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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14:00:47

증도가자


證道歌字

1. 소개2. 배경3. 논란4. 조작 논란5. 진행상황6. 금속활자 인쇄본 발견7. 중국의 대응

1. 소개



2010년 9월에 경북대학교 문헌정보학과남권희 교수가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1377년)보다 138년, 구텐베르크금속활자(1455년)에 비해서는 무려 216년 이상 앞서는 '증도가자(證道歌字)’로 추정된다고 언론에 발표하면서 세상에 모습이 드러났다.[1]

증도가자는 증도가證道歌 + 자字이며, 불교시편인 증도가(證道歌)를 새겼던 금속 활자체를 말한다. 증도가자로 고려시대에 인쇄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유물도 따로 존재하며, 이 문서는 심사를 거쳐 대한민국의 보물 7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도가자 혹은 고려활자로 추정되는 금속활자는 현재 다보성고미술에서 101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점,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7점을 소장하고 있다. 개성 만월대에서 출토되어 북한이 소장중인 고려활자 6점은 필체상 증도가자는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배경

증도가에는 금속활자인 증도가字를 이용하여 1차 인쇄를 한 주각본과, 이 주각본을 목판위에 붙여놓고 다시 새겨 만든 번각본이 있다. 현재까지 전해져서 보물로 지정된 것은 번각본이고, 주각본은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주각본을 찍었을 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증도가자와 목판에 옮겨 다시 찍은 번각본이 100% 일치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다보니 증도가자를 검증할 완전한 방법이 사실상 없어 논란이 계속될수 밖에 없다.

증도가에 최이가 남긴 발문을 보면 인쇄당시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어시모공 중조주자본 (於是募工 重彫鑄字本)"[2], 즉, "이 책의 전래가 끊겨 유통되지 않아 1239년 9월에 각공을 모아 금속활자본을 목판으로 다시 새겼다"라고 나와 있다. 당시 11명의 기술자들이 작업을 했다. 즉, 동일한 금속활자 인쇄본을 놓고 목판에 새기는 작업을 하더라도 작업자에 따라 글자의 모양이나 필체가 조금씩 달라질 여지가 있다. 또한 목판이 완전히 건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차후에 건조되면서 자연스럽게 수축되는 현상도 생긴다. 즉, 목판으로 인쇄된 번각본은 금속활자로 인쇄된 주각본보다 글자 및 각 장의 크기가 작은 것이 보편적이며, 10%까지도 차이가 날수 있다.

증도가자들의 출토와 소장 경로가 불명확한 것이 논란의 씨앗이 되고 있다. 청주고인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7점은 남권희가 이끄는 경북대 산학협력단이 2010년 연구용역 과정에서 8,600만원에 매입한 뒤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전달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점은 고려시대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이야기가 도는 것을 박물관측이 고미술상에게 직접 구입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다보성고미술이 소장하고 있는 101점은 일제강점기 개성에서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대구 고미술상이 사들여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 1239년 9월에 인쇄된 증도가는 분명 존재했었고, 그 증도가를 인쇄하는데 사용된 증도가자도 논란의 여지 없이 분명 존재했었다. 현재 이슈가 되는 것은 현재 남아있는 증도가가 그 당시 인쇄된 것인지 여부와, 현재 소장중인 증도가자가 그 당시 사용되었던 진품 증도가자인지 여부이다.

3. 논란

2010년 9월 2일, KBS 역사스페셜에서 증도가자 논란을 보도했다.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을 통해 활자에 묻어있는 먹을 만든 나무가 베어진 연대를 측정했다. 한국지질연구원에서 검사한 결과, 슬플'비'자에 묻어있는 먹은 95.4%의 확률로 1160년 ~ 1280년으로 나왔다. 부처'불'자에 묻어있는 먹은 1010년 ~ 1210년으로 나왔다. 추가 검증도 했는데, 넓을'광'자와 돌아볼'권'자에 묻어있는 먹을 일본 팔레오라보 연구소에 의뢰해 검사한 결과, 광자는 95.4%의 확률로 1065년 ~ 1155년, 권자는 969년 ~ 1025년으로 나왔다. 물론 이것이 활자가 제조된 연대를 직접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먹을 만든 나무가 베어진 연대를 뜻한다. 누군가 고려시대 먹을 활자에 칠해놨을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시대 먹은 아주 귀해서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국립청주박물관에 1점만 보관되어 있다.

