리 아버지는 이런 전쟁을 치르신 건가?

에라스의 부츠가 단단한 땅에 닿았다. 에라스는 곧 진흙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팔을 당겨 앞에 있는 하얀 바위가 펼쳐진 곳으로 탈츠를 이끌었다.

에라스는 걸으며 땅의 희미한 모양과 선이 익숙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발아래 있는 바위에 어떤 것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교묘해 보였다. 에라스의 눈이 커졌다.

그들은 땅에 반쯤 묻힌 돌로 된 손 위를 걷고 있던 것이다. 손은 거의 땅 아래 묻혀 있었지만 손바닥은 마당만큼 넓었다. 에라스는 이 손의 주인이 얼마나 클지, 어디에서 왔을지 궁금했다.

"이런 건 누가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하네요."

"난 이걸 누가 부쉈는지가 더 궁금한데." 티팔렌지가 답했다. 그녀는 거대한 손가락이 있었을 곳에 있는 흔적과 틈을 내려다보며 표정을 굳혔다.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잠깐." 아렐이 경고했다. 사냥개들이 합창이라도 하듯 낮은 소리로 으르렁댔다.

아렐이 한쪽을 가리켰다.

손바닥 중간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작은 형체가 빗속에서 가냘프게 울고 있었다. 에라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까이 다가가며 눈에 고인 빗물을 닦아 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다른 색이 보였다.

"조심해." 티팔렌지가 말했다. 그녀는 주위를 경계하며 자신의 검을 조용히 꺼내 들었다.

에라스는 호기심에 이끌렸다. 그 생명체는 에라스의 언월도보다도 작았다. 그는 깃털과 비늘을 바라보았다. 짧게 꼬여 있는 잎들이 힘없이 허공을 붙들고 있었고 후에 날개로 자랄 것 같은 봉오리가 들려 있었다. 에라스는 무릎을 꿇고 아이오니아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런 건 처음 봐요." 에라스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생명체에게 다가갔다. "아가야. 배고프니?"

"안 돼, 안 돼." 테네프가 숨을 뱉었다. 테네프는 티팔렌지처럼 빠르게 눈을 굴렸다.

에라스가 눈을 깜박였다. "다친 거면 어떡해요? 아직 새끼인데."

"그게 문제라는 거야." 테네프가 맞장구쳤다. 에라스는 테네프의 사슬이 스르륵 풀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어미는 어디 있겠어?"

그들 옆에 있는 나무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서늘했던 공기가 더욱 차가워졌다.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자 에라스는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비가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발견한 작고 여린 새끼처럼 새와 짐승, 바다 생물의 모습이 섞인 괴물이었다. 그러나 다 자란 녀석은 모든 면에서 무시무시하게 컸다. 새끼의 잎이 어미에게는 성인 남성의 팔뚝만 한 촉수였고 뾰족한 발톱에는 작은 돌기가 돋아 있었다. 괴물은 반만 현실에 존재하는 것처럼 형상이 온전하지 않고 잔물결처럼 일렁였다.

괴물의 얼굴로 추정되는 이빨과 눈이 빽빽한 곳에서 귀가 먹먹하도록 큰 비명이 울려 퍼졌다. 에라스가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괴물은 등 뒤에 달린 화려한 색의 날개를 퍼덕이며 에라스를 새끼한테서 떨어뜨렸다.

"물러나!" 테네프가 괴물이 아닌 에라스에게 소리쳤다. "탈츠를 지켜!"

에라스는 언월도를 꺼내 들었지만 테네프가 말한 대로 물러났다. 그리고 못이 박힌 사슬을 빠르게 돌리는 테네프를 쳐다봤다. 아렐은 조용히 괴물 뒤로 다가갔고 사냥개들은 침을 흘리며 아렐이 목줄을 풀어 주길 기다렸다. 티팔렌지의 검이 에메랄드빛을 뿜으며 진동하는 동안 티팔렌지는 코에서 피를 흘리며 이상한 주문을 외웠다.

짐승은 다시 울부짖었고 세 방향에서 공격을 받았다.

아렐이 빠르게 손동작을 취하자 사냥개들이 괴물을 향해 뛰어들었다. 송곳니와 발톱이 괴물의 일렁이는 가죽을 찢었다. 괴물은 개들을 떨쳐내려는 듯 몸을 비틀고 흔들었다. 개들이 땅으로 내쳐졌지만 셋째는 날개 한 쪽을 물어 왔다.

"프-라 데-악!" 티팔렌지가 소리쳤다. 그녀가 검을 휘두르자 검에서 초록색의 타오르는 빛무리가 뻗어나갔다. 촉수 한 쌍이 떨어져 나가며 더러운 빛 얼룩으로 흐려진 후 펑 하며 사라졌다. 촉수가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잠시 꿈틀거리더니 나무에서 가지가 갈라지듯 그 자리에서 촉수가 세 개씩 자라났다.

테네프가 돌진했다. 괴물은 울부짖으며 그녀를 향해 촉수를 휘두르더니 발톱으로 테네프 어깨에 둘린 견갑을 할퀴었다. 테네프는 불꽃이 쏟아지자 방패 뒤로 머리를 피했다. 테네프가 사슬을 풀어 괴물의 가죽을 내려쳤지만 괴물이 촉수로 공격을 받아 냈다. 뱀 같은 촉수가 테네프의 발을 잡아 테네프를 내던지려 했지만 그녀는 몸을 수그려 버텨 냈다. 테네프는 다른 손으로 단검을 휘둘러 괴물의 옆구리를 계속 공격했다.

괴물이 날개를 펄럭여 테네프를 떨어뜨렸다. 괴물의 옆구리에 박혀 있던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고 테네프의 어깨는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꺾였다.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테네프는 가시 돋친 사슬고리를 풀었다. 그리고 뒤쪽 바위와 부딪혔다.

에라스가 테네프를 향해 달려갔지만 테네프는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테네프는 이마의 상처 때문에 붉게 물든 얼굴로 에라스를 쳐다보았다. 티팔렌지가 괴물에게 뛰어들며 다시 주문을 읊었지만 촉수가 그녀를 공중으로 낚아챘다.

에라스의 모든 신경이 움직여야 한다고 소리쳤다. 에라스는 탈츠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움직여야 할 차례였다.

에라스는 탈츠의 옆을 타고 올라가 고삐를 움켜쥐고 뒤꿈치로 탈츠의 옆구리를 찼다. 탈츠는 그르렁 소리를 내며 앞으로 달려가 테네프와 괴물 사이에 끼어들었다. 촉수가 에라스의 얼굴 앞으로 날아들자 에라스는 언월도로 촉수를 베었다.

다시 날아드는 촉수를 베며 돌격하려 하자 에라스의 귀에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에라스는 자신을 공격하는 촉수를 계속해서 베어 냈다.

그때 괴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종자에게서 물러나, 이 괴물아!"

나무 사이에서 우아하고 민첩한 레이디 헨리에타의 모습이 드러났다. 헨리에타는 괴물을 쓰러뜨리길 열망하며 돌진했다. 헨리에타 위에 탄 마리트는 가면을 쓴 채 헨리에타와 같은 생각을 하듯 웃었다. 그녀의 창날이 바람 소리와 함께 공중을 갈랐다.

괴물은 다시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고는 마리트를 향해 흐느적대며 몸을 돌렸다.

"그래, 바로 그거야!" 마리트는 창을 길게 잡고 몸을 뒤로 숙인 채 큰 원호를 그리며 창을 돌렸다. 검은 짐승을 위로 베어 촉수와 두 날개를 모두 잘라 버렸다. 짐승이 움찔대자 마리트는 헨리에타의 안장 위로 올라가 몸을 웅크렸고, 무기로 균형을 잡은 후 공중으로 뛰어올라 괴물의 등으로 착지했다.

마리트는 창을 들지 않은 손으로 촉수를 잡아채 자신을 떨어뜨리려 미친 듯이 움직여 대는 짐승의 위로 올라갔다. 함성을 지르며 마리트는 창끝으로 짐승의 두개골을 빠르게 공격했다. 귀를 찢을 듯이 날카롭게 울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순식간에 멈췄고 짐승의 사지는 늘어져 쿵 하고 땅에 쓰러졌다. 다시 빗물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행은 몸을 추스르며 짐승을 둘러쌌다. 탈츠의 등에서 내려온 에라스는 짐승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검을 검집에 넣지 않고 경계했다.

마리트가 창을 뽑으며 낸 신음은 가죽 가면에 막혀 작게 들렸다. "널 구해 주는 것도 이제 슬슬 지겨워지는데, 룬 세공사?"

"저 괴물. 다른 세계에서 온 거야." 티팔렌지가 말했다.

"그래? 어쨌든 이쪽 세계에 있는 부분은 이제 죽은 거네." 마리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티팔렌지가 마리트를 쳐다보았다. "일이 끝나면 네 영혼처럼 야만적인 무기를 만들어 주지."

마리트가 티팔렌지의 눈을 마주 보았다. "두고 보지."

"마침 잘 왔어, 마리트." 테네프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맞아요. 감사해요." 에라스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아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리트는 과장되게 허리를 굽히며 웃었다. "천만에. 일꾼 없이 이런 모험을 해야 한다면 나도 견딜 수 없을 테니까." 마리트는 괴물의 시체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이 괴물 맛있을까? 끔찍한 독이 터져 나올까?"

"먹고 싶어? 그래라. 네가 죽인 거니 네가 먹든지." 아렐이 조롱하듯 말했다.

"그럴까." 마리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새끼는 어디 갔어?"

그들의 관심이 모두 새끼에게 쏠렸다. 새끼는 머리를 들고 지저귀었다. 새끼는 잠시 몸을 떨더니 눈송이 구름으로 터져 버렸고, 소리가 나더니 사라졌다.

에라스는 새끼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다 코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저희가 왜 이곳에 왔는지 다시 설명해 주실 분 계신가요?"

"이곳은 영혼 세계와의 경계가 얇은 곳이야." 티팔렌지가 검을 집어넣으며 핏방울이 흐르는 윗입술을 닦아냈다. "그래서 기이한 것도 넘쳐나지. 신경 쓸 거 없어."

"기이한 것만 있는데요, 뭐." 에라스가 중얼거렸다.

마리트가 죽은 괴물의 두개골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오며 손가락을 튕겨 헨리에타를 불렀다. 마리트는 창을 땅에 꽂고 몸을 날려 다시 안장 위로 올라갔다.

"그 안장에 얼마나 앉아 있던 거야? 레이디 헨리에타도 좀 쉬게 두지 그래?" 테네프가 놀리듯 말했다.

마리트는 코웃음 쳤다. "아이오니아와는 최대한 닿고 싶지 않거든?"

"소변도 한참 참았겠네." 테네프가 웃었다.

"그래, 여기 어딘가 요강을 뒀지. 네가 목마르다고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마리트가 안장의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에라스는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그만 좀 할래?" 티팔렌지가 짜증 난다는 듯이 두 여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테네프는 고개를 저었다. "룬 세공사, 넌 참 재미가 없어."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녀석이지." 마리트가 맞장구치며 에라스를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종자야, 난 네가 싫지는 않단 말이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네가 헨리에타를 돌봐 주니 조언 하나 하지. 헨리에타의 오줌은 강산성이라 아무리 목이 마르더라도 마시면 안 된단다. 알겠지?"

"왜요? 그래서 가면을 쓰게 되신 건가요?" 에라스가 웃었다.

"아니." 마리트의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눈이 잠시 번쩍이더니 마리트가 창자루를 꽉 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헨리에타의 고삐를 쥐더니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떠났다.

에라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저는—"

테네프가 고개를 저었다. "내버려 둬. 잠깐 떨어져 있으면 돼."

에라스는 다시 탈츠에게 돌아갔다. 심장이 밑으로 꺼진 기분이었다. 이제야 이 무리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노인의 아이오니아 찻잎처럼.

고지를 남겨 두고서 망쳐 버렸다.
그다음 주의 여정은 평온했다. 외지인이 아이오니아의 야생을 평온하다고 느낄 만큼은 말이다. 비가 그치자 에라스는 마른 땅을 걸을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살을 에는 추위나 다른 불편한 요소가 없으니 경이로운 아름다움으로 눈부신 아이오니아의 자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미묘했다. 춤을 추는 새들의 모습부터 다채로운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까지 모두. 나무 사이로 잠깐 보이는 포식자가 먹잇감을 추격하는 모습조차 조화로이 비칠 뿐이었다. 모든 것이 에라스는 느낄 수 없는, 에라스가 살고 있지만 볼 수는 없는 더 넓은 세계의 조용한 선율에 맞춰 합주하듯 움직였다.

그들은 나보리에 도착한 이후 강둑을 벗어나지 않고 거대한 강을 따라 계속해서 걸어갔다. 강에서 식량과 물을 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강은 내륙으로 더 들어가는 길을 안내하는 역할도 했다. 그들은 티팔렌지의 검에서 울리는 기이한 노래를 따라갔다.

