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발해 제 3대 문왕(발해)의 넷째 딸인 정효공주(756~792년)의 무덤이다. 중경 현덕부에 자리한 지린 성 화룡현 서고성(西古城)에서 13km 떨어진 룽터우산(龍頭山)의 왕족 묏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발해의 전축분[벽돌무덤]으로 2기의 고분이 벽돌로 축조된 것이 확인되었다.
룽터우산은 남에서 북으로 뻗으면서 약간 만곡된 산의 중간부에 서향으로 전개된 구릉이 있고, 고분군은 이 산의 말단부에 남향한 형태로 남아 있다. 정효공주묘가 위치한 지역은 인위적으로 평지를 조성한 약 2,000km²의 면적 중에 약 100m²를 주변보다 50cm정도 돌출된 형태로 조성하였다. 정효공주묘는 1차 조사 후 북한 학자들에 의해 추가로 묘도 부분의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2]
출토 유물 묘비와 함께 벽화견본기도판, 도용[3], 도금한 동식, 동모식정 등이 수습되었다. 인골도 수습되었는데 모두 31점으로 남녀의 것으로 구분되며 여성의 것이 5점, 남성의 것이 26점이다. 골격에 의하면 여성의 키는 156cm, 남성의 키는 161cm이고, 나이는 대략 25~45세로 추정된다. 여성의 경우는 정효공주로 36세에 사망하였다는 점과 일치하고, 남성의 골격은 발해 무덤이 부부합장이란 점을 근거하여 정효공주의 부군으로 추정한다.[4]
2. 정효공주 묘의 구조형식
정효공주 묘의 구조 형식은 무덤 외관의 규모는 남북길이 15m, 동서너비 7m이며 방향은 남향으로 방향각은 170도이다. 무덤의 내부는 묘도(墓道), 묘문(墓文), 용도(甬道:복도), 묘실(墓室), 지상탑(地上塔) 등 다섯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탑은 이미 무너져 훼손된 상태로 현재 기단만 남아있다.묘도는 남쪽에 위치하여 길이는 7,1m, 남쪽 너비 5.75m, 북쪽 너비는 3.3m에 이르며 동서 두 벽은 판축되어 있다. 묘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5.5m 떨어진 곳으로부터 계단 형태가 시작되는데 5층으로 되어있다.
묘도의 북쪽 끝에 있는 묘문은 비탈 식으로 길이는 1.6m이며 위에 백회를 발랐다. 묘문의 뒤는 복도로 전체 길이는 1.9m, 남쪽 너비 1.6m, 북쪽 너비는 1.7m이다.
복도는 두 부채형태의 돌문을 세워 경계로 삼아 앞과 뒤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 뒤에 위치한 묘실은 장방형으로 남북길이 3.1m, 동서 너비 2.1m이며 묘실 바닥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는 약 3.4m이다.
묘실의 지붕은 평행고임천정으로 쌓았고, 네 벽은 장방형 벽돌로 엇갈리게 쌓았으며 남쪽 벽이 수직을 이루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 동, 서, 북의 세 벽은 모두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안쪽으로 기울어졌다.
무덤의 묘실과 복도에서는 벽화와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벽화는 12명의 인물을 주제로 하였으며 0.981.17m 크기로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안쪽 좌・우 벽에는 무사가 각 1명씩 마주보는 위치에 그려져 있다.[5]
3. 정효공주 묘의 벽화
자세한 내용은 정효공주 무덤 벽화 문서 참고하십시오.4. 정효공주묘의 비문
정효공주의 묘지명은 발굴 당시 완전한 모습으로 크기는 높이 105cm, 너비 58cm, 두께 26cm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묘비문은 모두 18행으로 728자이며 9자는 손상된 탓에 판독하기 어려웠으나 나머지 719자는 판별이 가능했다. 묘지문의 제 1행은 비문이고 제 2행에서 13행은 서문이며 제 14행부터 제 18행까지가 명문이다.[.현재]
묘지명에 따르면 정효공주는 문왕의 넷째 딸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유순하고 빼어난 용모를 가진 인물이다. 정효공주는 정혜공주와 마찬가지로 시서와 예악을 즐길 줄 아는 훌륭한 배필로 군자에게 시집을 갔으며 문장력이 뛰어나고 말은 이치에 맞았으며, 갈고 닦아서 순결한 지조를 갖추고자 하였다.
또한 역시 남편이 일찍 죽고 그 어린 딸도 일찍 사망하였는데 묘지명에는 이후 육행을 크게 갖추고 삼종을 지켰다고 서술되어 있다.
공주는 대흥 56년(792) 여름 6월 9일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사망 후 정효공주라는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28일 기묘일에 염곡(染谷)의 서쪽 언덕에 배장되었으며 묘지명을 작성한 날짜는 기록되지 않았다.
발해제국의 정혜공주와 정효공주 묘지명이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서술되었던 이유에 대해서 한정인은 문적원 같은 곳에 원본을 두고 개인적 신상에 관한 부분들만 수정을 하여 비문을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며 발해 특유의 묘지명 구성방식이 있었기에 아마도 당의 묘지명과 구성상 큰 틀에서는 유사한 형식을 보이지만 내용 구성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7]
[벽돌무덤] [2]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발해 역사와 문화(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07), pp.185~187.[3] 陶俑:예전에 순장할 때 사람 대신 함께 묻던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4] 출처 - 동북아역사재단, 발해 역사와 문화(서울: 동북아역사재단, 2007), pp.305~306.[5] 출처 - 박은미, 唐代 중국 소재 한국 여성 묘지명의 내용과 특징(석사학위논문, 학교명(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전공, 2017년), pp.19~20.[.현재] 이 묘지명은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7] 출처 - 박은미, 唐代 중국 소재 한국 여성 묘지명의 내용과 특징(석사학위논문, 학교명(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전공, 2017년), pp.3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