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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02:03:37

친더춘

진덕순에서 넘어옴
파일:진덕순.jpg
중화민국 베이핑 특별시장
한문 秦德純
한국식 독음 진덕순
영문 Qin Dechun
소문(紹文)
출생 1893년 12월 11일 청나라 산동성 기수현
사망 1963년 9월 7일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베이징 육군대학
직업 정치가, 군인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과 국민혁명

파일:젊은친더춘.png
젊은 친더춘

1893년 산동성 기주부 기수현에서 태어났다. 1908년 제남 육군소학에 들어갔으며 1911년 베이징 육군중학을 거쳐 1913년 베이징 군관학교, 1914년 바오딩 군관학교 2기 보병과, 1920년 베이징 육군대학 6기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전략, 전술, 사격, 병기, 축성, 야외연습, 일본어, 독일어, 영어, 물리, 화학, 수학 등 현대 학문을 다양하게 학습하였다.

1923년 육군대학을 졸업한 후 하남성에서 직예군벌에 입대했으나 1924년 2차 직봉전쟁에서 직예군이 패배함에 따라 국민군 악유준의 휘하에 들어가 2군 5사단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직예군벌의 수령인 우페이푸가 재기하여 양호 지역과 하남성을 공략하자 다시 우페이푸에게 투항, 24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국민혁명군과 교전했으나 서북군벌 펑위샹이 국민혁명군 2집단군 사령관에 취임, 하남성으로 진주하자 펑위샹에게 투항하여 쑨롄중이 지휘하는 2집단군 2방면군의 부총지휘 겸 23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14군 군장 겸 2집단군 총사령관 부참모장에 임명되었다.

2.2. 반장전쟁에서 화북분리공작까지

1928년, 제남 사건 이래로 산동성에 진주한 일본군이 국민정부와의 협상 끝에 철수하자 장제스는 펑위샹과 산동성을 분할점령하기로 합의하였다. 펑위샹은 부하 손양성을 파견하여 산동성을 점령하게 했는데 이때 친더춘도 함께 파견되어 산동성에 진주하여 산동성 정부위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부유한 지역을 장악하고 펑위샹이 빈곤한 지역을 장악하게 되자 격노한 펑위샹은 1차 장풍전쟁을 일으켜 중앙에 반기를 들었다. 친더춘은 국민군 부참모장 겸 국민군 2방면군 참모장이 되어 장제스에 맞섰으나 패배했다. 이후 2차 장풍전쟁에 참여했으며 1930년 중원대전에서 2방면군 참모장에 임명, 녹종린을 보좌하여 장제스와 교전했으나 또 참패했다. 이후 쑹저위안, 37사단장 풍치안, 38사단장 장자충과 함께 4만명의 병력을 거느려 장쉐량봉천군벌에 투항하여 국민혁명군 29군으로 재편되었고 친더춘은 29군 부군장이 되었다.

1932년, 쑹저위안이 차하얼성 주석에 임명되자 친더춘은 차하얼성 민정청장 겸 정부위원에 임명되었다. 1933년 발발한 열하사변의 패전에 책임을 지고 장쉐량이 공직에서 사퇴하자 국민정부는 허잉친을 위원장으로 하는 군사위원회 베이핑 분회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친더춘은 베이핑 군분회 위원이 되었다. 1935년 관동군찰동 사건을 도발하자 29군 참모장 장유번으로 하여금 이를 처리하게 했으며 장자커우 특무기관장 마쓰이 중좌와 협상하여 일본군의 군사활동 중지를 요구했다.

1935년 6월, 장북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의 항의를 받았으며 6월 19일, 국민정부의 명령에 따라 신임 차하얼성 주석에 임명되었다. 이후 관동군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와 협상하여 진토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것을 진토 협정이 아니라 하토 협정이라 불러야 한다고 하며 불만을 표시, 차하얼성 정부주석직에서 사퇴하고 장자충에게 대리하게 하였다. 1935년 6월 27일에 발생한 풍대 사건을 단호히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외국에 저항하였으며, 국가에 공이 있다'는 이유로 7월에 쑹저위안, 풍치안, 유여명 등과 함께 청천백일장을 수여받고 11월에 베이핑 특별시장에 임명되었다.

1935년 11월부터 도이하라 겐지로부터 적극적인 독립 요구를 받았으며 기동사변 이후 난징에 전보를 보내 "전구가 돌변하여 평진이 위태롭고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 자결 자치의 의론이 분분하고 실재 방책이 없어 난국을 피하기 어렵다. 본인 더춘은 무마할 방법이 없으니 중앙에서 일찍 대계를 정해 이로운 길로 이끌어 북방을 지키기 바란다."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12월 11일, 기찰정무위원회에 성립되자 상무 정무위원에 선출되었다.

2.3. 중일전쟁

파일:장자충과진덕순.jpg
장자충과 함께 사진을 찍은 친더춘

1937년 여름, 쑹저위안이 휴가를 떠난 사이 그를 대리하여 베이핑을 관리하고 있었다.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의 보고를 받고 완평현 등의 방비를 강화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베이핑 특무기관장 마쓰이와 담판을 맡아 정전 합의를 하려 했으나 장제스로부터 결사항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7월 17일 루산성명이 발표되었고 베이핑-톈진 전투가 벌어지면서 일본군에 저항하였으나 결국 중과부적을 인정하고 7월 28일 장자충에게 시장직을 넘겨준 다음에 잔여 병력을 인솔하여 바오딩으로 철수하였다.

화북전역이 궤멸된 이후 후방으로 퇴각하여 군법집행총감부 부총감, 병역부 정무차장, 군령부 차장 등을 역임했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하여 도이하라 겐지가 화북자치정부 성립을 선동하며 쑹저위안에게 중앙으로부터 독립하라고 부추겼음을 폭로했으며 1946년 국방차장에 임명되었다.

2.4. 국공내전과 말년

1948년 헌정 실시 이후 행정원에 의해 12월 산둥성 정부주석 겸 칭다오 시장에 임명, 1949년 3월에 취임했으나 8일 만에 인민해방군의 공격으로 물러나 광저우로 퇴각한 후 총통 대행 리쭝런에게 산동성 정부주석 겸 칭다오 시장에서 사직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국방차장으로 복직하여 8월에 타이완으로 철수했다. 타이완에서 총통부 전략고문을 지내면서 루거우차오 사건을 다룬 <7.7노구교사건경과>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1963년에 타이베이에서 병환으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