2011년 11월, 증도가자로 추정되는 고려활자 101점을 보유하고 있는 다보성고미술측에서 국가지정문화재 신청을 했다. 심사를 맡은 문화재위원회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고, 문화재청은 학계에 연구용역 공고를 냈으나 맡겠다고 나서는 학자들이 없자 부득이하게 신청자와 연관이 있는 남권희 교수를 주축으로 한 경북대 산학협력단에 의뢰했다.[3]

2012년, 문화재청은 공인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증도가 1점을 보물 제758-2호로 추가 지정했다. 기존에는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중인 1점이 보물 758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문화재청은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이 먼저 인쇄되었고 공인박물관 소장본은 시대적으로 뒤에 인쇄된 것으로 봤다. 삼성출판박물관본이 인쇄상태가 깔끔하고 선명했던 반면, 공인박물관본은 인쇄상태가 깔끔하지 못하고 탈자 및 가필 흔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의 판단착오로 공인박물관 소장본이 시대적으로 뒤에 인쇄된 것으로 간주됨에 따라, 증도가자 연구에서는 번각본인 삼성출판박물관본을 대조군으로 사용하는 문제점을 낳게 된다. 이후 언급되겠지만 사실은 공인박물관본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주각본이었기 때문에 공인박물관본을 대조군으로 사용했어야 옳았다.

2014년, 경북대 산학협력단에서 377쪽의 기초학술조사 연구용역 보고서를 냈다. 다보성고미술 소장 101점, 국립중앙박물관 1점, 청주고인쇄박물관 7점을 조사한 후, 62개 (다보성고미술 59점, 청주고인쇄박물관 3점)를 증도가자로 분류하고, 47개는 일반 고려활자로 분류했다. 19개의 활자에서 먹을 채취해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을 한 결과, 17개의 활자에 묻은 먹에서 12세기 이전에 잘린 나무로 만든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4]. 주목할 점은, 청주고인쇄박물관의 7점중 3점을 증도가자로 분류한 것과 국립중앙박물관의 1점을 증도가자가 아닌 일반 고려활자로 분류한 것이다.

2015년 2월 8일 SBS 8시뉴스에서 ‘직지보다 앞선 증도가자 세계 최고 금속활자’라는 기사를 단독 보도했다. SBS는 이 기사에서 ‘증도가자가 진품일 경우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보다 최소 138년 이상 앞서게 된다’면서 ‘그간 학계에서 진위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는데, 국립문화재 연구소가 최근 고려 시대 진품이 맞다는 조사 보고서를 내놨다’고 보도했다.

2015년 3월 17일 조선일보에서 1면 사이드 기사로 '증도가'가 목판이 아닌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는 내용의 주장을 실었다 [5]. 2면 절반을 할애한 기사에서 여러가지 증거를 대며 종전 기록을 100년 이상 앞당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반박하는 기사도 나왔다.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는 증도가가 목판본으로 인쇄한 것이 확실하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조선일보 기사를 반박했다.

증도가자 논란은 직지심체요절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흥덕사가 있는 충북 청주시가 적극적으로 증도가자는 가짜이며 직지야말로 최고(古)라는 공격을 펼치고, 경북대 및 증도가자 소유자 측은 증도가자가 현존 최고(古)의 활자가 맞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본격화되었다.

