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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7 23:50:07

종묘 묘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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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宗廟) 묘현례(廟見禮)

1. 개요2. 순서3. 고증4. 등장인물5. 여담

1. 개요

종묘 묘현례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재재단이 주관하는 궁중문화축전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종묘에 특화된 왕실 의례 재현 행사 중 하나다. 2012년 10월 6일과 20일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보호재단[1], 문화체육관광부[2]에 의해 처음 재현되었으며, 원래 묘현례(廟見禮)는 왕비(王妃)나 세자빈(世子嬪)과 같은 신부가 혼례를 마친 후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진 종묘, 또는 집에 있는 사당에 찾아가 조상들을 알현(謁見)[3]하여 혼례를 치렀음을 고하는 것으로, 조선 왕실의 경우 종묘에서 행해진 국가의례 중 유일하게 왕실 여성이 참여했던 의식을 말한다. 그 중 종묘 묘현례는 왕실의 묘현례를 재현함과 더불어 관람객의 흥미와 재미를 위하여 시민 체험[4] 연극으로 재구성한 행사라고 볼 수 있다.

2. 순서

묘현례 재현 행사의 절차는 여섯가지 절차[5]로 나뉜다. 정리 하면 아래와 같다.
식순 설명 비고
국왕, 왕세자 봉심 준비 국왕과 왕세자, 문무백관이 국궁사배[6]를 하여 선대왕에게 인사를 올림 파일:묘현례식순(1).jpg
국왕, 왕세자 신실 봉심 국왕과 왕세자가 선대왕들의 신주가 모셔진 신실을 차례로 살핌 파일:묘현례식순(2).jpg
국왕, 왕세자 소차 이동 문무백관이 퇴장[7]한 후, 국왕과 왕세자가 소차[8]로 이동 파일:묘현례식순(3).jpg
왕비, 왕세자빈 알묘 왕비와 세자빈이 선대왕들에게 공식적으로 인사를 올림[9] 파일:묘현례식순(4).jpg
왕비, 왕세자빈 퇴장 인사를 마친 왕비와 왕세자빈을 포함한 모든 여관(女官)이 동문으로 퇴장한다. 파일:묘현례식순(5).jpg
행사 종료 및 기념 사진 촬영 행사 종료 후 기념 사진 촬영 파일:묘현례식순(6).jpg

3. 고증

시기
시기는 묘현례를 최초로 시행하였던 숙종 시기(1696년[10],1703년[11])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복식
고증 시기를 17세기 말~18세기 초기인 숙종 때로 가정하였으므로, 복식은 17세기 말~18세기 초 왕실 복식을 재현하였다. 이 시기 왕과 왕세자가 입었던 면복(冕服)과 왕비와 왕세자빈이 입었던 적의(翟衣), 여관인 상궁들이 입은 원삼(圓衫)과 의장차비의 당의(唐衣), 치마, 웃치마, 가리마 등을 새로이 제작하였고, 문무백관의 조복(朝服)은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보유한 물품을 사용하였으며, 흑단령(黑團領)과 호위 군사들이 착용한 철릭, 직령 등의 복식은 한국문화재재단이 보유한 복식들을 활용하였다.

