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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08 05:46:34

정경시


파일:정경시(1919년).jpg
1919년 촬영된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선(子善)
소산(少山)
출생 1855년 9월 23일[1]
경기도 지평현 상동면 학촌리
(현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1리 198번지)[2]
사망 1929년 2월 24일 (향년 73세)
경기도 양평군
본관 초계 정씨[3]
가족 장남 정호직[4]
종교 천도교
묘소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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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55년 9월 23일 경기도 지평현 상동면 학촌리(현 양평군 양동면 쌍학1리 198번지)의 양반가[5]에서 아버지 학산(鶴山) 정현상(鄭顯庠, 1836 ~ 1901)[6]과 어머니 청주 한씨[7] 사이에서 2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순종 2) 1월 12일 공립양근보통학교[8] 전과(專科) 부훈도에 임명되었고[9], 1월 30일 대한제국 학부에서 실시한 교원검정회에서 한문 전과 훈도 검정에 합격하여[10] 1910년까지 훈도로 근무하였다. 1908년 10월 이전에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양근군지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였다.[11] 경술국치 후에는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에 분원의숙(分院義塾)이라는 사숙(私塾)을 설립하여 한문교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같은 천도교인이던 신재원과 함께 3월 23일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 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이후 김종학(金鍾學)·민주혁을 동지로 포섭한 뒤 청운면 여물리의 어느 다리 아래에서 여러 차례 만나면서 신재원이 미리 사 둔 무명으로 깃발을 3개 만들었고, 김종학은 각 깃발에 먹으로 '조선독립기(朝鮮獨立旗)'를 썼다. 그리고 본인과 민주혁, 김종학이 깃발을 각각 한 개씩 나눠 가졌다.

1919년 3월 23일 당일 오후 3시 40분에 김종학·민주혁과 함께 깃발을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에 도착했고, 장터에 모인 군중 150여 명을 지휘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금고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12], 이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었다.[13] 이에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면서[14]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20년 6월 20일 만기출옥하였으나[15], 같은 달 대한독립단 경기도지단장 한덕리의 권유로 본 단체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만세 격문을 양평군 일대에 배포하고 군자금 모집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양평군수 윤성희(尹成熙)와 양평경찰서 소속 일본 제국 경찰에게 사형집행선고문 등을 우편으로 발송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21년 6월에 다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정치범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24년 2월 18일 만기출옥하여 2월 21일 고향 양평군으로 돌아갔으나[16], 이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9년 2월 24일에 사망했다.

1980년 8월 14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1919년 4월 24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는 9월 22일생,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0월 23일생으로 각각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2]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기준. 1919년 4월 24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는 197번지로 기재되어 있다.[3]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관동파(關東派)-송포공파(松浦公派) 28세 시(時) 항렬.[4] 鄭鎬直. 1883.1.9. ~ 1960.11.28. 자는 방숙(方叔), 호는 석당(石堂).[5] 1921년 6월 24일 일본 외무성기록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신분이 兩班(양반)으로 기록되어 있다.[6] 자는 양여(養汝).[7] 한진유(韓鎭維)의 딸이다.[8]양평초등학교[9] 1908년 1월 12일 승정원일기[10] #[11] 1908년 10월 25일 기호흥학회월보 제3호 기사[12] 1919년 4월 24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3] 1919년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14] 1919년 6월 21일 고등법원 판결문[15]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16] 1924년 3월 7일 동아일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