문화재위원회에서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문화재 연구소의 발표에서 증도가자가 진품일 확률이 높다[6]라는 발표가 나오면서 직지를 밀고 있는 청주시를 중심으로 한 학계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하지만 확실한 결론은 내리지 않고 표류[7]되었는데, 이걸 인정할 경우의 후폭풍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4. 조작 논란

2015년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주관 42회 추계 국제학술대회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강태이 연구사는 '금속활자의 법과학적 분석 방법 고찰'을 통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점과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 7점의 활자를 조사한 결과 청주고인쇄박물관측이 소장중인 활자에서 위조 흔적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8] 3D CT 촬영 결과 인위적인 조작의 흔적이 드러났으며, 성분 분석 결과와 함께 종합해 볼 때 고려시대 전통적 방식의 주물 기법에 의해 제작된 활자가 아니고, 위조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강태이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학계의 교차검증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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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이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한 증거는 청주고인쇄박물관에서 소장중인 7개의 활자에서 얻은 결과이다.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 '증도가자'가 파문을 일으킨 것은 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활자와 문화재 지정 신청자인 다보성고미술 측이 소장하고 있는 활자가 모두 '증도가자'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9].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점에서는 위조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강태이의 분석결과 발표에 대해 문화재청은 해명자료에서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 금속활자 7점에 대한 조사 결과를 (문화재) 지정 신청된 (다보성 소장) 모든 금속활자로 확대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라고 밝혔다. 당시 문화재청에서 문화재 지정을 위한 조사를 벌이고 있던 다보성고미술 소장 101점의 '증도가자'는 탄소연대측정으로 진위가 일부 확인된 상태였다.

남권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복'자도 증도가자"라고 거듭 확인했다[1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복"자도 조작이라는 강태이의 분석결과에 대해 남권희는 금속활자의 주조방법, 문화재 보존과학적, 서지학적 정보 부족으로 인한 비전문가의 잘못된 해석과 판단이라고 반박했다 [11].

이에 대한 재반박도 나왔다 [12]. 충북대 기계공학부 조정호 교수는 '금속은 산소가 있어야 부식이 진행된다. 그러나 금속활자 같이 작은 것에 기공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금속 이론상 청동주물만 유독 내부에서 부식이 진행된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CT상 이중 단면이 나타나려면 처음부터 성분이 다른 주물을 부어야 한다. 그러나 금속활자 같이 작은 것에 주물을 두번 부을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두개 층을 탄소연대 측정을 하면 후자 주물의 생성 시기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몇가지 모순이 있는데, 부식은 이온화 부식이나 화학적 부식등 산소가 없이도 발생할 수 있다. 또한,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은 금속에는 사용할수 없는 방법이다. 더불어, 금속활자가 작다는 것을 두번 강조했는데, 이것은 위조품 제조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으로 1cm 남짓의 활자에 주물을 2번 붓는 것은 기술적으로도 어렵고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학예연구관이 한국서지학회 2015년 가을공동학술대회 토론에서, 경북대 산학협력단의 용역보고서에 다보성고미술측에서 소장하고 있던 '法(법)'자의 표면을 긁어 금속 성분을 분석하는 파괴분석를 한 결과 테크네튬이 검출된 기록이 나와있는 점을 지적했다 [13] 800년 전에 테크네튬이라니 오파츠?. 이 글자의 성분은 산소(O) 1.74%, 규소(Si) 0.49%, 구리(Cu) 88.5%, 테크네튬(Tc) 2.62%, 주석(Sn) 6.66% 이었는데, 다른 활자 대부분에 들어가는 납(Pb)이 빠져있는 점이 특이했다. 그러나, 설사 위조품이라고 해도 테크네튬이 들어갈 이유가 없다. 실험용 원자로에서나 만들어지는 방사성동위원소이기 때문에 위조품 제조자들조차 실수로라도 사용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석 과정에서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검사결과를 신뢰할수 없으므로 재검증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5. 진행상황

2016년 1월 25일, 기존에 보물로 지정된 남명천화상송증도가 2점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1점, 공인박물관 소장 1점) 모두 '고려시대가 아닌 조선시대 때 인쇄된 책'이라고 문화재청에서 주장하고 나섰다. 또 다른 증도가 인쇄본을 소장하고 있던 개인소장자 김모씨가 문화재청에 국가문화재 지정신청을 했다.[14] 문화재청에서 김씨 소장 증도가에서 마지막 몇장이 사라진 흔적을 발견하고 추가 조사를 하던 중, 사라지기 전 촬영해놓은 사진을 찾아냈다. 총 6쪽의 인수대비 발문이었는데, 1472년(성종 3년)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선왕들과 남편(덕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200부를 간행한다고 밝히고 있었다.

