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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6 18:39:49

지혜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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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집 상상화

아랍어 بيت الحكمة‎ [1]
영어 House of Wisdom
1. 개요2. 설립3. 연구 성과4. 몰락5. 여담6. 관련 문서

1. 개요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마문이 마디나트 알 살람, 즉 현재의 바그다드에 건립한 연구소. 부왕인 하룬 알 라시드의 사설 도서관을 개조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중세 학문의 중심지였으며, 당대 유럽 - 중동권의 모든 지식을 집대성하는 데에 성공하였다고 평가받는다. 조선 후기의 규장각과 비슷한 시설이며, 중세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이자 이슬람 황금기의 원동력이었다.

2. 설립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마문은 제국의 수도를 세계에서 가장 학문적으로 진보된 도시로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바그다드는 그의 즉위 과정에서 동생 알 아민과의 내전에서 벌어진 공성전으로 곳곳이 파괴된 터였다. 알 마문은 바그다드 재건의 일환으로 페르시아, 이집트, 이라크 등지의 학자들을 종교에 상관없이[2] 불러들여 합동 연구소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알 마문은 지혜의 집을 지을 장소를 물색하다가, 근처에 종이 공장이 있고 이미 책이 수천 권 비치된 선왕의 사설 도서관이기도 한 하룬의 도서관을 낙점하고 확장공사를 하여, 816년에 지혜의 집 완성을 선포하였다.

알 마문과 그의 후계자들은 종교와 민족에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학자들을 모집하였고 전국적인 호응을 이끌어내었다. 그 결과 지혜의 집은 수많은 인재들이 편안한 조건에서 실험과 토론을 하는 집단 연구소로 거듭나게 되었다.

3. 연구 성과

제국 각지에서 몰려든 학자들은 지혜의 집에서 수많은 고대 그리스 서적들을 아랍어로 번역[3]하였고, 연금술을 연구하여 근대 화학의 기초를 다졌다. 그 외에도 지혜의 집은 의학, 철학, 건축학, 생물학, 신학 등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페르시아 시대를 거치며 축적된 지식을 집대성한 학문의 장이었다. 4세기 이후 오리엔트 지방의 학문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던 니시비스에데사의 학교[4]를 계승, 발전하여 학문연구를 이어나갔는데, 당시 세계 (9 ~ 10세기)의 거의 모든 지식을 총 망라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의학 수업 과정#

4. 몰락

하지만 아바스 왕조가 10세기에 부와이흐 왕조와 파티마 왕조의 발흥으로 실권을 잃으며 학자들에 대한 후원이 점차 적어졌고, 결정적으로는 1258년에 몽골 군대가 바그다드를 함락한 후 대대적인 파괴를 자행하여 인류의 보배였던 수많은 장서들이 불타 없어졌다.

5. 여담

지혜의 집에서는 그리스어, 아람어, 고대~중세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책을 번역했으나 라틴어 책은 번역하지 못했다. 원래 지중해 동부의 동로마 제국은 라틴어보다 그리스어, 아람어가 훨씬 더 많이 사용되던 상황이었고,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이후 식자층이 대폭 감소한 결과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아는 학자층이 매우 희귀해졌던 영향이다.[5] 라틴어로 된 책이 다이렉트로 아랍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지혜의 집이 몽골의 침략으로 박살났을 시점인, 십자군 전쟁 이후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인들이 교황청과 교류한 이후이다.

6. 관련 문서



[1] Bayt al-Hikma[2] 유대교도, 기독교도, 조로아스터교도, 마니교도 등 각지에서 모여들었다.[3] 이는 이후 유럽에, 세계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오랜 중세 시기 동안 유럽에서는 잊혀졌던 그리스 저작들과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어 아랍 세계로 전해졌다가 12~13세기 중세 후기에 유럽으로 재수입되었고 이후 르네상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4]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까지의 동로마 제국과 사산 제국 간의 전쟁으로 쇠퇴하였으나 이슬람 정복 이후 부활하였다.[5] 공교롭게도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편찬한 로마법 대전은 라틴어로 쓰였고, 한동안 후대 동로마 제국의 법관들은 이를 제대로 독해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