"곧 밤이야." 테네프가 티팔렌지를 보며 말했다.

티팔렌지가 붉은 하늘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은빛 초승달을 올려다보았다. 에라스가 티팔렌지의 얼굴에서 낙담하는 표정을 보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얼굴은 다시 무감각의 알 수 없는 표정을 띠었다. 티팔렌지가 에라스를 쳐다봤다. "오늘은 여기서 묵자. 천막을 쳐."

"둘째야." 아렐이 중얼거리자 둘째 사냥개가 나타났다. "마리트를 찾아서 데려와."

둘째는 땅거미가 지는 곳을 향해 신나게 뛰어갔다. 마리트는 괴물을 죽인 뒤 무리보다 앞서가는 중이었다. 에라스는 속으로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장작 땔 나무를 좀 구해 오겠습니다." 에라스가 탈츠의 등에 달아 놨던 손도끼를 꺼내며 말했다.

"조심하도록 해. 이곳의 나무는 살아 있으니까." 테네프가 경고했다.

에라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모든 나무가 살아 있지 않나요?"

"널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야." 아렐이 말했다.

에라스가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밤이 깊어 에라스가 장작을 구해 왔을 때 세상은 반짝거리는 검은 벨벳 장막으로 뒤덮인 듯했다. 괴물을 상대로 한바탕 싸움을 치른 후 에라스는 살아 있는 나무를 베어 나무의 포악한 적의를 자극해 공격당할 위험을 감수하느니 땅에 흩어진 나뭇가지를 줍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야영지로 돌아가 작은 불씨로 불을 피운 후 냄비와 그물을 어깨에 메고 강으로 향했다. 식량 주머니가 가벼워진 걸 확인한 에라스는 물고기를 잡아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검은 수면 위를 쳐다보며 강가에 쭈그려 앉은 채 몇 분이 흘렀다. 물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본 순간 에라스의 맥박이 빨리 뛰었다. 에라스는 그물을 던져 단단히 잡은 후 땅으로 끌어 올렸다. 그물에 걸린 잉어가 꿈틀거리며 튀어 올랐다.

성공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며 에라스는 냄비에 맑은 강물을 채운 후 잉어를 집어넣었다.

야영지로 돌아가는 에라스의 발걸음은 떠날 때보다 가벼웠다. 에라스는 녹서스 제국을 위해 희생한 잉어에게 감사했다.
"준비됐어요." 에라스가 각자의 양철 그릇에 수프를 나누며 말했다. 에라스는 냄비의 바닥까지 긁었다. 수프를 모두 나눈 후 에라스는 남은 몫을 챙겨 불 가까이에 앉았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각자 따뜻한 식사와 불의 온기를 즐겼다. 에라스 역시 배를 채우고 아픈 발과 지친 근육을 쉬게 할 수 있어 행복했다.

그 잠깐의 순간 동안에는 아무것도 신경 쓸 게 없었다.

나머지 일행도 맘껏 휴식을 취했다. 아렐은 사냥개들에게 둘러싸여 사냥개들의 발톱과 이빨을 살폈다. 티팔렌지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달빛 아래에 다리를 포갠 채 앉아 주문을 외우며 공중에 뜬 검을 마법으로 감쌌다. 테네프는 낡은 파이프를 물고 고리 모양의 푸른 회색 연기를 내뱉었다.

마리트가 레이디 헨리에타의 등에 기대어 테네프를 내려다보았다. "테네프, 아직도 파이프 태워? 너 그러다 죽을걸?"

테네프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걸로 죽지는 않아. 그리고 난 이 일이 끝날 때까지 죽을 수 없어."

에라스는 모든 이들의 생각이 같다는 걸 느끼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테네프가 에라스를 쳐다봤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사람 말인데요."

"리븐." 아렐이 나직이 말했다.

"모두 아는 사이였나요?"

티팔렌지는 자신의 손 위로 검을 떨어뜨렸다. "소문은 들어 봤지."

"나는 처음 이 해안에 왔을 때 리븐과 함께 싸웠어." 테네프가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체구는 작아도 맹렬한 녀석이었지. 겉보기와 달리 리븐은 군단병 두 명쯤은 귀를 잡아채서 자기 앞으로 끌어올 수 있었어. 리븐의 검은 들어 올리는 데만 해도 엄청난 힘이 필요하지."

"춤은 말할 것도 없고." 마리트가 덧붙였다.

검 이야기가 나오자 에라스의 시선 끝에 티팔렌지가 테네프를 조심스레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에라스는 티팔렌지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생각과 티팔렌지에게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불편해졌다.

"리븐은 처음에 조용했어. 별로 말이 없었지." 마리트가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전선에 서게 되면 철과 피로 유대감이 다져지지." 테네프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자매가 되는 거야." 아렐이 말을 끝맺었다.

침묵이 내려앉고 자매들은 각자의 생각 속에 빠졌다.

"리븐은 왜 여기 있는 거야?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있는데. 왜 우릴 배신한 거야?" 마리트가 날을 세우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어." 테네프가 말했다.

마리트가 코웃음을 쳤다. "얼간이처럼 굴지 마, 테네프. 안 어울리니까."

"나라고 안 따지고 싶었는지 알아? 왜 내가 여기 있겠어?" 테네프는 일어서 마리트에게 화를 냈다.

"리븐은 이곳에 몇 년이나 있었어." 마리트는 움직이지 않고 대답했다. "몇 년씩이나. 보고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지만 리븐은 하지 않았지. 리븐은 탈영병이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라고. 용서할 수 없는 배신자야. 우리는 그걸 복수하기 위해 여기 온 거고."

"복수라고 말하지 마. 이건 정의를 위한 일이야." 아렐이 말했다.

"아무렴 어때. 리븐은 스스로 결정을 내렸고 이게 지금 우리의 결과야." 마리트가 대답했다.
에라스는 지쳤음에도 잠들 수 없었다. 에라스는 자매들이 협력할 때 발휘한 힘을 보았다. 이곳에 있지도 않은데 이들을 분열시킨 리븐은 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그들에게 이런 상처를 남긴 리븐은 대체 누구일까?

질문들이 에라스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다 이내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때 테네프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어나!"

에라스는 불침번을 서고 있던 테네프의 외침에 놀랐다.

"일어나라고!" 테네프가 단검을 갑옷에 부딪혀 소리를 내며 다시 소리쳤다. "강이 넘치고 있어!"

일행은 허둥지둥 일어났다. 에라스가 강둑을 돌아보고서는 창백하게 질렸다.

무언가가 물살을 휘저어 잔잔했던 강물이 몰아치는 급류로 바뀐 것이다. 에라스는 거품을 내며 쏟아지는 물 벽에서 사람의 얼굴 형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형상은 끓어올라 소리 없이 입을 움직여 욕을 내뱉고는 다시 사라졌다. 그 형상은 그들에게 다가오며 강둑을 조금씩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홍수가 아니었다. 강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었다.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 티팔렌지가 소리쳤다.

테네프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마리트는 다른 이들이 나무를 향해 달려가기 전에 레이디 헨리에타를 탔다. 에라스는 먼저 탈츠를 떠올렸다.

에라스는 서둘러 탈츠에게 가 그가 밟고 있는 땅이 수렁으로 변하는 사이 야영지에 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챙겼다. 에라스가 탈츠에게 갔을 때 물이 그의 부츠 위까지 덮쳤다. 에라스가 뒤를 돌아보자 엄청난 물이 아렐 위로 쏟아졌다.

물에 손이 달린 것 같았다.

에라스는 탈츠가 묶여 있던 말뚝을 빼낸 후 탈츠의 등에 올라탔다. 물이 그들을 덮치자 에라스는 필사적으로 고삐를 쥐고 탈츠의 옆구리를 찼다. 다리가 허공에 흔들리고 머리를 수그린 채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도구와 장비, 남아 있던 식량이 모두 떨어졌다.

그들은 숲에 도착했다. 물이 덮치자 에라스가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탈츠는 수면 위로 고개를 들기 위해 뒷다리로 일어섰다. 물은 점점 탈츠의 등과 목 위쪽을 때렸다. 에라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테네프와 마리트는 무사했지만 아렐과 그녀의 사냥개들은 늪이 되어 버린 야영지에 갇혀 강물에 점점 잠기고 있었다.

물이 또 한 번 몰아치자 에라스는 몸에 힘을 주어 버텨 냈다. 에라스 옆에 있던 나무가 쓰러져 몸통이 꺾였다. 에라스는 나무에 매달린 채 아렐을 돌아보고는 가슴까지 차오른 물로 뛰어들었다.

탈츠에 달아 놨던 손도끼를 휘둘러 꺾인 나무의 젖은 껍질을 찍어댔다. 마침내 나무가 부러져 강 쪽으로 쓰러지자 나뭇잎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라스는 무언가 나무에 다가가는 것을 보았다.

아렐의 사냥개들이었다. 사냥개들은 아렐을 둘러싼 채로 헤엄을 쳐 아렐을 나무로 끌고 왔다. 그런데 나무에 다다른 건 셋뿐이었다.

동이 트고 잎 사이로 구리색과 황금색의 빛줄기가 새어 나오자 물살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빛줄기는 물 위에서 반짝였다. 물이 다시 강으로 빠져나가자 물에 빠진 사람이 연주하는 장송곡같이 섬뜩한 소리가 공기를 메웠다.

마리트는 전속력으로 달려왔고 테네프는 나무 밑으로 내려왔다. 모두가 아렐과 쓰러진 나무 주위에 모였다. 아렐은 사냥개들과 함께 잠잠해진 물을 살펴보며 강둑을 따라 걸었다.

"둘째야!" 아렐이 잠시 멈칫했다. "둘째야..."

"물에 쓸려 갔어, 아렐." 테네프가 말했다. 테네프는 주저하며 아렐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유감이야."

아렐의 손이 떨렸다. 아렐은 주먹을 말아 쥐고 턱을 굳게 다물었다.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순 없어." 아렐이 테네프의 손을 가볍게 떨쳐 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렐은 일어서 침울하게 강둑을 쳐다보고 있는 나머지 사냥개들에게 손짓했다. 넷째가 다른 사냥개들보다 조금 더 머물다 아렐이 쳐다보자 빠르게 아렐에게 달려갔다.

햇빛이 흐려지자 에라스는 주춤했다. 손을 뻗자 손바닥 위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몇 분 만에 해가 폭풍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윙윙거리는 강풍에 비까지 내리자 폭우는 차가운 물줄기가 되어 쏟아졌다. 추위가 에라스의 살을 에는 것 같았다. 한 치 앞만 겨우 보였다. 마리트가 레이디 헨리에타의 등에서 내려와야 할 정도였다.

티팔렌지가 검을 높이 들었다. 그녀가 속삭이자 검이 에메랄드빛 불꽃으로 타올랐고 시야를 가리는 폭풍 바람이 뒤로 조금 물러났다. 테네프는 탈츠에게서 밧줄을 꺼내더니 고리를 만들어 모두의 허리에 둘렀다.

일행은 큰 소용돌이 속 작은 초록 불빛에 의지해 바람과 거센 비를 뚫고 티팔렌지를 따라 앞으로 향했다. 에라스는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른 채 걸었다. 티팔렌지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몇 분이 흘렀는지,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멈춰야 해." 바람 속에서 티팔렌지가 소리쳤다.

"봐!" 마리트가 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앞에 빛이 보여!"

에라스는 하늘 위 별처럼 희미한 빛무리를 보았다.

"여긴 야생 지역이야. 강도 무리거나 형제단이겠지." 테네프가 경고했다.

"그럼 다 죽여 버리지 뭐. 룬 세공사 말이 맞아. 식량도 없고 대피처를 찾지 못하면 우린 모두 폭풍에 휩쓸려 버릴 거야." 마리트가 낮게 내뱉었다.

테네프는 입에 고인 빗물을 뱉어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함께 폭풍에 맞서 한발 한발 내디뎌 빛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머리 위 나무가 빗물을 막아 주어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숲 사이로 작고 외떨어진 마을의 모습이 드러났다. 길고 얇게 엮이고 조각된 집들이 있는 마을은 숲의 연장선 같았다.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나뭇가지로 된 벽은 땅이 직접 울타리를 친 것 같았고 그 벽 너머로 집들이 보였다. 나뭇가지가 떨리더니 작은 통로 크기의 틈이 생겼다.

십여 명의 남자와 여자가 틈을 통해 나왔다. 그들은 직접 짠 로브를 입고 폭풍을 막으려 뒤집어쓴 후드에 얼굴을 가린 채였다. 자매들은 그들의 손에 들린 도끼와 검을 보았다. 넓은 판 같은 날은 깨지고 낡은 상태였다. 그들이 입고 있는 것은 낡은 갑옷의 잔해였다.

자매들은 에라스와 탈츠를 뒤에 두고 일렬로 섰다.

"녹서스제 무기야." 테네프가 말했다.

"녹서스인들이 쓰는 무기지." 아렐이 덧붙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전투태세를 취했다. 아렐의 사냥개들은 으르렁거렸다.