김씨 소유의 증도가 본문은 목판본이었으나 인수대비 발문은 조선시대 금속활자인 갑인자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본문과 발문의 상단에는 과거 소유자의 도장이 찍혀 있었는데 도장 모양과 위치, 책에 남아있는 얼룩 등으로 봐서 본문과 발문이 동시대에 발간된 것이라고 문화재청은 결론을 내렸다.

또한 문화재청은 김씨 소유의 증도가와 기존의 2점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1점, 공인박물관 소장 1점)등 총 3점을 나뭇결, 칼자국, 획의 굵기, 탈락, 필사로 보완한 부분 등을 종합 비교하였을 때, 3점 모두 조선시대 판본이라는 결론을 내리며,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증도가가 10여점 뿐이고,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과 공인박물관 소장본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기 때문에 2점에 대해서는 보물의 지위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유우식 웨이퍼마스터 대표가 보존과학회지 2021년 37권 6호에서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과 공인박물관 소장본이 다른 판본이라고 밝혔다. 두 판본의 이미지를 분석하는 과학적 검증 결과, 언듯 비슷해보이는 글자들에서도 획의 각도가 확연히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두개가 다른 판본으로 인쇄된 것이다. 이는 앞서 문화재청에서 김씨 소유의 증도가를 근거로 3점의 증도가가 모두 조선시대에 인쇄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2017년 4월 13일, 문화재위원회는 증도가자 보물 지정 안건을 부결시켰다. 증도가자가 오래된 활자이기는 하지만, 출처와 소장경위, 교차검증 등이 불가능하여 고려시대 금속활자로 판단할 수 없음을 이유로 들었다 [15]. 문화재위원회는 결정적 이유로 증도가자로 식자했을 때 목판으로 인쇄한 것보다 커진다는 이유를 들었다. 즉, 증도가자 금속활자의 크기가 가로 1.59cm, 세로 1.309cm, 높이 0.72cm로 1행에 15자를 식자하면 현존하는 번각본의 세로 평균 18.3cm보다 1.32cm 정도 커진다는 것이다. 가로의 경우에도 8행으로 식자했을 때, 세로 괘선을 넣을 공간이 안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금속활자와 목판의 가장 기초적인 차이조차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류일 수 있다. 목판에 각인할때는 수분을 머금고 있는 상태에서 하고 인쇄할때는 마른 상태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목판으로 인쇄한 번각본의 크기가 금속활자로 인쇄한 주각본보다 작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기 때문이다. 남권희에 따르면 이 차이가 10%에까지 이를 수 있는데, 문화재위원회가 근거로 든 1.32cm / 18.3cm는 7.2%에 불과하다. 즉, 충분히 있을법한 범위 안에 놓여있다.

오히려 이점이 증도가자가 진품일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번각본을 기초로 위조품을 만들었다면 크기가 번각본 크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번각본보다 크기가 7.2% 크다는 것은 증도가자가 진품이거나 위조품 제작자가 문화재위원회 위원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뜻한다.

2019년 10월 7일, 국정감사를 통해 논란이 재점화되었다 [16]. 국회에서 문화재청에 2017년 보물지정안건 심의당시의 녹취록 제출을 요청했으나 문화재청은 이를 거부했다. 문화재청은 소유자가 다시 보물지정 신청을 하면 3년간에 걸쳐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만 밝혔다.

애당초 고고미술, 유물 등에서 성분검사 및 과학감정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참조사항이자 근거일 뿐이다. 탄소연대측정 등으로 모든 유물의 편년을 파악 할 수는 없다. 또한 성분분석을 통한 진과 위를 밝히는 것이 아닌, 그 이상으로 사학적인 접근과 맥락, 문헌 등을 통한 교차검증을 통해서 결론에 다다르는 것이지 아직까지는 확정하여 진위를 말할 수 없다.