왕과 왕세자가 착용한 면복은 숙종 시기에 그려진 면복본 초상화가 현전하지 않기 때문에 효명세자의 면복본 초상화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중인 2점의 면복 유물을 바탕으로 하였는데, 면복의 구성품 중 하나인 방심곡령(方心曲領)의 경우 초창기에는 착용하였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제거하였다.[12] 왕비와 왕세자빈이 입은 적의는 『인조·장렬후가례도감의궤』에 나타난 적의 제도를 근본으로 하되, 『국조속오례의보서례』와 『상방정례』과 같은 기록물, 그리고 실제 영친왕비, 순정효황후가 입었던 9, 12등 적의, 그리고 중국에서 출토된 16세기 초 명나라 영정왕 부인의 대삼(大衫)과 같은 실제 유물 등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여관들의 원삼, 당의, 웃치마, 가리마 등의 복식도 18세기 초의 인물인 안동 권씨의 묘에서 출토된 당의, 그리고 비슷한 시기의 인물인 재상 이단하의 부인이 입었다는 원삼 유물 등을 바탕으로 하였는데, 모두 전문가의 자문과 고증을 통해 재현하였다. 위 복식 재현의 기초가 된 자료는 한국문화재재단이 2004년 발간한 『조선조 숙종·인현후 가례의 연구』에서 당시 단국대학교 교수였던 박성실 교수와 안동대학교 교수였던 이은주 교수가 고증한 복식 고증 자문 결과물의 내용에서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의 모습으로 재현된 것 같다.
의장
당시 묘현례는 1696년과 1703년 숙종이 머물고 있던 창덕궁에서 출발하여 종묘까지 행차했으므로 왕과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의 격식에 맞는 의장들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시대 종묘의 정전이나 영녕전은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으므로 노부의장이나 시위군사들이 종묘 정전 내부로 들어가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종묘 내부까지의 행차가 한계였을 것이다. 2012년도에 재현되었을 당시에는 노부의장은 생략하고, 시위군사[13]와 담여군[14]이 여(輿)[15]를 호위하면서 종묘 입구에서 정전까지 이동하는 모습을 재현하였으며, 약식으로 구성된 왕비와 왕세자빈의 행차에 동원되는 의장 차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왕비나 왕세자빈의 의장으로는 봉선(鳳扇)과 작선(雀扇)의 약식 의장들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종묘 내 출연자들의 행차가 사라지면서 의장이나 의장수도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 있다.
절차
의식 절차에 관하여는 『숙종실록』의 기록[16]과 1920년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종묘 묘현례 홀기 기록을 근거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숙종실록』에 기록된 의절(儀節)[17]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전하의 입위(立位)는 묘호(廟戶) 밖의 동에서 서향하고, 왕세자의 입위는 전하의 입위의 서남에서 북향하고, 중궁전의 배위(拜位)는 묘호 밖의 서에서 동향하고, 빈궁의 배위는 중궁전 배위의 동남에서 북향한다.
- 전하와 왕세자는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출궁(出宮)하고 환궁(還宮)할 때 고취(鼓吹)는 모두 벌이되 연주하지 않는다.
- 전하와 왕세자는 면복(冕服)으로 고쳐 입고 묘정(廟庭)에 들어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한다. 중궁전과 왕세자빈은 수식(首飾)을 하고 적의(翟衣)를 입는다.
- 상궁(尙宮)이 앞에서 인도하여 서계(西階)로부터 올라가 입위에 이르고, 상궁이 전하와 왕세자를 인도하여 조계(阼階)[18]로부터 올라가 입위에 이른다. 중궁전과 왕세자빈이 사배례를 행하면, 상궁이 전하와 왕세자를 인도하여 소차(小次)에 들어간다.
- 상궁이 중궁전과 왕세자빈을 인도하여 재전(齋殿)으로 돌아가고, 좌통례(左通禮)·우통례(右通禮)가 전하를 인도하여 재전으로 돌아간다.
- 전하와 왕세자가 익선관·곤룡포로 갈아 입고 환궁한다.

그리고 1920년의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묘현례 홀기 기록의 식순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왕세자비가 수규(守閨)의 인도를 받아 배위(拜位)에 나아가 북향(北向)으로 서면, 왕세자는 수칙(守則)의 인도를 받아 자리에 나아가 북향으로 선다.
- 왕 전하(순종, 1874~1926)는 상궁(尙宮)의 인도를 받아 자리에 나아가 서향으로 선다.
- 전찬(典贊)[19]이 “국궁사배흥평신(鞠躬四拜興平身)”이라 창(唱)하면 왕세자비가 이를 행한다.
- 이것이 끝나면 왕전하는 상궁의 인도를 받아 퇴출(退出)하며, 왕세자와 왕세자비는 각각 수칙과 수규의 인도를 받아 퇴출한다.