"무기를 내려놔." 우두머리로 보이는 마을 주민이 완벽한 바-녹서스어로 말했다. 그가 후드를 벗자 상처 난 얼굴이 드러났다. 어두운색 머리와 수염에는 백발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싸움을 원치 않는다."

"탈영병들이잖아." 마리트가 조롱하듯 말했다. 그녀는 땅에 침을 뱉었다.

"우리 뒤에 누가 있는지 잊지 마." 테네프가 조용히 으르렁댔다.

"우리 앞에 누가 있는지나 잊지 마!" 마리트가 쏘아붙였다.

"잠깐만요!" 에라스는 자매들 사이를 비집고 나갔다. 남자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다. 에라스는 손을 떨며 앞으로 나아갔다. 에라스는 눈을 크게 뜨고 남자를 바라봤다.

눈물방울이 에라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버지?"
남자는 폭풍을 뚫고 에라스를 오두막으로 데려갔다. 녹서스인이나 아이오니아인이나 구경꾼들은 모두 충격과 분노, 공포까지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에라스는 정신없이 그를 따라가며 이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 조빈이 맞는지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살아 있었다.

"끼니를 굶은 것 같구나." 조빈이 말했다. 둘은 화덕 주위에 앉았다. 조빈은 김이 나는 냄비를 열고 나무 그릇에 밥을 퍼 에라스에게 주었다. "아들아, 이곳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냐?"

그들은 에라스의 여정과 고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에라스는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과 대화하는 만큼 조심스러워 많은 내용을 생략했다.

이야기를 마치자 조빈의 눈은 화로의 불빛으로 빛이 났다. "이제 너도 어른이구나. 내 새끼 엔하시." 조빈이 말을 잠시 멈췄다. "네 엄마는 잘 있니?"

"아직도 슬퍼하고 계세요." 에라스가 목소리에서 최대한 씁쓸함을 감추며 말했다. 에라스는 목에서 뼈 펜던트를 빼냈다. "이건 그럼 누구 뼈예요?"

"내 뼈다." 조빈은 손을 들어 잘린 손가락 하나를 보여 주었다. "우리 모두가 치른 희생이지. 너희에게 평안을 줄 수 있기를 바랐어."

"평안." 에라스가 단어를 내뱉었다.

몇 주 동안 이상한 마법과 환상의 세계에서 기이한 일을 겪고 나니 에라스는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아버지 맞죠?"

조빈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뭐라고?"

에라스가 다시 물었다. "진짜 아버지 맞죠? 아니면 우리 아버지가 죽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주문인가요? 이게 다 가짜라고 해도 정말 감사해요. 진짜가 아니어도 제겐 큰 의미예요."

잠시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조빈이 입을 열었다. "세상은 매우 작았지. 너도 몰랐을 거다. 우린 가축을 돌보고 이웃과 물물교환을 하고 가정을 꾸렸으니까. 삶은 단순했고 모두가 행복했어. 그런데 제국이 들어서니까 작기만 했던 우리 세상이 커진 거야. 그리고 어두워졌지."

조빈이 오두막 문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이곳에 지내면서, 이곳을 보며, 다시 작은 세상에서의 삶을 살게 됐다."

"그 삶이 반역을 감당할 만큼 가치가 있었나요?"

"뭐에 대한 반역 말이냐?" 조빈이 에라스를 마주 보았다. "내가 만나 본 적도 없고 지도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머나먼 곳의 지배자에 대한 반역? 결국 죽는 것은 사람이다, 에라스. 녹서스 사람, 아이오니아 사람. 우리는 전쟁을 해서는 안 됐어."

"함께해야 더 강하잖아요. 녹서스는 우리를 옭아맨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죠. 더 이상 양들이 말라 가지 않고 이웃이 급습하지도 않아요. 여기서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아버지는 오랫동안 떠나 있었잖아요. 아버지가 기억하는 녹서스가 아니에요. 우리는 거대한 공동체의 일부가 됐다고요."

조빈이 고개를 저었다. "별 변화가 없을 것 같구나. 우리도 네가 믿고 있는 것을 믿은 채로 이곳에 오게 됐지. 이곳에 녹서스가 필요하다는 믿음 말이야. 에라스, 이곳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구나. 우리의 지배도 필요치 않을 테고. 하지만 우리가 공존할 수는 있지. 그들을 죽일 필요 없이 모두가 가족이 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한 후로는 나는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에라스는 아버지의 말을 되뇌며 머리를 숙였다. "제게 가르쳐 주신 건 모두 거짓말이었군요."

"미안하구나, 아들아." 조빈은 에라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도 스스로 속고 있었지. 하지만 항상 무언가 다른 것을 할 때가 있단다. 더 나은 무언가 말이다. 이곳에는 네가 살 곳도 있어."

"거짓말." 에라스가 또 한 번 되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 아버지를 왜 믿어야 하죠?"

조빈은 어깨가 축 처졌다. "아들아..."

에라스의 눈빛은 냉정했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버지는 손가락을 잃었지만 전 아버지를 잃었으니까요! 이런 숲에 숨어 살면서 이제 와서 설교하는 건가요? 제국에 속하기 전엔 더 넓은 세상을 알지 못했다는 핑계가 있었죠. 이제 그런 무지는 통하지 않아요. 더 나은 하나의 세상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도망치는 거예요."

에라스가 일어섰다.

"전 도망치지 않겠어요."
에라스와 조빈이 오두막에서 나왔다. 에라스는 고개를 들어 우거진 나무 사이로 작아진 구름을 보았다. 비 또한 잦아들었다.

"내가 한 말을 잘 생각해 보거라, 아들아."

"이미 해 봤어요." 에라스는 대답을 하고선 자매들 옆으로 갔다.

조빈은 침을 삼키며 헛기침을 했다. "우린 당신들에게 대피처를 제공했소. 폭풍도 지나갔고, 우리가 수확한 것의 일부를 줄 테니 대신 우리를 그냥 두고 떠나시오. 그리고 이곳에 왔던 일을 잊으시오."

테네프가 티팔렌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매들은 서로 의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저들을 모두 죽일지 말지. 우리가 논의할 문제는 하나밖에 없어." 마리트가 말했다.

"저 중에 에라스의 아버지가 있어." 테네프가 에라스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에라스의 아버지는 반역자야." 마리트가 대답했다.

"에라스의 아버지만이 문제가 아니야. 이 마을의 절반이 녹서스 사람이거나... 녹서스 사람이었지." 아렐이 말했다.

"개들을 더럽히는 게 무섭나 보지?" 마리트가 창끝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이 탈영병들과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 게 리븐을 찾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데?" 아렐이 쏘아붙였다.

에라스는 티팔렌지를 쳐다보았다. 티팔렌지의 손에 이 마을 사람들의 목숨이, 아버지의 목숨이 달렸다. 아버지의 목숨을 두고 에라스는 티팔렌지가 무어라 말하면 좋겠다고 결정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 점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자매들도 티팔렌지의 결정을 기다리며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살폈다.

테네프가 사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두고 간다. 우리의 임무는 탈영병 하나를 찾는 거지 이들을 죽이는 게 아니야." 티팔렌지가 마리트를 쳐다보았다. "논의할 것도 없어."

"네가 그렇다면야." 마리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헨리에타 쪽으로 걸어갔다. 티팔렌지는 에라스를 엄하게 쳐다보았다.

"상황이 이렇지 않았으면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야."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이제 서두르자. 시간을 끌수록 우리에게 불리해. 앞으로 무얼 마주할지 너희도 알겠지." 티팔렌지가 말했다.

자매들이 모여 마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에라스는 열린 울타리 사이를 빠져나갈 때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에라스가 테네프의 팔을 건드렸다. "앞으로 무얼 마주하게 되나요?"

테네프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눈은 먼 곳을 향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곳."
그들은 조용히 행군했다. 에라스는 마음이 복잡해 군중을 비집고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에라스는 자신을 기른 사람과 마을에서 만난 사람이 같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아들은 자라면서 아비를 닮는데, 그럼 그는 결국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건가?

에라스의 목에 걸린 뼈 펜던트가 가슴에 부딪혔다.

풍경이 바뀌면서 황량하고 건조한 지형이 나타났다. 자매들도 경계를 강화했다. 자세는 뻣뻣해졌고 작은 소리만 들려도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매들은 모두 무기를 꺼낸 채 꼭 쥐었다. 에라스는 공기 중에서 희미하게 매캐한 냄새를 맡았다.

일행은 언덕을 올라 건조하고 먼지로 뒤덮인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것을 보았다. 평야의 경계에는 지표가 세워져 있었는데 아이오니아의 언어가 적힌 돌 토템에 불과했다. 에라스는 토템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히 알았다.

물러나라는 경고였다.

그들은 지표 옆에 앉아 있는 노인을 발견했다. 노인은 조용히 콧노래를 부르며 그의 목에 찬 차임 목걸이를 가볍게 튕겼다. 일행이 다가가자 그의 눈이 커졌다. 지팡이를 지지대 삼아 그는 천천히 자신의 몸을 일으켰다.

그가 손을 들며 말했다. "여행자들이군. 나는 어떤 싸움에도 가담하지 않는다네. 섬기는 주인도 없고. 그저 끔찍한 장소의 문턱을 지키고 있는 것뿐이네.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해 주려고 말이지."

자매들은 침묵했다. 에라스는 자매들의 얼굴에 이렇게 긴장감이 비친 걸 본 적이 없었다. 티팔렌지가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어, 문지기. 하지만 우리가 갈 길을 막을 생각은 마."

노인이 작은 양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부탁이네. 가지 말게. 이곳에서 어떤 아픔이 일어났는지 그대들은 모를걸세."

"알 필요 없어." 테네프가 지나쳐 걸으며 말했다.

"그대들을 위해, 그대들의 아픔을 위해 노래하겠네." 에라스는 낙담한 노인을 지나쳐 테네프를 따라갔다.

먼지투성이의 평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에라스는 아이오니아가 아닌 어느 낯선 곳으로 이동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곳에는 어떠한 생명도 없었다. 끈적한 녹색 땅의 공기가 에라스의 코와 목구멍을 찌르는 듯했다. 에라스의 눈과 입이 얼얼했다.

땅에서부터 엄청난 상실의 기운이 안개처럼 내뿜어져 에라스를 파고들었다.

테네프가 멈추어 천천히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모든 일이 시작됐지."

"바로 이곳이었어." 티팔렌지가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검을 따라 룬이 고동쳤다. 티팔렌지가 눈을 감았다 떴다. "리븐이 여기 있었어."

테네프가 말했다. "우리는 몇 년을 싸웠어. 처음부터 교착 상태까지 모두. 그들은 돌파구를 찾았다고 해 놓고 어느 미친 자운인과 그자가 만든 이상한 약물을 가져왔지."

"그리고 화학 폭발이 일어났지." 아렐이 중얼거렸다.

"강산이 닿을 때마다 모든 생명이 갈기갈기 찢겼어.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린 화물을 엄호하면서 전선으로 끌고 가는 중이었지." 마리트가 말했다.

에라스는 말을 주고받는 자매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우린 습격 당했어..."

"...수가 너무 많아서..."

"리븐이 지원을 요청했지..."

"우리가 어디 있었는지 몰랐을 거야."

"화살이 날아왔고..."

"항아리에 불이 붙었어."

마리트는 머리 뒤로 손을 가져가 가면의 고정 장치를 풀었다. 끈이 느슨해지면서 가면이 풀어졌다. 에라스는 침을 삼켰다.

마리트의 얼굴과 머리는 털 하나 없이 매끈하게 붉은 상처 조직으로 뒤덮여 있었다. 에라스는 화상을 입은 살가죽이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지만 마리트의 상처는 그것과 달랐다. 검은 정맥이 거미줄처럼 상처 조직에 꿰어 있었다. 에라스는 마리트가 지금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오직 눈만이 멀쩡했다. 마리트는 차가운 정적 속에 에라스를 쳐다보았다.

아렐이 투구를 벗었다. 에라스는 아렐의 입술과 목 주변의 상처를 보았다. 아렐은 붉은 가래를 뱉어냈다.

'강산을 들이마셨구나.' 에라스는 깨달았다.

테네프가 말했다. "혼돈 그 자체였어. 아군이고 적군이고 날뛰고 비명을 질러댔어. 그리고 리븐을 다시는 보지 못했지. 리븐이 거기서 죽었다고 생각했어. 다들 그랬으니까." 테네프가 에라스를 쳐다보았다. "알겠어? 우리가 리븐을 찾으면 상황을 좀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테네프는 지평선을 바라보더니 말을 멈췄다. 에라스는 한 무리가 언덕을 오르는 것을 보았다. 경량 갑옷과 온갖 칼로 장식된 옷을 입은 아이오니아인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어두운 철 색깔의 가면과 후드로 가려져 있었다.

"폭풍이 치기 전 바다는 고요하지." 아이오니아인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말해 보아라, 지르! 이 땅을 지배하는 건 바로 우리다."

"나보리 형제단이군." 테네프가 이를 드러내며 욕을 내뱉듯 말했다.

