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채준식(蔡駿植) |
본관 | 평강 채씨[1] |
출생 | 1897년 3월 15일[2] |
함경남도 홍원군 호현사 풍동리 (현 함경남도 홍원군 동중리) | |
사망 | 1954년 12월 7일 |
경상남도 부산시 서부출장소 서대신1동 서독적십자병원 (현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1가)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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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채규항은 1897년 3월 15일 함경남도 홍원군 호현사 풍동리(현 홍원군 동중리)에서 아버지 채호묵(蔡浩默)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진운(金晋運)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함흥군 함흥면 중하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니혼대학 법과를 졸업하였고, 니혼대학 및 와세다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수학하기도 했다.그는 1921년 8월 2일 홍원군 삼호예배당(三湖禮拜堂)에서 ‘신구사상의 교대(新舊思想의 交代)’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하고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1924년 1월 27일에는 전조선노농대회(全朝鮮勞農大會) 소집을 위한 후원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으며, 1924년 4월부터 1925년 10월까지 홍원군에서 3회에 걸쳐 강연회를 개최했다. 또한 1925년 11월 1일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그러나 1926년 7월 24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체포된# 그는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1928년 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경기도 경성부 견지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으로 이주하였다. 1929년 6월 28일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고, 그해 7월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에 피선되어 노동 운동을 통한 항일 활동에 힘썼다.
이후 서적상으로 일하면서 항일운동에 힘쓰다가 1930년 3월경 백일당(百一黨)사건에 연루, 재차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에는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1가에 거주하였으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중앙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초대 조직부장, 대한독립근로총연맹 부위원장, 대한독립농민총연맹 위원장, 대한노농당 최고위원 겸 위원장, 중앙농민학교 학장, 대한농량협회 이사장, 새농촌건설사 사장, 농촌지도자훈련원 원장, 자유당 초대 조직부장, 이승만 대통령 입후보 추천인 대표자 겸 선거사무장, 대한금융조합연합회 이사 및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54년 12월 7일 경상남도 부산시 서부출장소 서대신1동(현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1가) 주한서독적십자병원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채규항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