4. 등장인물

종묘 묘현례 재현 행사에 참여하는 인물들을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20]
파일:숙종(김승현배우).jpg
국왕(肅宗:숙종)
조선의 19대 임금
(생몰년 : 1661~1720, 재위 기간 : 1674~1720)
복식 : 구장복(九章服)[21] 일습(一襲) [22]
파일:인현왕후(시민배우).jpg
왕비(仁顯王后:인현왕후 민씨)[23]
숙종의 첫번째 계비(繼妃)[24]
(생몰년 : 1667~1701, 재위 기간 : 1681~1689, 1694~1701)
복식 : 대홍색 적의(翟衣) 일습
왕비(仁顯王后:인원왕후 김씨)[25]
숙종의 두번째 계비
(생몰년 : 1687~1757, 재위 기간 : 1702~1757)
복식 : 대홍색 적의 일습
파일:경종(시민배우).jpg
왕세자(景宗:경종)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서 얻은 아들, 조선의 20대 임금인 경종.
(생몰년 : 1688~1724, 재위 기간 : 1720~1724)
복식 : 칠장복(七章服)[26] 일습
파일:단의왕후(시민배우).jpg
왕세자빈(端懿王后:단의왕후 심씨)
경종과 가례를 한 왕세자빈으로 훗날의 단의왕후[27].
(생몰년 : 1686~1718)
복식 : 아청색[28] 적의 일습
집례(執禮)
제향(祭享) 등의 의식에서 선임(選任)하는 임시 벼슬로, 홀기(笏記)[29]를 읽어 절차를 집행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오늘 날의 사회자와 역할이 비슷하다.
복식 : 제복(祭服)[30] 일습
종묘 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
상설 관서나 임시 기구를 포함하여 국가적으로 중요한 관서의 책임자를 말한다. 도제조는 1품관, 제조는 2품관이 겸임하며, 신실 봉심 때 왕과 왕세자를 수행한다.
복식 : 조복(朝服) 일습
예의사(禮儀使)
각종 제사(祭祀)의 의례 절차를 맡은 임시 관직. 주로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겸임하는데, 예조 판서 유고시(有故時)에는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대행(代行)하였다. 본 행사에서는 왕을 보좌한다.
복식 : 조복(朝服) 일습
상례(相禮)
상례는 같은 통례원 소속으로, 각종 국가 의례 시 왕세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본 행사에서는 왕세자를 보좌한다.
복식 : 조복(朝服) 일습
종친(宗親)·문무백관(文武百官)
종친은 임금의 친족을 말하며, 문무백관은 문,무 관리들의 총칭이다.
복식 : 조복(朝服)[31]·흑단령(黑團領) [32] 일습
내관(內官)
조선시대 내시부에 속한 환관들로, 왕과 왕세자의 뒤를 쫓아 신실 봉심 등의 상황에서 보필한다.
복식 : 무양흑단령(無揚黑團領) [33] 일습
상궁(尙宮)
조선시대 내명부의 궁관계층에 속하는 정5품의 여관으로, 왕비와 왕세자빈을 보필하며 본 행사에서는 상궁, 수규, 수칙이 등장한다.
복식 : 녹원삼(綠圓衫), 흑원삼(黑圓衫) 일습
의장 차비(儀仗差備)
조선시대 왕실 여성의 위엄을 드높이기 위하여 각종 의장물을 들고 행사장 주변에 배치되는 인물들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도맡았다.
복식 : 가리마·녹당의(綠唐衣)·흑색치마·홍색 웃치마·혜
의장 : 봉선, 작선
시위군(侍衛軍)
왕실 인물들의 호위를 맡은 군사들
복식 : 직령·철릭·립·건·광다회·화 등
무기 : 환도·월도·창·등채 등
태조(太祖)·세종(世宗)[34]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임금이며, 세종은 조선을 발전시킨 명군주로서, 관람객들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행사 내용을 해설 해주는 역할로 등장한다.
복식 : 상투관·중단(中單)[35]·화 등

등의 배역이 출연하였으며, 재현 행사 시기에 따라 출연자들이 줄어들거나 늘어나는 등 배역의 변화가 있었다.

5. 여담

- 묘현례는 숙종 이전에도 시행에 대하여 여러 차례 논의[36]가 있었으나, 반대에 부딪혀 시행하지 못 하였던 전적이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차례의 논의 끝에 시행할 수 있었다. 이때를 전례로 삼아 이후 국왕인 경종·영조·순조 등의 시기에 묘현례가 거행되었다.

- 복식의 경우 왕실 여성의 적의 국속화 과정 중 첫번째 단계의 적의 차림을 재현하여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조선 왕실의 적의 차림은 17세기 인조대에 1차례 개정되었는데, 머리에 쓰던 칠적관 대신에 대수머리로 변화하였다는 점과, 적의 앞,뒷판에 원적문(圓翟紋)을 달기 시작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이 시기 원적문은 36개로 어깨에서 수구(袖口) 방향으로 가는 것과 옷 뒷판에 달아두었는데, 영조 시기에 이르러 원적문은 51개로 15개가 늘어났다. 대체로 조선 시대 왕실 여성의 대홍색 적의는 영조 대 이후의 것이 많이 재현되었는데, 영조 이전 시기의 적의를 재현한 사례가 드물기 때문에 더더욱 희귀한 편이다. 이는 숙종·인현후 가례 재현 행사 때 선보였던 적의 재현품을 다시 제작하여 선보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 의례는 엄숙하고 장엄한 느낌이며, 종묘 정전의 특성상 판 아래에서 관람해야 하기 때문에 관람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나, 일반 시민들이 직접 왕실의 대례복인 면복과 적의를 직접 입어보고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기가 높은 편이다. 다만 조금 현실성을 높이기 위하여 국왕과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을 공모할 때 나이나 키 제한이 있다는 점[37]에서 아쉽다는 평이 많다.

- 국왕인 숙종 역할을 배우 김승현(배우)이 몇 차례 맡은 적이 있다.