"형제단 전원이야." 마리트가 말했다. 곧 불어닥칠 폭풍에도 불구하고 마리트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차분했다.

"너희가 약탈한 마을에서 다들 너희 이야기를 하더군. 우리의 맹세를 이룰 수 있도록 말이야." 나보리 형제단의 전사가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에라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 죽여야 했어." 마리트가 으르렁대며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에 다시 가면을 썼다. 회색빛의 하늘에서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이 망할 비." 아렐이 낮게 내뱉었다.

나보리 형제단의 전사가 언덕을 내려오며 말했다. "우리는 너희를 찾겠다고 맹세했다, 지르. 최초의 땅 어디에 있든 너희의 뒤를 쫓아 우리의 고향에서 두 세계의 균형을 파괴한 이들을 없애 버리겠다고 말이야."

아이오니아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무기를 들었다. 무기는 대부분 마법으로 진동했다.

"우리는 너희들이 목숨을 앗아간 이들, 너희들이 무참히 짓밟은 이들, 평화로운 꿈을 뺏기고 꿈이 공포와 끔찍한 기억으로 바뀐 이들에게 맹세했다. 우리는 이 맹세를 지킬 것이다. 우리의 심장이 뛰는 한!"

십여 명의 전사들이 언덕을 내려와 무기를 들고 있는 녹서스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말해 봐. 너희는 무엇을 맹세할 테냐?" 아이오니아인이 말했다.

테네프는 숨을 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나는... 네놈들에게 죽음을 맹세하지."

"피를 보겠다는 뜻이군. 받아들이지." 전사가 후드를 쓴 채 웃었다.

테네프는 으르렁거리며 갈고리 달린 사슬을 던졌다. 사슬은 형제단 한 명의 관자놀이를 쳤다. 사슬의 일격으로 남자는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테네프가 남자의 가슴을 발로 밟고 그가 숨을 거뒀는지 확인했다.

아렐이 손을 뻗자 사냥개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첫째는 형제단 중 한 여자에게 달려들어 여자의 목을 물었다. 사납게 흔들다 여자의 몸이 늘어지자 다른 이에게 덤벼들었다.

두 무리가 맞붙자 아수라장이 되었다. 티팔렌지는 아이오니아인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녀의 외침과 함께 검이 불타올랐고 남자는 초록색 불꽃에 타올랐다. 마리트는 아이오니아 무리 중앙을 향해 돌격했다. 레이디 헨리에타와 함께 쉴 새 없이 적을 찌르고 베는 마리트의 창은 형체가 흐릿해 보일 정도였다.

에라스는 평원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이곳은 그들 속에 있는 무언가를 일깨워 수년간 속 깊이 쌓아 온 분노를 방출하게 했다. 티팔렌지는 적을 헤치며 나아갔다. 그녀는 앞에 있는 아이오니아인들을 죽여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라스는 탈츠의 고삐를 놓고 언월도를 들었다.

테네프는 형제단의 수장과 맞붙었다.

수장이 테네프를 도발했다. "이 땅은 널 고통스럽게 하지. 널 버린 그 지르들, 다시 보고 싶은가?"

그때 명령을 받은 것처럼 언덕의 중턱까지 내려온 아이오니아의 젊은 전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자는 낼 수 없을 경쾌하면서도 기괴한 선율이었다. 일행은 그 이상한 선율에 잠시 주춤했다.

땅이 흔들리자 에라스가 미끄러졌다. 땅에서 작은 것들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희미하게 간헐적으로 빛나는 기괴한 묘목 같았다. 잠시 후 에라스는 그것들이 손가락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곧 손이 나타나더니 팔이 땅을 밀어젖히고 나왔다. 온전치 못한 남자와 여자의 실체 없이 흐릿한 모습이 기어 나왔다. 그들은 누더기 같은 녹서스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모두 실체 없는 차가운 어둠을 뿜고 있었다.

"이곳의 망자들은 편히 잠들지 못했지." 수장이 테네프와 싸우며 쉭쉭거리는 소리를 냈다.

"미쳤군." 테네프가 으르렁댔다.

남자가 뒤로 물러서며 검을 뽑았다. "너도 저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젊은 전사는 계속 노래했고 창백한 유령들이 땅에서 더 기어 나왔다. 에라스는 자신이 포위되었음을 깨닫고 큰 원호를 그리며 칼을 휘둘렀다. 유령들은 에라스의 검날에 소름 끼치는 바람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에라스가 다시 칼을 휘둘러 시야를 확보했다.

자매들의 맹렬한 공격에 나보리 형제단의 수가 줄어들고 있었지만 기분 나쁜 노래에 의해 소환된 망자의 수는 늘고 있었다. 이 아이오니아인들도 영혼이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에라스는 움찔했다. 그들이 제압당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멈춰야 했다.

에라스는 언덕으로 향했다. 형제단의 전사가 에라스의 길을 가로막고 긴 단검 두 자루를 휘둘렀다. 전사는 아이오니아어로 욕설을 내뱉으며 에라스를 향해 돌진했다. 에라스는 자신의 복부를 향해 밑으로 들어오는 검을 막아 냈지만 목을 향해 날아오는 다른 검은 미처 막지 못했다. 에라스는 뒤로 물러나며 중심을 잃고 땅으로 쓰러졌다.

에라스는 떨어지며 언월도를 놓쳤고 전사는 에라스 위로 뛰어들었다. 전사의 가면이 벗겨지자 에라스의 심장을 노리는 젊은이의 단호한 얼굴이 드러났다. 에라스는 전사의 팔목을 붙들었다. 고통과 분노로 소리 지르며 에라스는 몸을 굴려 전사 위에 올라타 칼을 겨누었다.

에라스는 자신의 체중을 실어 전사의 복부를 노렸다. 곧 전사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에라스는 검을 빼낸 후 언월도를 주워 죽은 전사를 넘어갔다.

비와 피로 땅은 엉망이 되었다. 에라스는 날아드는 칼 사이를 내달리며 망자들의 곡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에라스의 살갗에 닿자 혈관에 얼음물이 흐르는 것처럼 피부가 얼얼해졌다. 반투명한 손톱이 옆구리를 긁자 에라스는 숨을 헐떡였다.

노래를 부르던 젊은 전사가 눈을 감고 붉은 눈물을 흘리자 그의 눈꺼풀이 경련했다. 그가 얼어붙은 듯 서서 노래를 부르는 사이 코와 귀, 입에서 루비색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는 에라스가 다가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에라스는 차가운 손아귀를 뚫고 앞으로 달려갔다. 망자가 위로 올라타자 몸이 꺾여 고통으로 소리치던 에라스는 몸을 세워 망자를 던져 버렸다. 숨이 차오른 에라스의 시선은 무너지는 터널처럼 좁아졌다. 에라스는 앞으로 달려가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칼을 내리쳤다.

젊은 전사가 쓰러지며 숨이 끊어지자 노래가 멈췄다. 망자들은 비명을 질렀고 자신들의 모습을 길게 늘어뜨리며 땅으로 다시 끌려 들어갔다. 잠깐 사이에 남게 된 것은 불길한 옅은 안개와 불온한 망자들이 울부짖는 소리의 메아리뿐이었다.

에라스는 돌아서 술에 취한 사람처럼 발을 헛디디며 한창 진행되고 있는 싸움터로 돌아갔다. 나보리 형제단은 수가 줄어들고 최후의 전사 몇 명만 남은 상태였다. 한 명 빼고는 도망치기보다는 싸우다 죽는 것을 선택한 게 분명했다. 아렐의 사냥개가 도망가는 자를 쫓아가 공격했다. 적들을 물어뜯는 레이디 헨리에타의 면갑이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티팔렌지의 검 룬이 닿은 곳에 혈흔이 남았다.

에라스는 형제단의 수장과 맞붙고 있는 테네프에게 갔다. 테네프는 사슬로 그를 휘감아 진창으로 처박았다. 그녀는 그가 질식하는 것을 보며 한쪽 발을 그의 등 위에 올렸다.

일행 모두 여러 군데에 상처를 입었다. 에라스가 다가오자 테네프는 그를 쳐다봤다. 그녀는 똑바로 서 수장의 숨을 끊은 후 휘청거렸다. 테네프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긴 싸움으로 인한 극심한 피로에 맥을 추지 못했다.

에라스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전투가 벌어진 땅에는 거품이 일고 연기가 났다. 먼지 때문에 화끈거리는 에라스의 피부는 붉어지고 벗겨졌다.

"정신이 나갔어. 아이오니아인들은 죽은 사람을 기린다더니, 이런 짓을 해?" 마리트가 창날을 털어 내며 쏘아붙였다.

"우린 그들의 고인이 아니니까." 아렐이 중얼거렸다. "아직까지..."

"미친 거야." 마리트가 한 번 더 말했다.

"여기 머물러선 안 돼. 땅에 아직 독 기운이 있어. 게다가 이 강령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는 일이야." 테네프 곁에 선 티팔렌지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망자들 사이에서 리븐을 볼 수 있길 바랐어. 난 네가 틀렸길 바랐지." 테네프가 티팔렌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티팔렌지가 손을 내밀었다. "난 틀리지 않았지."

잠시 뒤 테네프가 티팔렌지의 손을 잡았다.
처음으로 비가 고마운 순간이었다. 일행이 화학 공격이 일어난 곳을 떠날 때 몸에 묻은 피와 유독한 흙이 빗물에 시원하게 씻겨 내려갔다. 일행은 티팔렌지의 검이 빛나며 티팔렌지에게 나직이 노래하는 것을 보았다.

"리븐이 가까이 있어. 아주 가까운 곳에." 티팔렌지가 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속삭였다.

티팔렌지가 마리트와 아렐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둘은 정찰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자 에라스는 가슴 부근을 더듬었다. 상처가 난 부분을 조심스럽게 피하며 에라스는 조끼 아래 있던 펜던트를 꺼냈다. 에라스는 펜던트 겉을 엄지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우릴 버렸어요. 우릴 버렸다고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거야." 테네프가 말했다. 그리고 곧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만."

"그때 전 어렸어요. 사람들은 아버지가 죽었다고 했죠. 아버지는 죽었으니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그런데 아버지를 만났고 제가 알던 아버지에 관한 건 모두 거짓말이었죠." 테네프를 쳐다보는 에라스의 호흡이 떨렸다. "전 어떻게 해야 하죠?"

테네프는 잠시 생각했다. "아버지를 잊어버려."

에라스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테네프가 에라스의 어깨를 잡았다. "소용 있다는 게 아니야. 너를 위해서지. 녹서스가 버티는 한 너에겐 항상 가족이 있을 테니까, 에라스."

에라스가 말을 멈췄다. 과거의 대화와 기억이 밀려왔다. 에라스가 숨을 내쉬며 펜던트를 잡아당기자 그의 목에서 펜던트의 끈이 끊어졌다. 에라스는 그것을 쳐다보다 천천히 손바닥을 뒤집어 뼛조각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에라스는 뒤돌아보지 않고 일행을 쫓아갔다. 곧 펜던트는 땅 밑으로 사라졌다.

4. 3편: 돌이킬 수 없는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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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꺼져 간다.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자 하늘은 서서히 검게 물들기 시작했고 붉은 잔물결이 얼룩을 남기며 퍼져 나갔다. 태양이 하루의 끝을 알리며 따스하게 메아리쳤다. 내 갑옷과 검에도 붉은 자국이 남아 있다. 오늘 앗아간 이들의 목숨이 외치는 마지막 울림이겠지. 처음 며칠 동안은 후유증 탓에 죄책감을 씻어 내려고 붉은 자국을 닦거나 죽음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죄책감이란 건 쉽게 없어지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죄책감을 덜어내는 일은 포기하게 됐다.

진홍색 망토를 두른 누군가가 휙 소리를 내며 내 옆 보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곁눈질로 계급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위님." 내가 일어나며 말했다.

"괜찮아." 그녀가 손을 젓는다. 이제 나도 병사를 이끌고 있으니 그녀와 동등한 지위임을 깜빡했다. 하지만 실감이 안 났다. 그녀는 귀족 출신이고, 나는 고아 출신의 검사니까.

그녀는 우리가 구릉지까지 호위 중인 기병대의 장교이다. 우린 함께 젖먹던 힘까지 내가며 교착 상태를 돌파해 왔다. 그녀는 제국의 관심을 받을 정도로 자부심이 뛰어났고 노련했으며 용맹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좀 쉬는 게 좋겠는데."

나는 힐끗 바라봤다. "놈들은 아이들의 비명을 내는 폭탄으로 우리를 급습하거나 밤중에 찾아와 쥐도 새도 모르게 공격할 거예요."

그녀의 눈동자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제9부대 장교가 그러는데, 놈들은 꿈에 들어와서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군."

"꿈이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숨을 내쉬며 물었다. "그럼 꿈에서 목숨을 빼앗긴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지친 기색의 미소를 보였다. "꿈을 잊어야겠지."

