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6:46:19

조사온

요사(遼史)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f6e8e1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2권 「태조기(太祖紀)」 3·4권 「태종기(太宗紀)」 5권 「세종기(世宗紀)」
야율아보기 야율요골 야율올욕
6·7권 「목종기(穆宗紀)」 8·9권 「경종기(景宗紀)」 10·11·12·13·14·15·16·17권 「성종기(成宗紀)」
야율술률 야율명의 야율문수노
18·19·20권 「흥종기(興宗紀)」 21·22·23·24·25·26권 「도종기(道宗紀)」 27·28·29·30권 「천조제기(天祚帝紀)」
야율지골 야율사랄 야율아과 · 야율순 · 야율아리 · 야율대석
※ 31권 ~ 62권은 志에 해당. 63권 ~ 70권은 表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2><tablewidth=100%><tablebgcolor=#a0522d> 71권 「후비전(后妃傳)」 ||
소탁진 · 소아리신 · 소월리타 · 소암모근 · 술률평 · 소온 · 소철갈지 · 견비 · 소황후 · 소작 · 소보살가 · 소누근 · 소달리 · 소삼천 · 소관음
소탄사 · 소탈리라 · 소사고 · 소비비 · 소귀가
72권 「종실전(宗室傳)」 73권 「야율갈로등전(耶律曷魯等傳)」
야율배 · 야율이호 · 야율준 · 야율오로알 야율갈로 · 소적로 소아고지 · 야율사열적 야율로고 야율파덕 · 야율욕온 · 야율해리(海里)
74권 「야율적랄등전(耶律敵剌等傳)」 75권 「야율적렬등전(耶律覿烈等傳)」
야율적랄 · 소흔독 · 강묵기 · 한연휘 · 한지고 야율적렬 야율우지 · 야율탁진 야율고 야율돌려불 · 왕욱 · 야율도로군
76권 「야율해리등전(耶律解里等傳)」
야율해리(解里) · 야율발리득 · 야율삭고 · 야율노불고 · 조연수 · 고모한 · 조사온 · 야율구리사 · 장려
77권 「야율옥질등전(耶律屋質等傳)」 78권 「야율이랍갈등전(耶律夷臘葛等傳)」
야율옥질 · 야율후 · 야율안단 · 야율와 · 야율퇴욱 · 야율달열 야율이랍갈 · 소해리 · 소호사 · 소사온 · 소계선
79권 「실방등전(室昉等傳)」 80권 「장검등전(張儉等傳)」
실방 · 야율현적 · 여리 · 곽습 · 야율아몰리 장검 · 형포박 · 마득신 · 소박 · 야율팔가
81권 「야율실로등전(耶律室魯等傳)」 82권 「야율융운등전(耶律隆運等傳)」
야율실로 · 왕계충 · 소효충 · 진소곤 · 소합탁 야율융운 · 야율발고철 · 소양아 · 무백 · 소상가 · 야율호고
83권 「야율휴가등전(耶律休哥等傳)」 84권 「야율사등전(耶律沙等傳)」
야율휴가 · 야율사진 · 야율해저 · 야율학고 야율사 · 야율말지 · 소간 · 야율선보 · 야율해리
85권 「소달름등전(蕭撻凜等傳)」
소달름 · 소관음노 · 야율제자 · 야율해리(諧理) · 야율노과 · 소류 · 고훈 · 해화삭노 · 소탑열갈 · 야율살합
86권 「야율합주등전(耶律合住等傳)」
야율합주 · 유경 · 유육부 · 야율요리 · 우온서 · 두방 · 소화상 · 야율합리지 · 야율파적
