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11 15:06:48

조순식

파일:조순식.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조헌식(趙憲植)
본관 김제 조씨(金堤 趙氏)[1]
출생 1901년 2월 18일
전라북도 만경군 동이도면 마현리
(現 전라북도 김제시 공덕면 마현리 311번지)
사망 사망년도 미상
사망지 미상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901년 전라북도 만경군 동이도면 마현리(現 김제시 공덕면 마현리 311번지)에서 아버지 월정(月亭) 조철성(趙澈成, 1871. 4. 20 ~ 1944. 7. 14)과 어머니 전주 이씨(1874. 5. 29 ~ 1954. 3. 5)[2] 사이에서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김제군 김제면 신풍리(現 김제시 신풍동) 김제역 앞에 거주하기도 했다.

1925년 12월 20일 전라북도 김제군에서 김제청년회(金堤靑年會)·공덕청년회(孔德靑年會)·부용친목회(芙蓉親睦會) 등 김제군 내 청년단체들이 상호간의 연합조직에 대한 필요성에 따라 김제청년연맹을 창립하자 발기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6년 8월 3일 '어떤 중대한 사건' 관련 혐의로 경기도경찰부에 체포돼 1달간 구금되었으나, 9월 2일 석방되었다.

1927년 6월 동아일보사 김제지국의 공덕면 주재기자에 임명되었고, 1927년 7월 3일 김제군 김제면 교동리(現 김제시 교동) 김제향교 만화루(萬化樓)에서 개최된 신간회 김제지회 설립대회에서 부의장으로서 강령 설명 및 규칙 통과, 축문(祝文) 낭독, 임원 선거 등을 진행했다. 이후 신간회 김제지회의 정치문화부 책임자 및 김제지회 부회장, 김제지회 대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1927년 11월 27일에는 김제청년동맹의 검사위원에 선임되었고, 1928년 1월에는 동아일보사 기자 일을 그만두었다.

한편, 이 사이 1927년 8월 말에 김제노동조합장이자 신간회 김제지회 상무간사였던 전기환(全崎煥)에게서 권총과 실탄의 보관을 의뢰받아 이를 이듬해인 1928년 3월까지 김제군 공덕면 마현리 자신의 자택 항아리 속에 숨겨 두었다. 이때 숨겨 두었던 권총과 실탄은 통의부(統義府) 소속의 조인현(趙仁賢)이 전라남도 목포부(現 목포시), 전라북도 김제군·익산군 등지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제 관공서의 습격을 목적으로 확보해둔 것들이었는데, 이 때문에 1928년 6월 2일부터 3일 사이에 조인현·전기환·소혁규(蘇赫奎)·송시용(宋始鏞)·김종철(金宗喆)·오오득(吳五得)·박영관(朴永寬)·오석완(吳碩完)·정기환(鄭基煥)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이른 바 '전북 통의부 사건' 또는 '전북 폭탄 사건'에 연루돼 이리경찰서에 검거된 뒤 전라북도경찰부를 거쳐 1928년 6월 12일 전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29년 12월 9일 전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전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3월 12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총포화약류 시행규칙 위반, 공갈 등의 혐의로 징역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그해 4월 15일 전기환·오석완과 함께 형 집행 만기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 1930년 11월 30일 동아일보사 김제지국장에 임명되었고, 1932년 1월 동아일보사 김제지국을 대표하여 김제기자단 조직에 참여하였다. 1931년 10월부터 11월 사이에 김제군 지역 정미소 인부들이 임금인상 문제로 동맹파업을 일으키자, 김제합동노동조합 중요 간부 김혁진(金革進)·오오득 등 16명과 함께 동맹파업의 배후 선동자로 지목되어 검거 후 재차 전라북도경찰부에 송치되었으나, 11월 16일 김기술(金基述)과 함께 석방되었다.

이후 1934년 4월 9일 동아일보사 김제지국장직을 사직했고, 1934년 6월 중앙고등보통학교 설립자 김기중(金祺中)의 기념동상건설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월일, 사망지는 자료가 미비해 알 수 없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죽서공파(竹西公派) 22세 식(植) 항렬.[2] 이진하(李鎭夏)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