늘 그녀 곁을 지켜 주는 군마가 하나 있는데, 왠지 근처에 말 소리가 들리지 않아 물었다. "말은 어디에 있나요?"

그녀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지난주 우리가 점령했던 땅, 그곳의 마녀 때문이야..."

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도록 두 눈을 감고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녀는 말을 이어 갔다. "마녀가 죽기 전 내 말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더군.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저주를 건 거야. 오늘 아침, 결국 녀석은 일어나지 못했지."

"유감입니다."

"고통스러웠을 거야. 그래서 고통을 덜어 줬지." 그녀가 날 바라보곤 물었다. "자네도 고통스럽나?"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안심해. 지금 제국엔 네가 필요해. '그게' 말이야."

그녀는 땅에 박혀있는 육중한 검을 향해 턱을 기울였다. 아직도 내 검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 검은 하늘의 선물이야." 그녀가 신중히 단어를 고르며 말했다. "네가 이 검을 익숙하게 휘두르는 걸 본 적이 있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하늘의 선물이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거든. 넌 여태 굳건하게 잘 버텨 온 거야. 네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 너무 부담되면 내가 대신 들어 줄게."

"아닙니다." 반사적으로 손이 검으로 향했다. 어마어마한 무게에 안도감을 느꼈다. "제가 짊어진 짐은 제 몫이죠. 설령 제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다른 사람이 짊어지게 할 순 없어요."

그녀는 침묵 속에서 잠시 나를 차가운 눈빛으로 살펴보다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은 부담 가질 필요 없다 이거야. 아까 말한 것처럼, 우린 지금 네가 필요해. 이미 전장에서 피를 나눈 사이니, 자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이른 밤 아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긴 소리를 내며 공중을 맴돌았다. 잠을 잔다는 건 이곳에서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정말 끔찍한 곳이지만, 우리가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주먹을 댔다. "다크윌을 위하여."

"다크윌을 위하여. 감사합니다, 대위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마리트라고 불러."
리븐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다. 상처 때문에 기억에서 벗어났다 다시 평야의 고요 속으로 돌아갔다. 모든 감각이 '현재'에 맞춰졌다. 대지와 추수 때를 기다리는 농작물에서 나는 풍요로운 냄새, 상쾌한 공기, 진홍색으로 물들어가는 나뭇잎, 햇빛의 열기가 리븐의 피부에 닿았다.

리븐은 황금빛 태양이 널따란 잎과 줄기 사이로 내리쬐는 논밭 사이를 걸었다. 그 순간 리븐은 밭을 일구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그녀가 키운 보리는 그녀보다 높이 자라거나 최초의 땅 구석구석까지 퍼진 마법 문양으로 빛나지는 못했다. 몇 걸음 갈 때마다 빈 곳이 나왔다. 햇빛이 추수가 끝나 황량한 밭을 비추었다. 엄청난 양의 수확물은 이미 장에 내놓았다. 리븐은 빈 곳을 지날 때마다 멈춰 태양 아래 서서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끼며 햇볕을 쬈다.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하루 중 가장 더울 때였다. 리븐은 이마 쪽으로 팔뚝을 올리고는 바짝 마른 목을 가다듬었다. 목이 말랐다.

줄기 사이를 벗어나니 아사가 보였다. 아사는 두 손에 물이 든 가죽 주머니를 들고 리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이전에 리븐은 장에 다녀온 날 이후 양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지냈다. 생각할 시간을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부인을 묻어 줘야 했으니까.

"곧 수프 준비되니까 앉으렴." 아사는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너무 많이 만들었군. 내 정신 좀 보게."

리븐은 샤바 콘테를 위해 지은 묘지를 바라봤다. 샤바는 리븐에게 있어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존재 중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용서해 주세요, 파이르."

"무슨 용서?" 아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장을 보러 갔던 그 날, 저 혼자 가야 했어요." 리븐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계셨더라면—"

"온 세상의 짐을 네가 떠맡을 필요는 없다." 아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별들이 하늘에서 움직이는 길도, 장막 너머에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도 네가 알 필요는 없지. 세상의 조화는 위대하단다. 우리의 힘이 닿지 않는 영역이야."

"그래도 여전히 죄책감이 들어요."

"책임은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달려 있지." 아사는 리븐에게 물을 건네줬다. "난 네 마음을 느낄 수 있단다, 디에다. 그 순수한 마음을."

"꼭 그렇지는 않아요." 리븐은 물이 든 가죽 주머니를 받고선 묘지를 바라보았다. "샤바가 그리워요, 파이르."

아사는 리븐 곁에 서서 말했다. "나도 그립단다. 하지만 샤바를 위해 슬퍼하지는 않을 거다. 우리에게서 사라진 게 아니니 말이다. 그녀를 발견했을 때 고통 없이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것처럼 평안해 보이더구나. 다음 해 꽃이 피어날 무렵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리븐은 뺨에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영혼의 꽃이 피어날까요?"

"샤바 말이냐?" 아사는 활짝 웃었다. "글쎄, 한 송이로는 그녀를 담을 수 없을 것 같구나. 과수원 정도는 되어야지."

리븐은 아사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기쁨을 찾을 수 없었다. 리븐이 돌아보자 아사는 얼어붙은 채 멀리서 나타난 무리의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븐의 피가 차게 식었다. 리븐은 자신 안에 있는 확실함,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필연성을 느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모닥불 냄새가 그녀의 코에 피어올랐다. 길에서 만났던 치료사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파이르, 숨어요." 리븐이 주먹을 쥐며 말했다.
"농사라니, 정말." 마리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라스는 자매들을 따라 움직였다. 그들은 앞에 펼쳐진 대륙을 바라보았다. 오래전 죽은 신의 부러진 갈빗대를 연상하게 하는 장대한 바위기둥들이 동쪽으로 줄지어 있었다. 서쪽엔 진홍빛으로 물든 숲이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로 변변찮은 농가도 있었다.

"전쟁이 리븐을 정말 망가뜨린 건지도 몰라." 티팔렌지가 말했다. 화학 공격으로 폐허가 된 장소를 떠나 이동하자 희미한 소리를 내던 그녀의 검은 크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내었다. 들리기보다는 느껴지는 그 감각은 몸서리치게 하고 이를 꽉 물게 했다. "리븐은 뭐든 기르고 만들려는 거야. 자신의 과거를 달래려는 거지."

마리트가 코웃음 쳤다. "밭에 심고 길러 추수한 작물을 장에 파는 건가. 시인이나 할 만한 일을 하고 있군."

"일단 리븐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마." 아렐이 첫째의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살아 있다라. 여러 해석이 가능한 말이네. 팔다리 중 몇 개를 남기면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마리트..." 테네프가 경고하듯 말했다.

마리트가 레이디 헨리에타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릴 배신한 녀석이야. 군대도, 녹서스도 아닌 우리를 배신했다고. 탈영병과 배신자에게 베풀어 줄 자비 따윈 없어. 다들 잊어버린 거야?"

테네프가 마리트와 시선을 마주했다. "잊지 않았어. 하지만 냉철하게 생각해. 우린 반드시 리븐에게 족쇄를 채운 채 제국으로 돌아가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에라스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탈츠에게 다가가 탈츠의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대화에 끼지 않았지만 에라스는 어느 정도 공감했다. 특히 마리트가 탈영병에 대해 신랄하게 이야기하는 부분이 그랬다. 여태 일어난 일을 돌이켜 보니 에라스는 마리트에게 화가 나기보다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배신은 비수처럼 여전히 에라스의 가슴속에 박혀 있었다.

에라스가 따라잡을 수 있도록 테네프는 몇 발자국 뒤로 갔다.

"그렇지만 순순히 나올지 의심이 되는데. 분명 일이 쉽게 끝나진 않을 거야." 테네프가 족쇄를 팔뚝에 감으며 말했다.

"그런 상황을 기대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에라스가 답했다.

테네프가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만반의 준비를 해 둬. 전에 했던 것처럼 하면 돼. 저번 전투에서 잘했잖아."

에라스가 비웃듯 말했다. "그럼 제가 무서워서 눈물이나 질질 짤까 봐요? 무슨 데마시아 여자애도 아니고."

자매들은 하나같이 뒤돌아 에라스를 쳐다봤다.

"왜요?" 에라스는 자매들을 한 명씩 쳐다봤다. "그러니까 '데마시아' 여자애 말이에요." 자매들은 다시 등을 돌렸다.

아렐은 계속해서 소리를 내는 티팔렌지의 검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며 티팔렌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그렇게 소리 내야 해?"

"아니." 티팔렌지가 웃었다. 티팔렌지가 룬이 세공된 검을 쓰다듬자 소리가 멈췄다. "냄새는 필요 없어. 이제 사냥감이 눈앞에 있으니 직접 느낄 수 있지."

무리는 농장을 향해 걸어갔다. 에라스는 자매들이 걸어가며 조용히 전략을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어디에 설지, 각도와 지형, 전투가 벌어지면 누가 나설 건지에 대해 따분하고도 무서우리만큼 침착하게 토론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손은 모두 무기를 꽉 쥐고 있었다.

자매들은 마치 요새를 포위하거나 전장에서 전군을 맞닥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대화했다. 그들은 리븐의 힘을 알고 있듯 조심스러웠다. 에라스는 마법의 검을 휘두르며 자신이 벤 적들의 피를 뒤집어쓴 잔혹한 전쟁 여왕의 모습을 떠올렸다.

에라스는 그 모습과 외딴 농가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고요했다. 에라스가 아이오니아를 여행하던 내내 마주했던 장엄함과 혼란이 거짓이었던 듯 잔잔했다. 그는 잠시 동안 다사다난했던 여정이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 현실인지 고민했다. 불멸의 요새를 올려다봤던 게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에라스가 과거에 어떤 인물이었든, 지금 이곳에 있는 에라스는 제국의 임무를 수행하고 반역자에게 정의를 보여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탈츠가 우르릉거리며 목이 막힌 듯한 소리를 냈다. 에라스가 인상을 찌푸린 채 탈츠의 입에 팔을 넣어 침에 젖은 닭 뼈를 꺼냈다.

"닭고기는 언제 먹은 거야?" 에라스가 중얼거렸다.

탈츠가 앓는 소리를 냈다. 에라스는 탈츠를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이리 와." 에라스는 탈츠의 고삐를 잡은 후 뼈를 내던졌다.

험한 흙길이 농장으로 이어졌다. 농장으로 향하며 에라스는 그곳을 관찰했다. 아이오니아 특유의 조직적으로 겹겹이 짜인 집이 있었고 소를 한두 마리는 키울 수 있을 정도로 큰 헛간과 이미 부분부분 추수가 끝난 작은 밭이 있었다. 에라스도 훈련을 통해 배운 대로 자매들과 같이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매복이 어디에 숨어 있을까? 싸우기에 가장 적합한 공터는 어디 있지? 상황이 안 좋아지면 어디로 후퇴해야 할까?'

에라스는 어떤 매복도,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무장한 농부 무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길 끝에 흙투성이의 옷을 입은 여자만 홀로 서 있었을 뿐이었다.

자매들은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여자를 주시하며 멈춰 섰다.

"누구죠?" 에라스가 물었다.

테네프가 느리게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리븐이야."

에라스는 눈을 깜박였다. "저 여자가요?"

"그래." 아렐이 대답했다.

에라스가 리븐을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했던 모습과 다른데요."

"겉보기가 전부는 아니지, 종자야. 너만 해도 멍청해 보이니까." 마리트는 잠시 자신의 말을 곱씹었다. "별로 좋은 예가 아니군."

"'그건' 어디 있지?"

모두가 티팔렌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가?" 테네프가 물었다.

"검 말이야." 티팔렌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에서 검이 느껴져. 뭔가 잘못됐어."

"검을 쓰는 것 같지는 않군. 놀라운데. 부러뜨려서 쟁기로라도 쓰나 보지." 마리트가 말했다.

티팔렌지가 마리트를 쳐다봤다. 마리트는 소리를 내지 않고 빙긋 웃었다.

"그래, 그러지 않길 바라야지."

잠시 동안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리븐은 농가 문 앞에 서 있었고 자매들은 그녀 앞에 모여 섰다. 에라스는 탈츠와 함께 뒤에 물러서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았다.

정적이 흐르다 불안정해졌다. 마침내 누군가 말을 꺼냈다.

"리븐." 테네프였다.

"테네프." 리븐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약간은 슬픔이 묻어났다. 에라스는 리븐의 목소리에서 어떠한 분노도, 공포도 느끼지 못했다. 오직 고통만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옛 전우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괴로움이 덮여 있었다. 리븐의 시선은 나머지 자매들을 빠르게 훑어보다 아렐과 그녀의 용 사냥개들에게 머물렀다. "아렐. 녀석들도 많이 자랐네."

아렐이 고개를 까딱였다.

"자신이 버린 삶을 기억하는군." 마리트는 다른 자매들을 바라보다 다시 리븐을 보며 소리쳤다. "자신이 배신한 사람들도 말이지."

가면을 쓴 여자의 목소리를 듣자 리븐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마리트?"

