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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7-18 21:30:01

정욱(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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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작중 행적3. 기타

1. 개요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정욱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

2. 작중 행적

조조군 책사. 순욱의 자결, 가후의 처세로 인해 조조군 제일의 책사에 가까운 인물.

위왕으로 자리를 굳히는데 집중하며 당장 유비 쪽에 대군을 동원하고 싶지 않은 조조의 속내를 짐작하고 상용으로 도피한 장로를 이용하는 계책을 내놓는다. 이후 유비가 입촉을 시작한 시점에도 대군을 내서 유비를 쳐야 한다고 조언하나,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후 임상대치가 길어지도록 염행의 파견은 미루자는 조언을 하나 역시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비군이 익주를 차지한 이후 정말로 대군을 동원할 강적이 되었다고 판단해 경계한다.

서량 전쟁에 조조가 친정할 때 함께하나 유비군의 방어선을 보고 뚫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정욱은 실제로 가후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직접 전선에서 전투를 지휘한 적도 있는 무장이기도 하다. 유비가 써 보낸 맹덕전에 말도 안되는 유언비어라고 열폭하면서 손해를 보더라도 유비군을 치고, 손권을 움직여서 유비군의 형주전선을 위협하자고 계책을 내지만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고 퇴각을 결정한다.

유비의 북벌 당시에도 승상부에 근무하며 조홍군 6만이 정면 승부에서 유비에게 패하자 경악한다. 이후 조조의 장기전 전략으로 유리해졌을 때 경기, 위황의 난을 빌미로 수백명의 무고한 이들을 맹덕전의 내용대로 숙청하는 조조를 말려보지만 조조가 듣지 않자 포기한다.

이후 조조의 친정에 동행하고, 각지의 정보를 취합하며 조조의 선택을 돕는다. 조조 주변 인물들 중 젊은 시절부터 유비를 알아온 몇 없는 인물이라, 번성 전투에서 가후가 뭔가 이상하다고 지적하자 그 때야 자신들이 편견에 빠졌다는 걸 깨닫는다.

빼앗긴 번성 공방 와중에 동오가 패퇴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 강력한 수군을 거느린 동오가 계책을 쓴 것이라며 희망회로를 돌렸으나 이후 문빙이 촉한군에게 합류하는 걸 보게 된다.

이후 유비의 여론전에 조조가 전군을 몰고 사열하는 것으로 대응하자, 위왕 조조가 건재한 이상 유비의 여론전 따위는 잔재주라고 자신만만해 했지만, 수명이 다해가는 조조는 사열식 이후부터 정욱과 하후돈 등의 측근들을 앞세우고 본인은 퇴각해 남양군에서 결전을 벌이려고 한다. 이를 보아 정욱도 조조의 수명이 다해간다는 것을 눈치챘을 듯하다.

남양 결전이 벌어지자 조조를 따라 본영에서 종군했으나 관우와 장비, 황충의 활약에 아군 장수들이 무너지거나 밀리고 끝내 조조의 공세를 버텨낸 유비가 직접 돌격해오자 빨리 막을 장수를 내보내라고 조조를 채근한다. 이후 주령이 전사하자 퇴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래도 조조라면 알아서 명을 내릴 것이라 판단해 가만히 있다가 진짜 유비가 목전에 다가옴에도 아무것도 못하는 조조를 보며 그가 아직도 현실을 부정 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겁하며, 청주병들의 희생으로 틈이 생긴 사이 조휴가 조조를 데리고 후퇴할 때 조조가 기어이 피를 토하자 경악한다.

조조 사망 당시 곁에 있던 사람 중 1명으로, 조조가 죽어갈 때 옆에서 슬퍼하였다. 세자 조비를 지지해 하북 정권의 안정화에 전력하는 한편 조비가 조창과 조식을 제거하려 하자 원가의 일을 상기시키며 단호하게 막아선다. 1세대 공신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원로답게 바른 조언을 한 것이나 정욱의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게 문제. 결국 하후돈이 먼저 쓰러지고 자신도 수명이 얼마 안 남은 것을 깨닫고, 자신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실감한다.

청주병 숙청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조비와 조정 신하들은 모두 잘 되었다며 기뻐하는 와중에 청주병들이 '조공(曹公)'에 대한 미련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 않아 별 피해가 나오지 않았음을 깨닫고,[1] 더 이상 조정에서 1세대 군졸들인 청주병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조조와 자신들 같은 1세대들은 자신들 사후에도 나라가 잘 굴러가게 만들기 위해 엄정한 법령을 강조했고 이번에도 법령대로 처리된 사안이지만 무언가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절망감을 느끼고, 그날로 조정에서 은퇴한 뒤 사망한다.

3. 기타

성격은 조조의 정치전략에 이견이 있어도 한번 거절당하면 바로 물러서는 타입으로 할 때는 하면서도 눈치를 잘 보는, 가후와 순욱의 중간이라 볼 수 있다. 조조는 정욱이 자신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해도 '죽여야 한다'는 특유의 촉이 발동한 적이 1번도 없어서 정욱에게 살의를 가진 적이 없다고. 조조의 이상에 동의하여 마지막까지 조조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조조 사후 청주병 숙청 사건을 통해 자신들이 평생에 걸쳐 이루고자 한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절망 속에서 사망하는 등 순욱과 어느 정도 비슷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조조와 극초기부터 함께하던 인물이라서 조조를 조공(曹公)이라 호칭하는 인물 중 1명이다. 조조가 즉위한 이후에는 '위왕 전하'로 호칭했지만, 조조 사후 조조를 그리워할 때 '조공'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1] 당시 청주병들은 지휘관이 없는 병졸들뿐이었지만 수십 년간의 전투 경험이 있는 만큼 작정하고 싸웠으면 사마의군도 큰 피해가 났을 거라고 한다. 그러나 청주병들은 마지막까지 '조공'을 부르짖거나 하후돈 장군을 불러달라 요청할 뿐 제대로 싸우지 않고 몰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