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21:52:07

정봉식

이 문서는 토막글입니다.

토막글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colbgcolor=#000><colcolor=#fff> 정봉식
鄭捧植
출생 1884년
함경북도 길주
사망 1946년 (향년 62세)
경기도 서울시[1] 또는 서울특별자유시[2]
(현 서울특별시)
본관 하동 정씨[3]
경력 중농
부모 아버지 정운[4] (? ~ 1922 이후[5])
형제 6남 1녀 중 장남[6]
배우자 한성실 (1886 ~ 1953)
자녀 장남 정주영 (1915 ~ 2001)
차남 정인영 (1920 ~ 2006)
삼남 정순영 (1922 ~ 2005)
장녀 정희영 (1925 ~ 2015)
사남 정세영 (1928 ~ 2005)
오남 정신영 (1931 ~ 1962)
육남 정상영 (1936 ~ 2021)
1. 개요2. 생애3. 여담4. 가족 관계5. 참고 자료

[clearfix]

1. 개요

통천군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이자 정주영 회장의 아버지.

2. 생애

1884년 아버지 정운(鄭雲)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서당 훈장이었으나 경제나 농사엔 관심이 없어 장남인 자신이 일찍부터 돈을 벌러 다니거나 농사를 지었다.

성인이 된 후엔 아버지의 말에 따라 한성실과 결혼해 6남 1녀를 낳았다.

부모들이 으레 그렇듯 정주영의 상경 및 현대그룹 창업을 반대한 바 있다. 그 때문에 정주영은 4번째로 영구적으로 상경하기 전까지 세번 상경해 놓고 아버지에 의해 고향으로 끌려가거나 다른 사정으로 인해 자의로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다만 이는 정봉식이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특별히 없어서가 아니라 일제 시절 2등시민으로서 대놓고 차별을 받는 조선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자신처럼 시골에서 평범하게 농사 짓는 것이 아니면 상경해서 어떤 일을 하든 실패할 것이라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정주영이 4번째로 영구적으로 상경한 후 아도서비스를 창업하고 자식들을 낳고 서울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며 살자 결국엔 본인도 서울로 같이 가서 살았고 1946년 서울에서 사망했다.[7]

3. 여담

4. 가족 관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범현대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 참고 자료


[1] 8월 11일 이전 사망 시.[2] 9월 28일 이후 사망 시.[3] 지예부사공파(知禮部事公派) 23세손 金변 외자 항렬이나 항렬을 따르지 않았다.[4] 서당을 운영하며 훈장을 했으나 농사나 살림은 별 신경을 안 썼다고 한다.[5] 즉, 아버지는 장손, 차손, 삼손을 봤다.[6] 남동생 중 한 명이 변중석 여사가 살던 마을에 살 때 변중석 여사를 보고 정주영에게 소개해줬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1950년 한국 전쟁 때 피난하지 못 해 후손들도 북한에서 산다고 하며 1991년 정주영이 사촌들을 만났을 때 삼촌,고모는 봤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1950년~1991년 사이에 사망한 듯 하다. 다만 어떤 자료에서는 이때 숙모나 고모는 만나 봤다는 얘기가 있으니 이마저도 확실치 않다.[7] 사실 장남이 고향에서 부모님을 평생 모시고 사는 게 당연했던 시기였던지라 이로 보아 말년에는 정주영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