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진원(進元) |
본관 | 창녕 조씨[1] |
출생 | 1891년[2] 3월 1일 |
경상도 신녕현 지곡면 월지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월지마을)[3] | |
사망 | 1961년 7월 16일[4] |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월지마을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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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1년 3월 1일 경상도 신녕현 지곡면 월지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월지마을)에서 아버지 조도승(曺度承, 1855. 6. 1 ~ 1900. 4. 16)과 어머니 김해 김씨(1850. 2. 19 ~ 1922. 1. 11)[5]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홍종현은 영천군 지곡면 오산동에 살던 조병진과 19촌 지간의 족질(族姪)인 조주생(曺周生, 1894. 1. 5 ~ 1971. 9. 12)[6]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는 당시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영천면 장날인 4월 12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전날인 11일 홍종현은 마을 상점에서 붉은 목면(木棉)을 사들고 같은 마을에 사는 그를 찾아와 깃발로 만세를 부를 것이니 태극무늬를 그려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이때 그는 홍종현의 계획에 찬동하며 깃발에 태극무늬를 그려주었다. 이어 홍종현은 조주생의 집에서 역시 같은 마을에 살던 조병진과 20촌 지간의 족손(族孫)인 조재복에게 동일하게 만세를 부를 것이라며 「대한독립만세 군위 양곡(良谷) 홍종현」이라고 깃발에 써달라고 부탁하여 받아냈고, 거사에 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준비를 했다.#
거사 당일인 12일 오후 3시 30분경, 1천여명의 상인과 주민들이 모이자, 그는 홍종현·조재복·조주생 등과 함께 영천면 창구동 영천공립보통학교[7] 교문 앞 시장에서 태극기와 독립만세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군중들이 호응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나, 마침 이곳을 순찰중이던 순사보 김배석(金拜石)에게 체포되었다.
조병진은 그해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 90도를 선고받고 형벌을 받은 뒤 불구의 몸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지역의 후학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등 계몽 운동에 앞장섰으며, 1961년 7월 16일 별세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1] 희천공파(熙川公派)-사의공계(司議公系) 23세 병(秉) 병(柄) 상(相) 항렬. 족보에 기록된 일명은 조병호(曺秉扈).[2] 창녕조씨희천공파보 권2 상 222쪽에는 1892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창녕 조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조재복도 이 마을 출신이며, 독립유공자 이원대는 이웃의 오산리 운산마을 출신이다.[4] 창녕조씨희천공파보 권2 상 222쪽에는 1950년 6월 10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5] 김휘철(金彙哲)의 딸이다.[6] 족보명 조주환(曺周煥).[7] 지금의 영천시 금노동에 있는 영천초등학교를 말한다. 당시에는 영천향교를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고, 1929년 현 위치에 이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