"흉터가 생겨서." 마리트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레이디 헨리에타가 쇳소리를 냈다. "이런 날이 올 줄 너도 분명 알았겠지."

리븐이 숨을 내쉬었다. "시간문제였지."

테네프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래서 이제 때가 온 거지. 혼자 있어?"

"혼자야." 리븐이 대답했다.

아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널 믿어야 할까?"

"한 명이 더 있었어." 리븐이 농가 문 옆에 있는 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에라스는 새로 지은 묘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나 혼자야." 리븐이 눈을 부릅떴다. "원하는 게 뭐지?"

"너, 리븐." 안장에 앉은 마리트가 아래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널 찾으러 왔어."

에라스는 리븐이 눈에 띄게 경직한 걸 보았다. 그녀의 팔 근육은 꿈틀거렸고 손가락은 들고 있지도 않은 검의 손잡이를 쥐는 듯했다. 에라스는 칼집에 들어 있는 자신의 언월도 위에 손을 얹었다.

"우리와 한바탕할 생각이야, 리븐?" 테네프가 가시 돋친 사슬 고리를 느슨하게 풀자 무거운 철 고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쳤다. "네가 누군지 잊은 건가?"

리븐이 조용히 말했다. "난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아니야. 이제 모두 지난 일이지."

"얼마나 지났다고." 아렐이 말했다.

심장 박동 소리와 함께 긴장이 맴돌며 침묵이 계속됐다. 에라스는 자매들과 리븐을 보며 누가 먼저 움직일지, 리븐의 검이 마력을 드러내고 격렬한 전투가 시작될지 생각했다.

"좋아." 마리트가 레이디 헨리에타의 등에서 내려오자 에라스는 움찔했다. 그녀는 에라스에게 고삐를 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때? 할 이야기가 많잖아."

리븐은 잠시 가만히 있더니 열려 있는 문 뒤로 물러서 안쪽으로 손짓했다. "들어와."

자매들은 문지방을 넘어 농가로 들어갔다. 모두 문 옆에 무기를 내려놓았다. "거기 있어." 아렐이 용 사냥개들에게 명령했다. 용 사냥개들은 끙끙대더니 문 양옆에 앉았다. 에라스는 그들을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티팔렌지의 손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넌 안 돼." 티팔렌지가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에라스의 살을 꾹 눌렀다.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더니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에라스는 그녀가 가까이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걸 눈치챘다. "넌 날 따라와."
리븐은 자매들이 탁자에 앉는 걸 지켜봤다. 세 자매는 모두 한쪽에 앉았다. 감정의 물결을 타고 불안과 공포가 몰려와 그녀를 덮쳤다.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리븐이 옆에서 함께 싸웠던, 불과 피로 맺은 자매들이었다. 그들의 본질은 분명했지만 모두 변했고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상처로 덮여 있었다. 리븐은 자신도 변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탁자 길이만큼의 균열이 그들을 갈라놓았다. 자매들은 한때 알던 전우의 가면을 쓴 낯선 이들 같았다.

마리트는 실제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리븐이 가면을 쳐다보는 걸 알아챘다.

"아, 이거?" 마리트는 머리 뒤로 손을 뻗어 매듭을 풀었다. 마리트가 가면을 벗은 모습을 보자 리븐의 심장이 가라앉았다.

"왜 그래, 리븐?" 마리트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 안 나? 그 불과 비명 말이야. 너도 거기 있었잖아."

리븐의 눈가가 욱신거렸다.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마리트?"

"난 살아남았어." 마리트의 흉측한 얼굴이 입술 없는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흠. 네가 거기 있었다면 너도 알았을 텐데 말이지."

리븐이 시선을 거뒀다. "모두 죽은 줄 알았어." 오늘이 오기까지 리븐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지금은 그 말로 설득하려는 게 자매들인지, 자신인지 알 수 없었다.

"죽지 않았지." 아렐이 고통스럽게 목을 가다듬으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참혹했지?"

리븐이 기억에 잠긴 채 말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야. 에미스탄 대장이 우리를 공격했을 때—”

"그 이름은 꺼내지도 마." 테네프가 으르렁거렸다. 마리트는 테네프를 흘낏 봤다. 테네프가 일어서더니 말했다. "그리고 우리를 탓할 생각도 하지 마. 넌 도망쳤어."

"그날에 대해 기억나는 게 뭐야?" 아렐이 젖은 기침 소리를 내며 물었다.

리븐은 눈을 감았다. 조각난 기억들이 머릿속에 지나가며 그녀의 귓가에 총성과 비명이 들렸다. 살이 타는 냄새와 맹독 냄새가 가득했다. 고통, 압박감, 군화를 할퀴는 손가락,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소리. 그러나 리븐은 그들을 살릴 수 없었다.

리븐이 마침내 대답했다. "부분부분 조금씩 기억나.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검의 무언가 때문인 것 같아."

"넌 멀쩡해 보이는데." 마리트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 나도 흉터가 있어." 리븐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모두 흉터가 있지." 테네프가 말했다. 그녀는 위압적인 시선으로 리븐을 바라봤다. "왜 도망친 거지?"
에라스는 티팔렌지 뒤에 바짝 붙어 정신없이 그녀를 따라갔다. 눈을 감은 채 걷는 티팔렌지의 얼굴을 타고 땀방울이 흘렀다. 검에 있는 룬이 희미하게 빛나며 고동치자 검 끝이 허공에서 잽싸게 움직였다. 에라스는 농가를 돌아보며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궁금해하다 헛간 밖에 멈춰 선 티팔렌지와 부딪힐 뻔했다.

"이곳에 뭔가 있어." 티팔렌지가 중얼거렸다.

에라스의 궁금증이 최고조에 달했다. 티팔렌지의 검에 깃든 룬 마법을 따라 반역자를 잡는 데 성공했으니 이곳 어딘가에 뭔가 숨겨져 있을 터였다. 티팔렌지의 힘을 보고 나니 에라스는 그런 강력한 유물을 직접 보고 싶었다.

작은 헛간 안의 외양간에서는 마른 소가 짚을 먹고 있었다. 에라스는 밖에 매어 둔 탈츠와 레이디 헨리에타를 이곳에 두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탈츠는 너무 커서 이곳이 무너질 터였고, 레이디 헨리에타는 소를 잡아먹을지도 모르니 면갑을 닦아내려면 엄청나게 힘들 게 분명했다.

티팔렌지의 검 끝이 짚더미 위에서 갑자기 멈췄다. "거기." 그녀가 허리를 굽히며 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그런 검을 이따위 장소에 두다니."

티팔렌지는 짚과 마른 풀 더미를 헤집었다. 이윽고 그녀가 자신의 검을 그 위로 가져가 날카로운 음절을 내뱉어 여물을 태워 버리자 에라스의 주먹 크기만 한 납작한 쇳조각이 나타났다. 에라스는 어두운 물질에 새겨진 룬의 일부를 알아보았다. 온전했던 모습에서 산산이 조각나 버린 것으로 보이는 파편 모서리였다.

"안 돼." 티팔렌지는 그 조각을 만지는 순간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안 돼, 안 돼..."

에라스는 티팔렌지의 분노가 뜨거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게 검 조각인가요? 그렇게 강력한 것이 어떻게 부러진 거죠?"

"부러뜨린 거야." 티팔렌지가 손가락으로 파편을 쓰다듬자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리븐이 부러뜨린 거라고."

에라스는 농가를 뒤돌아보며 자매들과 함께 있는 리븐을 떠올렸다.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벌떡 일어난 티팔렌지는 휙 돌아 에라스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분노로 들끓었다. "이런 조각이 더 있어." 그녀가 쇳소리를 내며 말했다. "조각들이 느껴져. 너와 내가 찾을 거야. 마지막 한 조각까지 모두."
리븐은 수프를 그릇에 담아 자매들 앞에 놓고는 자신의 몫을 담았다.

"양이 많은데." 마리트가 불 위에서 끓고 있는 커다란 솥을 보며 말했다. "배가 엄청 고픈가 봐, 리븐?"

리븐이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고는 말했다. "먹고 남은 건 일주일 정도 끓여 먹을 거야."

마리트는 그릇에 담긴 수프를 휘저었다. "대단하시네."

"내 말에 아직도 답을 안 했어." 테네프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 말했다. "왜 네가 목숨을 걸고 맹세했던 모든 걸 버리고 떠났는지 말해. 우리에게 그 정도는 말해 줘야지."

리븐은 식사를 멈추고 숟가락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고아였어. 아버지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우다 죽었는데 어디인지 들은 바는 없어. 어머니는 날 낳다가 죽었고. 녹서스의 부름을 받았을 때 나는 서둘러 그 기회를 잡았지. 모험이나 피를 보겠다는 욕망 때문이 아니었어." 리븐은 자매들을 쳐다보았다. "가족을 위해서였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어. 하지만 나보리에서 우리가 아군이라 부르던 이들이 쏜 불화살이 떨어졌을 때 모든 게 바뀌었지."

리븐은 숨을 들이마시며 기억을 다시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우리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였던 거라고."

테네프가 말했다. "녹서스는 네가 버린 제국과는 달라. 녹서스는 발전하고 변화했어. 다크윌은 죽고 귀족들은 무너졌지."

리븐은 마리트의 눈이 가늘어지며 그녀의 가면 속 흉터 조직이 자기도 모르게 꿈틀거리는 것을 알아챘다.

테네프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이제 제국은 힘이 있는 자가 출세할 수 있는 곳이야.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태양이 닿는 모든 곳에 우리의 자유와 뜻을 전하지."

리븐은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녹서스가 달라졌다면 왜 아직도 날 신경 쓰는 거지?"

"네가 신경 쓰이니까." 아렐이 말했다.

"우린 모두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마리트가 덧붙였다. "영웅이 죽은 줄 알았다고. 그런데 네가 살아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널 위해 죽을 수도 있었던 이들을 배반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지."

리븐이 말했다. "여기서 치료사를 만났어. 망가진 것들, 깨진 도자기나 석조를 고치는 사람이었지. 노래를 부르고 주문을 걸면 조각들이 서로 이어 붙어 다시 하나가 되지. 그 사람이 말했어. 모든 것에는 정령이 있다고. 그리고 모든 정령은 온전해지길 원한다고. 나도 내가 그 말을 믿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가끔은 깨진 것을 다시 이어 붙일 수 없다는 건 믿어. 되돌아갈 수 없는 거야. 고칠 수 없고 그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하지. 그 상태 그대로."
티팔렌지가 농장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파편을 찾아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 에라스는 티팔렌지의 지시에 따라 지하 저장고의 문을 향해 다가갔다. 에라스는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묘지 옆에 서서 작은 구조물의 우아한 건축 양식을 관찰했다.

잠시 동안 에라스는 파편을 찾아 묘지를 뒤질까 생각했지만 감히 묘지를 훼손하고 싶지는 않았다. 티팔렌지는 파편을 찾을 때마다 친한 친구의 시체를 찾은 것처럼 신음했다. 묘지 안에서 파편을 감지했다면 티팔렌지는 주저하지 않고 에라스에게 그곳을 뒤지라고 했을 것이다.

에라스는 농가에서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고함이나 싸움이 일어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라스는 자매들이 리븐을 찾으러 아이오니아를 가로질러 이곳까지 오게 만든 해답을 찾고 있을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몹시도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벽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네 자매 사이의 일이었으며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에라스는 저 상태가 얼마나 계속될지 궁금했다.

에라스는 쭈그리고 앉아 지하 저장고 문을 잡아 열었다. 차갑고 습한 공기가 퍼지며 암흑으로 이어지는 거친 돌계단이 드러났다. 어둠 속을 응시하며 에라스는 단지 길을 밝히기 위해 룬 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그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탈츠에게 다가갔다. 탈츠와 레이디 헨리에타가 고삐를 풀고 에라스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지 않도록 두 짐승의 고삐를 확인한 후 에라스는 탈츠 등에 매둔 도구를 사용해 작은 횃불을 만들었다.

시야를 확보한 에라스는 저장고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횃불을 앞쪽으로 들자 일렁이는 불빛 아래 있는 것만 분명히 보였다. 부대용 삼베 더미, 점토와 돌로 만든 밀봉된 항아리, 농기구가 희미하게 보였다.

어둠 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짧고 날카롭게 스치는 소리였다.

에라스는 재빠르게 칼을 꺼내 손에 쥐었다. 칼을 휘두르기에는 공간이 너무 비좁았다. 에라스는 얼어붙은 채 소리에 집중하며 횃불을 천천히 움직였다.

에라스가 횃불을 갖다 대는 곳마다 빛이 물체의 모양과 질감을 드러냈다. 숨을 낮고 고르게 쉬며 칼을 손에 쥔 채 소리가 나는 곳에 집중하던 에라스는 무언가를 보고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겁에 질려 크게 뜬 무언가의 눈에 불빛이 반짝였다.

