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 | 조인원(趙寅元) |
자 / 효 | 백효(伯孝) / 야운(冶雲) |
본관 | 한양 조씨[1] |
출생 | 1875년 4월 19일 |
충청도 덕산군 내야면 (현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2] | |
사망 | 1950년 4월 17일[3] (향년 74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조인원은 1875년 4월 19일 충청도 덕산군 내야면(현 충청남도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에서 아버지 조종호(趙鍾灝)와 어머니 평산 신씨 신화(申禾)[4]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의 부친 조종호는 1907년부터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덕산지소장(德山支所長)으로 활약하였는데, 조인원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국권회복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9년 5월,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견원인 이영식(李英植)과 연결되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충청남도 지단(支團)을 조직하고 지단장에 서병익(徐丙益), 부단장 김석주(金錫周)이 취임하는 한편, 그는 서무부장으로서 각종 독립운동 관계 문건의 배포에 주력하였다.
1920년 음력 12월 20일에 '한국인은 납세하지 말라'는 내용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정서(軍政署) 명의로 된 선전문을 삽교면 역촌리(현 삽교읍 역리) 도로 옆 게시판에 부착했다가 체포되었다.
'독립정부를 여러 나라들이 승인해도 그 정치적 명령을 국내에서 떨치지 못하는 것은 섬나라 오랑캐의 탐욕과 포악함이 그치지 않기 때문이니 조선인은 세금을 납부하지 말라. 만약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나중에 독립군이 조선 내로 들어올 때는 후회할 것이다.'
1920년 음력 12월 20일, 조인원이 예산군 삽교면 역촌리 도로 옆 게시판에 부착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정서' 명의의 선전문 내용.#
1920년 음력 12월 20일, 조인원이 예산군 삽교면 역촌리 도로 옆 게시판에 부착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정서' 명의의 선전문 내용.#
그는 결국 1921년 9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30일 본형에 산입)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0년 4월 17일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