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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1:00:34

차필드 철도 참사의 두 아이들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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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차필드(Charfield) 의 모습. 역 자체는 1965년폐쇄되었다.

1. 개요2. 신원을 알 수 없는 두 아이들3. 가설들4. 사고 이후 묘지를 찾은 사람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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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현장 사진

1928년 10월 13일 오전 5시 20분경, 영국 글로스터셔 차필드 마을에서 철도 사고가 발생하였다.

리즈를 떠나 브리스틀로 향하던 급행열차가 신호착오로 인해 차필드 역에서 멈춰 서 있던 열차와 충돌해서 발생한 사고로, 급행열차는 불길에 휩싸였는데 당시에는 객차가 나무로 되어 있어 피해가 컸다. 승객 60명 중 사망자는 16명, 부상자는 41명이었다.

물론 큰 사고이긴 하지만 이 사고 자체만으로는 미스터리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3등칸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두 아이가 문제였다. 이것이 바로 이 사건이 영국 철도 사고 역사상 가장 이상한 미스터리로 떠오르게 된 원인이었다.

2. 신원을 알 수 없는 두 아이들

꼭 껴안은 채 죽어 있던 시체들은 사건이 있은 지 2개월 후 부검이 이뤄졌다. 부검에 따르면 시체들은 13세 아이와 6세 가량의 아이라고 확인되었다. 하지만 시체가 워낙 심하게 훼손되어서 다른 정보는 물론 성별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총 사망자 16명 중 14명은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유족들에 의해 금방 신원이 확인되었지만 이 두 아이의 시신은 신원을 확인하러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고 현장에서는 무슨 격언 같은 글귀가 적혀 있는 교복 상의 주머니 조각과 남자아이용으로 보이는 9인치 길이의 새 신발 2켤레, 그리고 C.S.S.S.라는 이니셜이 새겨진 양말 조각이 발견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아이들의 신원을 알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검표원이었던 해리 하이네스는 "글로스터셔에서 12살쯤 된 남자아이와 6살쯤 된 여자아이가 열차를 타는 것을 봤다"고 진술했다. 아이들은 둘 다 학교 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동행하는 어른은 없이 자기들끼리만 여행을 했다고 한다.

3. 가설들

이 아이들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왜 아무도 없었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했다. 이 중 대표적인 가설은 다음 3가지가 있다.

하지만 여러 가설들 중에서 어느 하나 확실하게 증명된 것은 없었기에 결국 두 아이의 정체는 영영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어쩌면 아이들은 정말로 연고가 없는 아이였을 수도 있다.

4. 사고 이후 묘지를 찾은 사람들

파일:external/charfield.org/big_5.jpg
차필드에 세워진 사고 희생자 추모비

사고 이후 아이들의 시신은 차필드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런데 지방신문에 따르면 그 사고가 있은 후 1950년대 후반까지 사고가 발생했던 날에 묘지를 찾아온 남녀가 있었다고 한다. 따로 운전사가 모는 차를 타고 온 그들 중 특히 여자는 검은 옷을 입은 채 울고 있었다고 한다. 위의 가설들 중 3번째 가설이 나온 이유도 이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남녀의 신원 또한 알 수 없었고 언론에서 접촉을 시도하자 그 이후로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전술할 3번 가설이 맞다고 하더라도 21세기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일 것이 확실하니 앞으로 밝혀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2]


[1] 당시 영국은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이었다. 좀 사는 집안의 부모가 외국에 나가 있는 경우도 흔했다.[2] 1928년에 10대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못해도 30대는 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1890년대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경우 1990년대에 이미 100세를 넘기게 되므로 현재는 무조건 사망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