그것은 룬 검의 파편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우리가 그 말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 마리트는 여전히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음식을 먹을 생각 따윈 전혀 들지 않았다. "널 찾기 위해 우리가 무얼 견뎠는데? 얼마나 피를 흘렸는데? 우리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그냥 널 놔두고 돌아갈 줄 알았어?"

"많은 일이 일어났어." 리븐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많은 일이. 돌아가서 내가 죽었다고 해. 틀린 말도 아니지. 너희들이 알던 리븐은 죽었으니.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야. 아직 이 땅에 속죄할 것이 남아 있는 산산이 조각난 사람이라고."

"거짓말이야." 아렐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속죄해야 할 대상은 우리라고."

"이곳에서의 네 삶이 거짓이야, 리븐." 테네프가 말했다. "넌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어. 우리가 알던 녹서스인으로 돌아와, 리븐. 우리와 함께 제국으로 돌아가서 당당히 심판을 받아들여. 정말 네가 산산이 조각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고향이야말로 네 마지막 조각을 찾을 곳이야."

마리트는 비뚤어진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처형당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이어서 아렐이 말했다. "많은 것이 변했어. 하지만 녹서스의 정신은 그대로지. 우리와 함께 돌아가서 죗값을 받아. 우리에게 맞서면 여기에서 죽는 거야."

테네프는 화난 얼굴로 자매들을 쳐다보더니 리븐을 바라봤다. "새로운 녹서스를 받아들여. 제국에 헌신을 맹세한다면 제국도 네 가치를 인정할 거야. 너도 아직 마음이 있다는 거 알아, 리븐. 늦지 않았어."

리븐이 시선을 거두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의 말속에 진심이 느껴져 망설였다. 정말 녹서스가 다르다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도 그곳에서 그녀가 살아갈 수 있을까? 제국이 그녀를 찾았으니 이제 멈추게 되는 것일까?

리븐은 엄숙히 임무에 임하는 자매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들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이 임무에 실패하면 제국에서는 더 많은 추적자를 보낼 것이다. 이곳에서 그녀를 떼어 낼 때까지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될 것인가?

굴복의 무게가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다. 마음속 목소리가 그들과 함께 가라고 말했다. 너 때문에 더 이상 아이오니아 사람들을 다치게 하지 말라고, 네 영혼을 위해 때가 되지도 않은 이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파이르, 아사 같은 사람도.

"리븐! 당장 나와!"

집 밖에서 들린 목소리에 네 자매는 깜짝 놀랐다. 리븐이 일어서자 나머지 자매들도 따라 섰다. 그들의 자세는 뻣뻣해졌다.

"뭐지?" 리븐이 물었다.

테네프가 아렐과 마리트를 쳐다보다 다시 리븐을 보았다. "나가 보자."
리븐이 집 안에서 나오고 자매들은 리븐의 양옆에 섰다. 그들이 햇빛이 있는 곳으로 나오자 에라스와 티팔렌지가 무기를 꺼낸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에라스가 찾아낸 아이오니아 남자가 그 둘 사이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디에다." 아사가 숨을 들이켰다.

"파이르!" 그에게 가려던 리븐은 티팔렌지가 룬 검을 남자의 목에 갖다 대자 멈춰 섰다. "풀어 줘." 리븐이 명령조로 말했다. "그분은 아무 관계 없어!"

"네 거짓말로 이자도 관계가 있게 됐지." 티팔렌지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눈빛은 차가웠다. "이제 눈물의 재회는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지."

에라스는 티팔렌지를 쳐다봤다. 리븐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론?"

"네가 원하는 자는 내 손에 있다." 티팔렌지가 아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넌 내가 원하는 걸 가지고 있지." 티팔렌지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조각난 파편을 리븐에게 보였다. "그걸 내게 가져와."

리븐은 티팔렌지와 아사를 번갈아 쳐다보며 망설였다.

"슬슬 지겨워지네." 티팔렌지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녀가 검을 세게 누르자 아사의 목에서 붉은 방울이 흐르는 것이 에라스 눈에도 보였다. "난 부탁하는 게 아니야. 너도 내가 말하는 게 뭔지 알 거야. 그걸 지금 가져와. 아니면 묘지를 하나 더 세우게 될 테니."

리븐은 잠시 아사를 바라봤다. 에라스는 침묵을 유지하며 리븐을 뜯어보았다. 리븐이 이 사이로 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농가로 들어갔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지켜봐." 티팔렌지가 명령했다. 아렐이 첫째에게 신호를 보내자 첫째는 농가 뒤로 뛰어갔고 나머지 둘은 집 앞 귀퉁이를 지켰다.

"무슨 상황이지, 티팔렌지?" 테네프가 묻더니 에라스를 쳐다봤다. "이 남자는 누구고?"

"제가 저장고에서 찾았—”

"조용." 티팔렌지가 에라스의 말을 끊었다. "이 일은 내 소관이야."

리븐이 천으로 감싼 무언가를 가지고 집 앞터로 나왔다. 모두 그 물건을 쳐다봤고, 특히나 티팔렌지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보여줘. 지금 당장." 티팔렌지가 명령했다.

리븐이 얼굴을 굳힌 채 천천히 천을 풀자 거대한 검의 자루와 날이 드러났다. 검의 들쭉날쭉한 부분이 깨진 이처럼 자루에 붙어 있었고, 에라스가 모은 파편에서 본 것과 같은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티팔렌지는 검을 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젠장." 티팔렌지의 손가락은 검의 파편을 꽉 쥐고 있었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는 해?"

"이 검은 내가 맡은 거야." 리븐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죽이 둘러진 검자루를 느릿하게 쥐며 말했다. "이건 내가 책임져. 이제 놓아줘."

"그 검이 너에게 가면 안 됐어." 티팔렌지가 낮게 말했다. "실수를 바로잡지 않은 채로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어. 하지만 이제 더는 안 돼. 검을 내놔."

검을 쥔 리븐은 산산이 조각났을지언정 강인해 보였다. 에라스는 리븐의 마음에 저항심이 커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넌 이 검을 가질 수 없어. 이 검은 그들에게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내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야."

"그럼 이자는 죽어." 티팔렌지가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너 또한 말이지. 검은 훼손되어도 그 자체로 중요해. 넌 망가지고 가치 없는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검의 후광을 입은 기생충이나 다름없어."

"내가 목적이 아니었군." 리븐이 자매들을 책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거지?"

에라스는 티팔렌지를 쳐다보았다. '여기까지 온 게 정말 단순히 검 때문일까?'

"네가 그분들로부터 도망친 순간부터 네 삶은 끝이었다. 검은 그분들의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았지." 티팔렌지가 화가 들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배신한 순간 넌 죽은 거다, 리븐. 난 그저 우리의 검을 되찾으러 왔을 뿐이다."

"리븐을 죽이겠다는 거야?" 테네프가 고리 사슬을 덜거덕거리며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그건 우리가 동의한 일이 아닌데?"

아렐이 손짓을 하자 용 사냥개들이 그녀에게로 달려와 으르렁거렸다.

"날 거역하겠다는 건가?" 티팔렌지가 코웃음 쳤다. "제군들, 너흰 탈영병이다. 내 엄호 없이 녹서스에 돌아가면 너희는 처형되겠지. 내 말대로 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거야. 다른 선택지는 없어."

"티팔렌지 말이 맞아."

테네프와 아렐이 돌아서서 마리트를 쳐다봤다. 마리트는 농가 문 쪽으로 걸어가 자신의 창을 쥐었다. 리븐은 자신을 지나쳐 티팔렌지의 곁으로 가는 마리트를 바라보았다.

"룬 세공사. 모든 게 끝나면 내게 검을 주겠다고 약속했지. 그런데 내가 참을성이 없어서 말이야. 그냥 리븐의 검을 대신 가질게."

"그럼 네 자격을 증명해 봐. 리븐을 쓰러뜨리고 검을 뺏어 오면 네게 검을 주지."

"마리트, 내 말 들어 봐." 테네프가 애원했다. "이럴 순 없어. 모두 동의했잖아. 리븐은 녹서스로 돌아가서 심판을 받아야 해."

"내가 심판하지!" 마리트가 되받아치며 리븐을 향해 창을 겨눴다. "그 검은 내 검이었어야 해. 넌 그 검으로 해야 할 일을 할 만한 힘이 없었어. 내가 그 검을 고쳐 다시 일어설 거야. 내 명성도, 내 혈통도 어둠 속에 잊히지 않게 되겠지. 내가 빼앗긴 것을 그 검으로 되찾겠다!"

에라스가 두 여자를 살펴보자 마리트의 창날 너머로 햇볕이 내리쬈다.

마리트는 리븐 앞쪽으로 침을 뱉으며 말했다. "껍데기만 남은 네게 부러진 검이라. 지금 검을 들 수 있기는 해?"

그 순간 티팔렌지가 비명을 질렀다. 티팔렌지의 손에서 파편이 휙 빠져나가며 손이 붉게 물들었다. 파편은 에메랄드빛을 내뿜으며 공기를 가르고 리븐을 향해 날아갔다. 리븐의 머리 위에서 파편들이 자리를 잡으며 맞춰지더니 균열이 생긴 하나의 검이 되어 강력한 룬의 힘을 내뿜었다.

"검을 들 수 있냐고?" 리븐이 거대한 검을 한 번 휘두르자 먼지와 자갈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그래, 마리트. 아직 들 수 있지."

마리트는 흉측한 얼굴에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난 내 삶 전부를 빼앗겼고, 넌 네 삶을 내다 버렸지. 그럼, 붙어 보자고! 우리가 널 찾으려 흘린 피를 생각하면 넌 죽어 마땅해, 리븐!"

테네프는 아렐과 함께 티팔렌지에게로 갔다. "끼어들지 마." 티팔렌지는 낮게 내뱉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에라스를 쳐다보더니 늙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잡아 둬."

에라스는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언월도를 잡았다. 남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면서도 테네프와 아렐, 티팔렌지 사이에 피어오르는 분열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편을 들어야 한다면 어떻게 하지?'

에라스의 생각이 빠르게 그쪽으로 흘렀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배신에 몸서리치는 마리트의 편에 서야 할까? 의무를 중시하는 테네프의 편에 서야 할까? 속을 알 수 없지만 티팔렌지의 권위에 기대는 게 안전할까?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날 죽이려고 들까? 난 저들을 죽일 수 있을까?'

그 와중에 금방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 같았고, 에라스는 리븐의 룬 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리트, 이러지 마. 널 죽이고 싶지 않아." 리븐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마리트가 창을 휘둘렀다. "걱정하지 마, 리븐.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두 사람은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라스는 그들의 자세에 주목했다. 마리트는 유려하고 공격적이었으며 리븐은 절제되고 생각을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그들의 무기가 둘 사이의 공간을 메웠다. 무기가 휙 움직이며 작은 원을 만들어 냈지만 서로 닿지는 않았다.

이윽고 마리트가 움직였다.

틈을 발견한 마리트는 앞으로 튀어 올라 창을 휘둘러 리븐을 몰아붙였다. 리븐이 뒷걸음치며 길고 넓은 검날을 이용해 소용돌이치는 공격을 막아 내자 불꽃과 에메랄드빛 룬 에너지가 번쩍였다. 마리트는 공격을 피하며 창자루로 리븐의 검을 쳐내고는 리븐의 목을 향해 돌진했다.

리븐이 소리치며 검으로 원호를 그리자 엄청난 바람이 몰아쳐 마리트를 날려 버렸다. 마리트는 미끄러지며 창을 들지 않은 손으로 땅을 짚어 바람을 버텨 냈다.

"귀엽네." 마리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일어서더니 다시 공격했다.

그들의 싸움이 계속되는 와중에 에라스는 방어를 일관하던 리븐의 움직임이 변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녀 안에서 그녀를 최강의 녹서스 전사로 만들었던 전사의 정신이 깨어나고 있었다. 베고 피하고 공격하며 그녀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았다. 침착함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그녀를 압도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에라스는 리븐의 분노를 보았다.

리븐이 공격을 시작했다. 그녀의 룬 검이 마리트의 방어를 무너뜨리며 들끓는 소리를 냈다. 흉터로 뒤덮인 마리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리트는 자신이 가진 최고의 기술을 모두 사용해 리븐의 공격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모든 반격은 빗나갔고 리븐의 방어를 파고들려는 시도는 저지되었다.

처음으로 에라스는 마리트가 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피처럼 붉게 물든 나뭇잎이 달린 거대한 나무 그림자 아래에서 리븐은 이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땀범벅이 되었다. 마리트의 움직임은 탈진과 절망으로 품위를 잃었다. 마리트의 기세가 약해진 반면 리븐은 점점 힘을 얻었다. 강력한 공격을 퍼붓는 리븐의 눈은 번득였다. 리븐은 마리트를 나무로 날려 버린 후 검을 들어 올려 내리쳤다. 마리트가 들어 올린 창자루는 리븐의 검에 의해 반으로 부러졌다.

"널 망가뜨린 것으로부터 절대 도망칠 수 없을 거다, 리븐." 마리트가 차갑게 웃으며 두 동강이 난 창자루를 내던졌다. "네가 어딜 가든 그게 항상 널 따라다닐 거라고."