87권 「소효목등전(蕭孝穆等傳)」
소효목 · 소포노 · 야율포고 · 하행미
88권 「소적렬등전(蕭敵烈等傳)」
소적렬(蕭敵烈) · 야율분노 · 소배압 소항덕 · 야율자충 · 야율요질 · 야율홍고 · 고정 · 야율적록(的琭) · 대강예
89권 「야율서성등전(耶律庶成等傳)」 90권 「소아랄등전(蕭阿剌等傳)」
야율서성 · 양석 · 야율한류 · 양길 · 야율화상 소아랄 · 야율의선 · 소도외 · 소탑랄갈 · 야율적록(敵祿)
91권 「야율한팔등전(耶律韓八等傳)」 92권 「소탈랄등전(蕭奪剌等傳)」
야율한팔 · 야율당고 · 소출철 · 야율결 · 야율복리독 소탈랄 · 소보달 · 야율후신 · 야율고욱 · 야율독매 · 소한가 · 소오야
93권 「소혜등전(蕭惠等傳)」
소혜 · 소우로 · 소도옥 · 야율탁진
94권 「야율화가등전(耶律化哥等傳)」
야율화가 · 야율알랍 · 야율속살 · 소아노대 · 야율나야 · 야율하로소고 · 야율세량
95권 「야율홍고등전(耶律弘古等傳)」
야율홍고 · 야율마륙 · 소적렬(蕭滴冽) · 야율적록 · 야율진가노 · 야율특마 · 야율선동 · 소소삽 · 야율대비노
96권 「야율인선등전(耶律仁先等傳)」
야율인선 · 야율량 · 소한가노 · 소덕 · 소유신 · 소악음노 · 야율적렬 · 요경행 · 야율아사
97권 「야율알특랄등전(耶律斡特剌等傳)」
야율알특랄 · 해리 · 두경용 · 야율인길 · 양적 · 조휘 · 왕관 · 야율희손
98권 「소올납등전(蕭兀納等傳)」
소올납 · 야율엄 · 요신 · 야율호려
99권 「소암수등전(蕭巖壽等傳)」 100권 「야율당고전(耶律棠古等傳)」
소암수 · 야율살랄 · 소속살 · 야율달불야 · 소달불야 · 소홀고 · 야율석류 야율당고 · 소득리저 · 소수알 · 야율장노 · 야율출자
101권 「야율적랄등전(耶律敵剌等傳)」 102권 「소봉선등전(蕭奉先等傳)」
야율적랄 · 야율아식보 · 소을설 · 소호독 소봉선 · 이처온 · 장림 · 야율여도
103·104권 「문학전(文學傳)」 105권 「능리전(能吏傳)」
소한가노 · 이한 · 왕정 · 야율소 · 요휘 · 야율맹간 · 야율곡욕 대공정 · 소문 · 마인망 · 야율탁로알 · 양준욱 · 왕당
106권 「탁행전(卓行傳)」 107권 「열녀전(列女傳)」
소차랄 · 야율관노 · 소포리불 야율상가 · 소의신 · 소와리본 · 소뇌란
108권 「방기전(方技傳)」 109권 「영관·환관전(伶官宦官傳)」
직로고 · 왕백 · 위린 · 야율적로 · 야율을불가 나의경 · 왕계은 · 조안은
110·111권 「간신전(奸臣傳)」
야율을신 · 장효걸 · 야율연가 · 소십삼 · 소여리야 · 야율합로 · 소득리특 · 소와도알 · 소달로고 · 야율탑불야 · 소도고사
112·113·114권 「역신전(逆臣傳)」
야율할저 · 야율찰할 · 야율누국 · 야율중원 · 야율활가 · 소한 · 야율첩랍 · 야율랑 · 야율유가 · 야율해사 · 야율적랍 · 소혁 · 소호도 · 소첩리득 · 고첩 · 야율살랄죽 · 회리보 · 소특열
115권 「이국외기(二國外記)」
고려 · 서하
※ 116권은 國語解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0522d><tablebgcolor=#a0522d> ||
}}}}}} ||