2021년 3월 24일, 남권희는 문화저널21과의 80분간의 영상을 통해 2004년부터 계속되어온 증도가자 연구와 문화재청과의 관계등에 대한 입장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밝혔다.

6. 금속활자 인쇄본 발견

증도가의 금속활자 인쇄본이 발견되었다. 없던 것이 발견된 것은 아니고 그 동안 목판본으로 간주되었던 공인박물관 소장본(이하 공인본)이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밝혀진 것이다.[17]

2020년, 불교서지학자 박상국 동국대 석좌교수는 보물로 지정된 남명천화상송증도가 2판본 중 보물 제758-2호 공인본은 그동안 목판본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금속활자본이라는 내용의 연구결과를 한국불교학회 추계학술회의에서 발표했다.[18]

첫째로, 인쇄된 페이지에는 흔들림이 없는데 특정 글자만 흔들려서 '이중으로 겹쳐보이는 현상'(도장을 2번 반복해 같은 자리에 약간 어긋나게 찍은 모양)이 다수 관측되었다. 한글자 한글자 독립된 활자를 조합해 인쇄하는 금속활자 인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목판 인쇄에서는 절대 나타날 수 없는 현상으로,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가장 결정적 증거이다. 활자가 흔들리지 않도록 나무등을 깍아 활자와 활자 사이에 끼워넣어 단단히 고정시킬수는 있겠지만 당시의 주조 기술로는 완전히 없애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둘째로, '너덜이'라는 것으로 인해 깔끔하지 않게 인쇄된 부분이 관측되었다. 금속활자를 주조할 때 쇳물이 삐져나와 너덜이라는 끄트머리가 생긴다. 측면을 연마하고 너덜이도 떼어내기는 하지만 금속활자 주조기술이 성숙되지 않은 시기에는 피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 상태로 인쇄하게되면 글자가 번져보인다든지 글자 옆에 불필요한 점이나 긁힌자국 같은 것이 인쇄되어 나오게 된다. 목판본에는 나타나기 힘든 금속활자 인쇄본만의 특징이다.

세째로, 한 글자 안에서 한쪽 귀퉁이는 진하게 반대쪽 귀퉁이는 흐리게 인쇄된 경우가 다수 관찰되었다. 평평하게 주조되지 않은 금속활자를 틀에 놓으면 기우뚱해지면서 인쇄시 눌리는 압력이 달라져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 역시 목판본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증거들이 발견되었는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물론 첫째로 언급된 활자 흔들림으로 인한 이중 겹침 현상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금속활자 인쇄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1239년 9월에 발간된 증도가의 마지막에 최이가 발문을 남겼는데 "어시모공 중조주자본 (於是募工 重彫鑄字本)"이라는 글귀가 있다. 기존에는 "중조-주자본"이라고 읽어서 금속활자본을 목판본으로 만든 것이라고 해석했었는데, 당시 권력가이던 최이가 발문을 남길 정도면 최소한 금속활자본 정도는 만들었을터이므로, 한학자 구봉 이정섭은 "중-조주자본"이라고 읽어서 "이에 각공을 모집해 거듭 금속활자를 새겼다"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즉, 띄어쓰기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수 있는데, 과거에 목판 인쇄본이라는 선입견이 굳어졌던 상태였기때문에 아무도 달리 띄어쓰기를 해볼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19]. 중국 역사학자 쑨인강 저장대 교수역시 "발문에 목판본이라는 언급이 없으니 '다시 주자본(금속활자본)으로 간행한다'는 의미일수 있다"고 했다. 증도가 공인본에 드러난 금속활자의 인쇄 특징을 뒷받침해줄 근본적인 증거가 나온 것이다.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으로 밝혀지면서 증도가자 논란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즉, 대조할 '원본'이 생겼기 때문이다. 보유중인 증도가자로 인쇄한 뒤, 공인본과 비교해보면 공인본을 인쇄하는데 사용된 활자인지 아닌지는 어렵지 않게 알수 있을 것이다.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고해서 위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1239년의 증도가를 재인쇄할 당시에 사용된 증도가자가 아니라는 의미가 될 뿐이다. 필체 유사성이 매우 높은것으로봐서 1239년 이전의 증도가를 인쇄할 때 사용했던 활자일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1239년 이전의 증도가 인쇄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재 보유중인 활자가 증도가자인지를 알아낼 방법은 영원히 사라지는 셈이다. 그렇더라도 고려시대의 다른 문서들를 인쇄할 때 사용되었을수도 있으므로 제조연대만 확실하다면 고려시대 금속활자로써의 가치는 여전히 존재한다.