마리트가 부러진 창날을 들고 달려들었다. 리븐은 고함을 치며 검을 앞으로 찔렀다. 마리트를 나무로 밀어붙이자 검 주위로 붉은 파열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리븐의 눈이 커졌다. 리븐이 검을 뽑아내자 마리트는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마리트가 가슴을 움켜쥐었지만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선혈을 멈추지 못했다.

마리트를 바라보는 리븐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졌다. 검을 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도 풀어졌다. "날 용서해, 마리트."

마리트는 리븐을 쳐다봤다. 힘이 꺼져 가고 있는 마리트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리븐의 옷깃을 붙들었다. 그녀는 리븐을 가까이 끌어당기며 리븐의 눈을 바라보았다.

"싫어." 마리트가 쇳소리를 내며 말했다. 경멸을 끝으로 그녀는 바닥에 고꾸라지며 숨을 거뒀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충격이 맴돌았다. 특히나 에라스는 매우 충격을 받았다. 에라스에게 있어 끔찍한 흉터를 남긴 화학 공격에서도 살아남고 자신과 함께 한 여정에서 치른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던 마리트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존재였다. 그런 마리트가 무너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에라스는 생각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린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유감이군. 하지만 예상 못 한 일은 아니야." 티팔렌지가 말했다.

지친 리븐의 손아귀에서 검이 빠져나가자 리븐은 움찔했다. 몸을 돌리자 양손에 룬 검을 들고 있는 티팔렌지가 보였다.

"이곳까지 오는 데 그 많은 일을 겪으면서 그 검을 되찾은 뒤에도 너를 살려 두어야 할지 고민했지." 티팔렌지는 리븐의 검을 꽉 쥐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네가 저지른 불경스러운 일을 보니, 네 심장이 뛰는 한 이곳을 그냥 떠날 수 없겠군."

"그만해!" 테네프가 소리 질렀다. 테네프와 아렐은 티팔렌지에게 다가갔다. 아사는 그 광경을 보고 끙끙대며 에라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했다.

티팔렌지가 검을 교차해 휘두르자 에너지 폭풍이 몰아쳐 자매들을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아렐의 용 사냥개들은 으르렁거리며 주인을 보호할 태세를 갖췄다. 티팔렌지가 주문을 외우자 세 사냥개는 공중에 멈춘 채 룬 에너지 막 안에 갇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에라스는 심장이 목구멍에서 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언월도를 쥐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빠져나갔다.

"너희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티팔렌지가 으르렁거렸다.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나는 너희를 모두 죽이고 평화롭게 잠들 거야. 내가 정의고 너희는 모두—"

순간 티팔렌지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일순간 티팔렌지의 몸이 뻣뻣해지더니 곧 쓰러졌다. 두 자루의 룬 검이 생명을 잃은 손가락에서 굴러떨어졌다. 티팔렌지의 몸에서 붉게 물든 언월도가 빠져나왔다. 에라스가 뒤에서 그녀를 찌른 것이다.

용 사냥개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리둥절해 보였지만 무사했다. 힘겹게 일어난 아렐과 테네프는 놀란 듯 에라스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를 처음 본 것처럼.

에라스가 속삭였다. "더 이상은 배신도, 비밀도 안 돼요. 모든 일이 의문투성이였지만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은 명예예요. 녹서스에 맹세한 우리의 임무 말이죠."

테네프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리븐은 허리를 굽히고 룬 검을 줍는 테네프를 지켜봤다. 리븐의 검은 다시 산산이 조각나 땅에 흩어졌다. 아렐은 파편들을 줍고 테네프와 함께 리븐 곁에 섰다.

"에라스의 말이 맞아." 테네프가 말했다. 그녀는 복수심이나 증오가 아닌 슬픈 표정으로 리븐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명예뿐이지. 나는 녹서스에 네가 심판을 받게 하겠다는 맹세를 했어. 그리고 그렇게 할 거고."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아사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데려가지 않아도 되지 않소."

에라스는 자매들과 리븐을 보았다. '더 큰 일이 벌어지게 될까?'

"갈게."

"디에다, 안 돼..." 아사는 리븐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애원했다.

리븐은 떨리는 숨을 뱉으며 말했다. "이제 안 돼요, 파이르. 저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이 더 있어서는 안 돼요. 책임은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달려 있죠." 리븐은 아사를 쳐다봤다. "이게 제 선택이에요."

아사는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그는 몸을 떨며 숨을 내뱉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네가 어디 가서 무얼 하든 넌 언제나 내 디에다일 것이다. 언제나."

"파이르는 항상 여기 계실 거예요." 리븐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리븐은 테네프를 올려다봤다. "너희와 갈 테니 이분은 놓아줘."

테네프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맹세하지." 테네프가 에라스에게 고갯짓을 하자 에라스는 곧바로 아사를 풀어 주었다.

휘청거리며 일어선 아사는 리븐의 모습에 고개를 떨군 채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테네프가 리븐에게 사슬을 채우는 것을 보던 아사는 문가에 무너져 내려 흐느꼈다.

에라스는 순간 탈츠와 레이디 헨리에타를 떠올리며 몸을 돌렸다. 다행히 탈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밧줄에 묶여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그런데 레이디 헨리에타의 고삐가 풀려 있었다.

레이디 헨리에타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 에라스의 심장이 요동쳤다. 에라스는 레이디 헨리에타가 나무 그늘 아래 있는 마리트를 주둥이로 부드럽게 누르며 깨우려 하는 것을 발견했다. 에라스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에라스가 다가가자 헨리에타는 송곳니를 드러내 씩씩거리며 에라스가 마리트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그래, 그래." 에라스가 헨리에타의 목을 부드럽게 쓸며 속삭였다.

헨리에타의 씩씩거리는 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에라스는 헨리에타의 고삐를 쥐었지만 헨리에타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렐이 마침내 모두의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을 꺼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룬 세공사가 죽었으니 임무는 이제 아무 의미 없어."

테네프가 티팔렌지 시체를 보며 말했다. "티팔렌지는 제국의 임무를 수행하다 죽은 거야. 티팔렌지의 이름으로 시작한 일이니 우리가 이어받아 탈영병을 심판받게 해야 해."

"그렇게 말할 거야?" 아렐이 물었다.

테네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니까."

"그래. 그럼 너와 에라스는 정리된 것 같아 보이네." 아렐이 말했다.

에라스는 아렐을 쳐다보다 깨달았다. "우리와 같이 갈 생각이 아니군요."

"이건 중요한 임무였지." 아렐은 고개를 저으며 리븐의 검 파편을 테네프에게 넘겼다. "하지만 일이 끝났으니 나는 내 방식대로 녹서스에 충성하겠어."

테네프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럼 다시 만나지, 아렐."

아렐은 잠시 손을 바라보다 팔목을 붙들었다. "다시 만나." 아렐이 손짓하자 용 사냥개들이 그녀 곁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흙길을 따라 농가에서 멀어졌다.

"이제 우리 둘뿐이군요." 에라스가 아렐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말했다.

"너도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을 거야."

에라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테네프와 리븐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 임무는 나 혼자 감당할 거야. 내 일은 끝났지만 넌 아니지." 테네프는 레이디 헨리에타에게 고갯짓을 했다. "이제 가서 네 배신자를 찾아와."

순간 에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리븐의 힘을 보니 테네프를 리븐과 홀로 두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게 맞는 선택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테네프의 말이 맞았다. 이곳에는 에라스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에라스는 자세를 바로잡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자랑스럽게 내리쳤다. "녹서스를 위하여."

테네프가 경례에 답했다. "녹서스를 위하여."

에라스는 테네프가 마리트의 가문 깃발로 마리트의 시체를 덮어 탈츠 위에 태우는 것을 도왔다. 에라스는 자신의 짐을 챙기고 탈츠의 옆구리를 토닥이며 말했다. "크고 강하게 자라라, 탈츠. 테네프 마님을 잘 지켜 드리고."

탈츠는 장난스럽게 자신의 머리를 휘저어 에라스를 넘어뜨리려 했다. 에라스는 웃었지만 눈이 따가워지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엄지로 눈물을 닦아 내고는 레이디 헨리에타에게로 갔다.

레이디 헨리에타에게 다가가며 에라스는 그녀가 죽인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렸다. 레이디 헨리에타가 분노의 포효를 내지르면 사냥감의 목에서는 목이 졸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매번 그녀의 면갑을 닦아 주던 것 또한 생각났다. 에라스는 부드럽게 콧노래를 부르며 다가가 비늘로 뒤덮인 가죽을 쓰다듬었다. 레이디 헨리에타는 뒤척였으나 그에게서 몸을 움츠리지는 않았다. 용기가 생긴 에라스는 고삐를 쥐고 레이디 헨리에타의 등 위에 올라탔다.

레이디 헨리에타가 에라스를 받아들였다.
리븐과 테네프는 에라스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슬에서 소리가 나자 리븐은 농장에서 사슬을 차고 끌려가는 게 두 번째라는 것이 생각났다. 그녀는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떠올렸다. 당시의 분노와 공포는 점차 사라져 갔다. 이번에는 그때와 같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하지만 리븐 또한 마찬가지였다.

테네프가 리븐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넌 내 포로지만, 내 자매이기도 하지. 네게 맞는 대우를 해줄게."

리븐은 숨을 내쉬며 다시는 보지 못할 아사와 집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좋아." 테네프는 리븐이 탈츠 위에 타도록 도와주며 앞으로 이어질 긴 여정을 떠올렸다. "녹서스로 가자."
에라스는 밤새 길을 달렸다. 리븐을 찾으러 가는 길은 걸어야 해서 힘들었지만 레이디 헨리에타를 타고 이동하니 신이 날 정도였다. 맡은 일만 아니었다면 짐승을 타고 달리는 기쁨을 만끽했겠지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그는 가슴속에 돌이 내려앉은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울타리는 열리지 않았다. 에라스는 언월도를 들어 갑옷에 부딪혀서 소리를 냈다.

에라스가 고함쳤다. "나는 조빈의 아들이다! 조빈은 모습을 드러내라. 아니면 내가 조빈을 만날 수 있게 물러서라."

잠시 침묵이 흐르고 에라스가 들어갈 수 있도록 울타리가 열렸다. 그는 아이오니아 사람들과 변절한 녹서스인들의 겁에 질린 시선을 느끼며 재빨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나오세요!"

"진정하게!" 무리에서 장로가 나타났다. 에라스는 그자가 화학 공격이 일어났던 장소에서 지켜보던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정하게, 젊은이. 내가 그에게 데려다주겠네."

에라스는 숨을 내쉬며 언월도를 칼집에 집어넣고 레이디 헨리에타 위에서 내려왔다. 장로와 에라스는 조빈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아이오니아인들은 헨리에타에게서 거리를 두고 모여들어 차분한 선율을 노래했다. 헨리에타는 그들에게 침을 뱉었다.

오두막은 어두웠다. 장로는 촛불 몇 개를 켜서 에라스가 방 중앙에 천으로 덮여 있는 형체를 알아볼 수 있도록 불을 밝혔다.

"자네 아버질세." 장로가 말했다.

에라스는 숨을 내쉬었다. 에라스가 무릎을 꿇고 손이 떨리지 않도록 애쓰며 천을 내리자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빛을 잃은 아버지의 얼굴은 흉터와 멍이 가득했다.

"무슨 일로 돌아왔는가?" 장로가 물었다.

에라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나와 동료를 배신했는지, 왜 나보리 형제단에게 정보를 넘겼는지 물어보러 왔어요."

"배신? 젊은이, 조빈은 배신하지 않았네." 장로의 얼굴에 슬픔이 내려앉았다.

에라스는 흉터를 내려다보며 멍과 찢긴 상처를 눈에 담았다.

"자네가 떠나고 얼마 안 되어 형제단이 찾아와 자네들의 행적을 밝히라고 하더군. 조빈은 그들에게 저항했고 그 때문에 고문을 당했네. 조빈은 결국 목숨을 잃었지."

에라스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숨이 목구멍에 걸린 것 같았다. 감정이 그 안에서 충돌했다. 아버지의 여정. 자신의 부족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곳에서 거처를 찾는 역경을 견뎌 낸 아버지. 가족의 상처를 알게 된 아버지. 가족이 갈라졌다 다시 하나가 된 모습을 본 아버지.

에라스는 아버지의 얼굴을 매만졌다. 눈물방울이 조빈의 볼 위로 떨어졌다. 에라스의 가슴을 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졌다. 가슴속 응어리가 따스함에 녹아내렸다.

장로가 조심스레 말했다. "이곳에 머물러도 좋네. 조빈의 아들이라면 우리도 환영일세. 이곳의 꽃 축제를 기다려 보세."

에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버지의 영혼은 저와 함께 평안히 있어요."

장로는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아버지를 모실 수 있게 도와주세요." 에라스가 천을 잡으며 말했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어디로 모시려고 하는가?"

에라스는 장로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고향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