1. 개요2. 생애3. 사망

1. 개요

趙思溫(890 ~ 939)

오대십국 시대의 연나라, 이후 요나라에서 활동한 인물. 자는 문미(文美).

2. 생애

노룡(盧龍)[1]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결단력이 있고 민첩했다고 한다. 체력이 뛰어났고 연나라 장수인 유인공(劉仁恭)의 휘하에 있었다.

훗날 후당을 건국하는 이존욱이 연나라에 죄를 물으면서 투항할 것을 권유했지만 거절했으며, 화살로 인해 눈을 다쳐 옷자락에 피가 묻을 정도였지만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다가 주덕위(周德威)에게 붙잡혔다. 이존욱에게 부장으로 기용되어 후량과의 싸움에서 신현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평주자사 겸 평주, 영주, 계주 등 삼주도지휘사가 되었다.

917년에 요나라의 태조 야율아보기가 대장을 보내 연 지역을 공략하자 요나라에 투항했다. 야율아보기는 거란족보다 수가 많은 한족을 다스리기 위해 한족 출신 인사들을 포섭했는데, 조사온을 기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조사온은 발해를 정벌하면서 한군도단련사(漢軍都團練使)[2]에 임명되어 부여성을 함락했다. 이때 전투에서 여러 번 부상을 입자 야율아보기가 친히 약을 내려주었다.

927년에 태종이 즉위하자 검교태보, 보정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936년에 후당이 후진이 차지한 태원을 공격하자 후진 황제 석경당이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조사온은 남주, 헌주의 군대를 이끌고 구원했다. 군을 이끌고 돌아와서는 남경유수, 노룡군절도사, 관내관찰처지등사, 개부의동삼사, 시중을 겸임했으며, 협모정란익성공신(協謀靜亂翊聖功臣)의 호를 받았고 고쳐서 임해군절도사가 되었다.

938년에는 황후를 책립하기 위한 의식의 부사가 되었고 돌아와서는 검교태사(檢校太師)[3]가 되었다.

야율아보기의 황후인 순흠황후 술률씨와의 일화가 있다. 야율아보기가 사망하자 술률씨는 '지하에서 선제를 뵙게 해 주겠다'면서 여러 장수와 신하들을 처형해 순장했다. 그런데 조사온이 무슨 일인지 술률씨의 화를 사서 여기에 걸려들 위기에 처했다. 술률씨가 '그대는 선제의 친신(親信)인데, 어찌 그를 뵈러 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자 조사온은 '친하기로는 황후만한 사람이 없는데 황후께서는 어찌하여 가지 않으십니까?'라고 받아쳤다. 그러자 술률씨가 '나는 본래 선제를 따라 지하에 가려 했으나 자식들이 어리고 나라 안에 변고가 많아 아직 그렇게 할 수가 없었소. 그러나 나의 한 쪽 팔을 잘라 그 곳에 보낼 수는 있소.'라면서, 자기 손목 한 쪽을 잘라냈다. 그렇게 조사온은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 #