7. 중국의 대응

2018년 2월, 중국에서는 "중국 초기 청동활자의 중대한 발견 학술 논증회"를 열고, 중국 서지학 및 활자분야의 대가들이 총망라되어, 증도가자를 중국의 송-원대의 유물로 규정하고 나섰다.[20] 금속성분, 산화, 부식, 서체 등의 특징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1912년 당시 중국의 나진옥이 소장하고 있던 97자의 활자를 일본이 가져갔다가 최근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는 감정서도 첨부되어 있다. 제작과 발굴 위치도 특정하고 있는데 양자강 하류 또는 화남지역 일대라고 한다.

중국은 해당 활자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우리나라 일각에서는 중국의 활자들은 북한 개성 만월대에서 출토된 증도가자와 같은 그룹의 활자라고 보는 의견이 있다.
[1] 직지보다 138년 앞선 최고 금속활자 발견, 법보신문, 2010년 9월 1일[2] "중조-주자본"으로 읽으면 금속활자본을 (목판으로) 다시 만들었다로 해석할수 있으나, "중-주조자본"으로 읽으면 다시 금속활자본을 만들었다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최이가 발문을 남길 정도면 금속활자본을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3] 신청자측에 연구용역을 주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나서는 사람들이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4] 증도가자 논란 - 세기의 유물일까 희대의 촌극일까, 연합뉴스, 2015년 11월 23일[5] 직지보다 138년 앞서는 최고 금속활자본 찾았다, 조선일보, 2015년 3월 17일[6] 직지보다 앞선 증도가자.. 세계 최고 금속활자, SBS, 2015년 2월 8일[7] 4년째 질질 끄는 문화재위.. 증도가자 문화재 지정 안하나 못하나, 한경, 2015년 9월 9일[8] 증도가자는 가짜... 최고활자 아니다, 동아일보, 2015년 10월 27일[9] 증도가자 진위놓고 분석자간 공방 치열, 뉴시스, 2015년 10월 31일[10] 앞서 언급된 경북대 산학협력단의 연구용역 보고서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점은 증도가자가 아닌 일반 고려활자로 분류했었다.[11] 증도가자 진위놓고 분석자간 공방 치열, 뉴시스, 2015년 10월 31일[12] 증도가자.. 부식에 의해 이중단면 생길수 없다, 충북일보, 2015년 11월 3일[13] 800년전 고려 증도가자에서 20세기 인공원소가 나왔다고?, 한계레, 2015년 11월 16일[14] 보물지정 고려 증도가, 조선 판본으로 드러나, 동아일보, 2016년 1월 29일[15] 증도가자, 보물가치 없어... 7년 진위 논란에 종지부, 연합뉴스, 2017년 4월 13일[16] 정세균 "증도가자" 문화재 가치 재검토해야, 연합뉴스, 2019년 10월 7일[17] '직지'보다 138년 앞선 금속활자본…국내 존재 사실 전혀 몰랐다, 경향신문, 2020년 4월 21일[18] '직지'보다 138년 앞선 금속활자본…"국내 존재 사실 전혀 몰랐다", 경향신문, 2020년 4월 21일[19] "남명증도가 발문이 금속활자본 근거", 불교방송, 2021년 7월 21일[20] 중국 "증도가자는 송-원대 유물".. 금속활자 종주국 위상 노리나, 문화일보, 2019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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