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존 올드캐슬 John Oldcastle | |
생몰년도 | 미상 ~ 1417년 12월 14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셔 앨멜리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런던 필즈의 세인트 자일스 교회 | |
아버지 | 리처드 올드캐슬 | |
어머니 | 이사벨라 | |
아내 | 조앤 드 라 폴 | |
직위 | 코밤 남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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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롤라드파의 지도자로, 헨리 5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뒤 수년간 숨어 지내다가 발각된 후 교수형에 처해진 뒤 교수대와 함께 불태워졌다.2. 생애
부모는 헤리퍼드셔 엘멜리의 지주인 리처드 올드캐슬과 이사벨라였다. 조부 존 올드캐슬은 리처드 2세 치세 후반기에 헤리퍼드셔의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400년 문서에서 스코틀랜드 군사 원정에 참여한 기사로 처음 언급되었으며, 1404년 의회에서 헤리퍼드 카운티의 기사로 참석했고, 나중에 평화의 판사로 재직했고, 1406 ~ 1407년 헤리퍼드셔의 고위 보안관을 역임했다. 또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의 장남으로 오와인 글린두르 반란 진압을 진두지휘하던 몬머스의 헨리 왕자와 긴밀한 우정을 맺었고, 그와 함께 10년간 노스 웨일스에서 군사 활동을 벌였다. 1411년 헨리가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간의 내전에 개입하기 위해 파견한 원정대의 지휘관을 맡기도 했다. 1408년, 코밤의 상속녀인 조앤 드 라 폴과 결혼했고, 이를 토대로 켄트, 노퍽, 노샘프턴셔, 윌트셔, 쿨링 성 등 여러 곳의 저택과 영지를 확보했으며, 1409년부터 1413년까지 코밤 남작으로서 의회에 소환되었다.이 무렵, 이단으로 단죄된 뒤 당국의 탄압을 피해 비밀 결사 형태로 포교 활동을 벌이고 있던 롤라드파는 헤리퍼드셔에서 기승을 떨쳤다. 그는 이들의 교리에 점차 관심을 가지다가 1410년 이전에 롤라드파로 개종했다. 그는 웨일스 보안관을 맡으면서 롤라드파 설교자들을 숨겨줬으며, 여러 기사들과 함께 헨리 4세에게 교회가 낭비하고 있는 돈을 왕이 가져가서 잉글랜드의 무기고, 구호소, 대학에 투입해달라고 호소했다. 1413년 3월에 열린 의회에서, 그는 이단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몬머스의 헨리 왕자가 자신의 전우인 그를 확고히 믿었기 때문에, 소환령은 조기에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던 1413년 9월, 런던의 패터노스터 로우에 있는 상점에서 발견된 올드캐슬의 책 중에서 롤라드파의 교리를 옹호하는 내용이 발견되었다. 잉글랜드 국왕으로 막 즉위한 헨리 5세는 그때서야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애런들이 올드캐슬에게 리즈 성에 와서 신앙을 검증하라고 통보하는 걸 허락했다. 하지만 올드캐슬은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본거지인 쿨링 성으로 숨었다. 애런들은 즉시 올드캐슬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9월 23일까지 런던에 출두하지 않으면 반역자로 간주하여 토벌하겠다는 헨리 5세의 뜻을 전했다. 9월 23일에 출두한 올드캐슬은 런던 탑에 갇힌 뒤 이단자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헨리 5세는 지난날 웨일스에서 오와인 글린두르 반란 진압에 동참했던 올드캐슬에게 40일 동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1413년 10월 19일, 올드캐슬은 윌리엄 파크마이너가 이끄는 런던 롤라드파의 도움으로 런던 탑에서 탈출한 뒤 스미스필드에 있는 파크마이너의 집에 숨어서 상황을 살폈다. 그는 부유한 롤라드파 인사들로부터 자금을 제공받고 이를 통해 장비를 수집하고 용병을 고용했다. 토지를 소유한 미망인인 크리스티나 모어는 롤라드 목사인 윌리엄 블레이크와 그녀의 하인이 반란에 가담하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이후 벨튼, 더비셔, 에식스, 레스터셔, 브리스톨 등지에서 롤라드파 봉기가 잇따라 발발했고, 올드캐슬은 스미스필드에 기사 3명, 종자 15명 등 총 222명의 반군을 집결한 뒤 장차 왕궁을 급습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사전에 헨리 5세의 스파이 역할을 한 여관 주인 존 바튼과 토머스 버튼이 올드캐슬의 은신처와 계획을 폭로하면서 모든 게 들통났다. 헨리 5세는 1414년 1월 9일 또는 10일 밤에 클레켄웰의 세인트 존 수도원에 군대를 집결한 뒤 올드캐슬이 이끄는 반란군을 급습해 격파했다. 1월 10일, 전투 후 생포된 롤라드파 80명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재판이 열렸다. 토머스 애런들은 이 재판에 출석해 이단자들을 단호히 근절해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고, 그 결과 전원이 화형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후 올드캐슬은 해리퍼드셔 북서쪽의 가장 깊숙한 계곡에 몸을 숨기고 거의 4년간 체포를 피했고, 왕실이 몰수한 그의 재산 일부를 임대한 오랜 친구 존 해리의 지원으로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1417년 11월 은신처가 마침내 발각되었고, 그는 제5대 셜튼 남작인 에드워드 셜튼에게 체포되었다. 잡히기 전에 심한 부상을 입은 올드캐슬은 쓰레기를 가득 실은 말 등을 타고 런던으로 이송되어 의회에 소환되었다. 의회 의장을 맡은 랭커스터의 존은 올드캐슬에게 롤라드 신앙을 포기하고 가톨릭을 받아들이겠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올드캐슬이 끝까지 거부하자, 의회는 유죄 판결을 내렸다. 12월 14일, 올드캐슬은 런던 필즈의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뒤 교수대와 함께 불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