- 2023년 종묘 묘현례 행사에서는 배우 김승욱(배우)가 국왕인 숙종 역할을 맡았다.

- 왕실 의례 재현 행사의 특성상 행사장이 크기 때문에 동선이 길고,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관람객들이 이해하기 힘들고 지루하다는 평이 나올 수 있으므로 어느 시점부터는 보다 이해하기 쉽게 중단(中單) 차림을 한 태조 이성계와 세종 역의 배우와 남매로 나오는 아역 배우 두 사람까지 해서 총 세 사람이 행사 도중에 해설자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2020년 행사는 시행되지 못 하였으며, 2021년 행사는 체험 키트와 왕세자, 왕세자빈의 복식을 착장하는 모습, 그리고 360도가 돌아가는 화면으로 촬영한 영상을 공개하여 행사를 대신하였고, 2020년 종묘 정전 보수 공사가 시행되면서 정전에서 행사가 불가능해진만큼 2022년과 2023년에는 영녕전에서 극단의 연극 배우들이 각종 배역을 맡아 의례 재현이 아닌 연극화하여 공연하는 것으로 내용이 변경되었다.

- 초창기에는 독립적으로 행해지는 왕실 의례 재현 행사 중 하나였으나, 2014년 9월 궁중문화축전이 시작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궁중문화축전의 종묘 특화 프로그램 중 하나로 편성되었다. 행사 시기는 매년 궁중문화축전이 시행되는 시기인 5월 또는 9~10월 즈음으로 편성되는 편이다.

[1] 現 한국문화재재단[2] 문화체육관광부는 후원을 맡았다.[3]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을 아래 사람이 찾아뵙는 일[4] 숙종,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 역을 시민 공모를 통하여 체험할 수 있었다.[5] 2019년 묘현례 행사 리플렛을 기준으로 함.[6] 몸을 굽혀 네번 절을 하는 것[7] 당시 신하는 왕비와 왕세자빈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므로 왕비와 세자빈이 입장하기 전 모두 퇴장한다.[8] 행사 중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잠시 쉴 수 있는 임시 천막을 말한다.[9] 국궁사배만 행하고 신실 봉심은 행하지 않는다.[10] 종묘 정전의 내부 공사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숙종 22년을 재현 시기로 하였다.[11] 2020년부터 종묘 정전의 보수 공사가 진행되면서 2022년 행사부터는 영녕전에서 재현함에 따라 재현 시기 역시 약간 미뤄졌다.[12] 이는 20세기에 거행된 영친왕과 영친왕비의 종묘 묘현례 당시 사진을 근거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13] 호위군사[14] 여를 짊어지는 가마꾼[15] 왕실의 어른들이 타는 가림막이 없는 가마[16] 『숙종실록』 30권, 숙종 22년 10월 16일 기해 1번째기사[17] 큰 행사를 치르는 공식적인 의례와 절차.[18] 동쪽 계단[19] 조선시대 내명부의 정8품 궁관직.[20] 행사의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21] 조선시대 왕의 면복으로 겉옷인 현의(玄衣)와 상(裳), 폐슬(蔽膝)에 9가지 장문(章紋)이 수놓거나 그려져 있다.[22] 옷, 그릇, 기구 따위의 한 벌. 또는 그 전부를 말한다.[23] 재현 시기를 1696년을 기준으로 한 행사일 경우[24] 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를 말한다.[25] 재현 시기를 1703년을 기준으로 한 행사일 경우[26] 조선시대 왕세자의 면복으로 구장복과 차림새와 형태는 거의 동일하나, 면류관의 구성과 허리띠, 그리고 장문(章紋) 중 용(龍)과 산(山)의 문양이 탈락되어 있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27] 1718년에 죽었으므로, 후에 추봉되었다[28] 짙고 어두운 청색을 말하며, 아청색은 조선시대 세자와 세자빈의 복색으로 사용되었다.[29] 홀기는 제례 등 의식에서 그 진행 순서를 적어 낭독하게 하는 의례 문서[30] 조복과 구성이 거의 동일하나 방심곡령을 착용하고, 신발은 제혜를 착용하며, 관모와 복색이 다르다.[31] 4품 이상이 착용한다.[32] 5품 이하가 착용한다.[33] 흉배 없는 단령 차림을 말한다.[34] 시기에 따라 태조가 또는 세종 1사람씩 나왔으며, 행사 초창기에는 나오지 않았다.[35] 대례복 차림 시 속에 받쳐 입는 옷을 말한다.[36] 중종 때 논의가 있었다.[37] 참고로 왕세자와 왕세자빈은 10대가 주로 선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