3. 사망

二年有星隕于庭卒上遣使賻祭贈太師魏國公子延照延靖官至使相
회동 2년(939년), 별이 뜰에 떨어졌고 죽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 부의를 내리고 제사를 지냈으며, 태사와 위국공에 추증하였다. 아들로 연조(延照)와 연정(延靖)이 있는데, 관직이 사상(使相)에 이르렀다.
요사(遼史)》 권76 조사온 열전 #
二年春有星隕於庭俄薄疾以三月廿日薨享年五十有入上聞震悼奠祭賻賵有加贈太師衛國公葬昌平縣五華山之陽敕集賢大學士張礪銘其神道
회동 2년 봄, 별이 뜰에 떨어졌다. 갑자기 박질(薄疾)[4]을 얻어 3월 20일에 죽었다. 향년 50이었다. 황제가 소식을 듣고 애도하면서 재물과 수레를 보내 제사지내게 하였으며, 관직을 태사와 위국공으로 높여 주었다. 창평현[5] 오화산의 땅에 장사지냈다. 칙을 내려 집현대학사 장려로 하여금 신도비에 글을 새기게 하였다.
《추간집(秋澗集)》 권48 노룡조씨가전(盧龍趙氏家傳) #
939년, 5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사후 태사, 위국공에 추증되었다. 사인은 심혈관계 질환이었다. 맥이 몹시 빨리 뛰는 것을 뜻하는 박질(薄疾)은 부정맥으로 볼 수 있는데, 심장병이 있는 환자에서 발생한 심실성 부정맥의 경우 돌연사할 수 있다.# 요나라의 정사인 《요사》와 원나라 때 사람인 왕운(王惲)의 문집인 《추간집》의 내용을 종합한 내용이다. 《추간집》에는 조사온을 시조로 하는 노룡 조씨 가문에 대한 글인 노룡조씨가전(盧龍趙氏家傳)이 실려 있다. 가전(家傳)이란 어떤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온 내용이라는 뜻이다. 《요사》의 내용과 비교해 보면 노룡조씨가전의 내용이 더욱 상세함을 알 수 있다.
遼史趙思溫傳曰太宗會同二年檢校太師趙思溫家有星隕於庭未幾卒
《요사》 조사온전에 이르기를, 태종 회동 2년 검교태사 조사온의 집 정원에 별이 떨어졌는데,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흠정속문헌통고(欽定續文獻通考)》 권214 #
《요사》의 기록을 근거로, 조사온이 운석을 맞아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다.### 그러나 이는 흥미를 끌기 위한 다분히 작위적인 해석이다. '운석' 운운은 불길한 일, 특히 죽음의 징조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역사적으로 별이 떨어지는 것은 불길한 일이며 하늘의 경고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시황이 죽기 1년 전에는 운석에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던 사건이 있었다. 《춘추좌씨전》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송나라에 운석이 떨어진 일을 기록하면서 '돌이 떨어졌다(石隕)'라고 하지 않고 '돌을 떨어지게 하였다(隕石)'라고 썼는데, 하늘이 재난을 내려 사람을 꾸짖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6]

북송 때 쓰인 설화집인 《태평광기》에는 별이 뜰 가운데 떨어진 것(有一星隕于庭中)을 불길하게 여겨 집을 비우고자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당대 사람들이 나쁜 징조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사(宋史)》 한기 열전에는 북송의 재상을 지낸 한기가 죽기 전날 밤 큰 별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7] 운석 이야기는 한기의 사례처럼 고관대작이 사망하기 전에 징조가 있었다더라 하는 식의 서술일 뿐이다.

남송 때 인물인 왕신(王信)의 사망 기사에도 운석이 등장한다. 《송사》 왕신 열전에 따르면 왕신의 집에 별이 떨어졌는데 밝기가 횃불과 같았고, 땅에 수 척 못 미쳐 흩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뒤 왕신이 죽었다는 것이다.[8] 그러나 이 역시 운석을 맞아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서도 운석은 죽음의 징조로 활용되었다. 사망 기사 앞의 문장을 살펴보면 왕신은 이미 부친상을 치른 후 병이 든 상태였다. 여기에 효종이 죽었다는 소식이 겹쳐 병이 도져 사망한 것이다.

사료는 역사적인 맥락, 서술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 운석 다음에 죽음이 언급된다고 해서 '운석에 맞아 죽었다'가 되는 것이 아니다. 중국 웹에도 조사온을 운석에 맞아 죽은 인물로 서술한 자료가 없다. 2008년 한 일본 블로그에서 '별님 직격에 의한 쇼크사?(お星さま直撃によるショック死?)' 정도로 서술했을 뿐이다.


[1] 오늘날의 허베이성 친황다오시 루룽현[2] 한족으로 구성된 군사를 총괄하는 직책[3] 검교는 명예직, 태사는 황제의 스승을 뜻한다. 검교태사란 원로 대신에게 주어지는 명예직 중에도 가장 높은 관직.[4] 맥이 몹시 빨리 뛰는 것.[5] 오늘날의 베이징시 창핑구[6] 《춘추좌씨전》 노희공 16년, 隕石于宋五[7] 《송사》 권312, 薨年六十八前一夕大星隕於治所[8] 《송사》 권400, 有星隕於其居光如炬不及地數尺而散數日信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