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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20:44:21

청동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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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비파형 동검.jpg
비파형 동검(요령식 동검).
요동 지역과 한반도의 대표적인 청동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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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동검(도씨검).
한국의 동검과 달리 검신과 손잡이가 일체화되어 있다.
1. 개요2. 역사
2.1. 한국2.2. 해외2.3. 철기 시대
3. 제조 과정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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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동검()은 구리주석을 혼합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으로, 인류사 가운데 청동기 시대에 사용되었다. 청동의 푸른 빛깔은 구리의 산화에 따라 청색으로 보이는 것으로 녹슨 상태가 청색이지, 사실 주조 직후 색깔은 노란 빛을 띠는 은색에 가깝다. 한반도에서 청동검이 주조되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구리에 아연을 섞은 황동검도 다수 만들어졌는데, 이는 고조선을 포함한 북방계와 중국 남방계 문명의 기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손잡이가 오리 형태로 된 상감 청동검은 기원전 BC에 많이 만들어졌다. 대부분 이 시대에는 의장용이 많았다.

2. 역사

동검의 용도는 크게 두 가지로, 종교의식을 위한 제기로 쓰인 것과 실전에서 전투용으로 쓰인 것이 있다. 제사용의 청동검은 대표적으로 비파형 동검이 있는데, 이름 그대로 비파처럼 생겼으며 청동기 시대에는 군장의 권력의 상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gw.jpg
기원전 15세기경, 미케네 시대 그리스 조각품.

유럽 및 중앙아시아에서 청동검은 전투용으로도 쓰인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동검이 무기로 쓰였는가 쓰이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 공통된 의견을 내놓지 못한 상황이다.

비파형 동검은 무기로 쓰기에는 실용성이 매우 떨어졌으나, 세형 동검의 경우 경우 날이 매우 잘 연마된 것은 아직도 손이 베일 것 같은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으며, 일부 세형 동검에서는 혈흔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무기로 사용되었을 법 하다. 문제는 동검의 경도다. 복합금이 아닌 저품질의 청동이나 황동검은 땅에 떨어뜨리면 날이 휘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깨져버린다. 만약 진짜 싸움에 동검을 들고 나갔다간 몇 번 휘두르지도 못하고 바로 두동강이 나 버릴 것이다.[1] 그렇기 때문에 세형 동검에서 발견된 혈흔을 감안하여 일부 학자들은 동검이 제사용 제물을 바치거나 포로를 처형할 때만 무기로 사용되었지 실용적인 전투 무기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철제 무기류가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하는 목곽묘 단계에 접어들면 그나마 잔존하고 있던 칠초동검의 부장까지 완전히 소멸되어버린다. 즉 철제 무기가 보편화되어 가는 시점에서 동검의 가치는 사라진 것이다.

2.1. 한국


한국에서 출토되는 청동검은 다른 지역의 것에 비해 아연 함유량이 높다고 한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청동검을 만들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주로 발견되는 청동검은 초기 청동기 시대 때 만들어진 비파형 동검[2]과, 후기 청동기시대부터 철기 시대 초기까지 만들어진 세형 동검[3]으로 나뉘어진다. 비파형 동검은 날이 갈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의식용 도구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오래된 것일수록 더욱더 반짝거리는데, 대부분 유리같은 모습을 보고 초보자들이 가품으로 생각해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 세형 동검 역시 전투용보다 의식용 도구로 쓰였을지도 모른다는 학설이 있었는데, 그 근거는 한국 세형 동검의 경우 칼날과 손잡이 연결부가 약한 구조로 되어 있어 전투에서 몇번 휘두르다 보면 손잡이가 부러질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추정이었다. 세형 동검은 무기로도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일부 동검은 무기로 사용된 흔적이 있기에. 이들 청동 무기가 보편화된 시절은 초기 철기 시대로, 다른 철기와 혼용되었다. 물론 의식용 도구로도 사용됐을 것이다.

도신과 칼자루의 결합 구조가 무기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칼자루 끝에 돌로 만든 큰 장식이 달리기도 하는 등 의장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임용한 박사는 비파형 청동검을 의장용이라고 주장했지만, 전통 무예 연구가인 박금수 박사는 실전에 쓸만하다고 평가했다. 현재 발견된 유물만으로는 입증할 수 없는 상태지만, 실전에서 사용된 청동검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정말 아예 청동 무기가 쓰이지 않았다고 말하긴 어렵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에는 국가 단위가 작았던 만큼 병력 역시 적었는데, 백 명에서 수백 명 정도의 병력을 무장시킬 만한 청동 무기가 없었을 거라 단정하긴 어렵다고도 이야기했다.#

한반도에서 청동제 농기구는 사용되지 않았다. 한반도는 청동의 주재료인 구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구리는 일본에서 수입하여 충당했고 그래도 부족하면 사찰의 종을 몰수해 녹여 구리를 회수하곤 했다. 청동이 귀한 금속이다보니 전 세계적으로도 청동제 농기구는 그리 많지 않다. 철기시대 초창기의 철제 무기는 청동 무기보다 질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철기시대로 이행한 이유는 구리와 주석에 비해 철은 너무나도 흔했기 때문. 일례로 주석이 나오지도 않고 무역을 통해 수급하는 것도 불가능했던 몇몇 문명권에서는 구리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바로 철기시대로 건너뛰기도 했다.

동기 시대(금석병용기)에서 청동기 시대 후기까지도 여전히 석기가 무기로 더 많이 쓰였고, 일상용품도 대부분 석기와 목기였다.

2.2. 해외

국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이나 스키타이, 그리스 등 대부분의 경우 무기로 사용되었다.

히타이트 또한 청동기로 번영한 문명을 이루었고 심지어는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는 진나라가 철제 무기를 사용하는 연나라를 이기고 중국통일을 했다. 이는 전국시기 금속 가공기술의 발달 때문인데, 이 시기의 청동검은 깨지는 데에 대한 저항력도 당시의 철검과 비교해서 맞먹거나 우월했다. 월왕구천검 참조.[4]

2.3. 철기 시대

철기 시대가 되면서 철검의 생산성이 엄청나게 좋았던 덕분에 밀려서 사라졌다.

단 좋았다는 뜻이 오늘날 보듯이 철이 더 단단해서라는 의미는 아니다. 청동기시대에도 사실 철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철의 가공은 화력을 높이는 풀무와 많은 바람이 부는 높은 장소가 필요하기에 가공 기술의 부족으로 불순물 함유량이 매우 높아서 철기를 만들어도 굉장히 잘 깨졌다. 자연 상태의 철을 보면 불순물이 섞여 있어서 이를 분해 시켜야한다. 오히려 청동검보다도 내구도가 낮았던 것. 청동검은 주로 강한 충격을 받으면 그냥 휘기만 했으므로 나중에 고쳐쓸 수 있었지만 철기는 깨지거나 부러지면 버려야 했다. 그리고 내식성에 있어서도 청동의 상대가 안 된다.[5] 철의 장점은 청동의 재료인 구리, 주석, 아연 등에 비해 매우 구하기 쉬웠다는 점이다. 중국 전국시대 내지 고조선~삼한 시대에는 철괴가 바로 화폐로도 쓰일 정도였으니.

그러나 사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특히 춘추시대까지는 대부분의 무기는 청동제였다. 월왕구천검이라든가 하는 것도 전부 청동제. 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의 주 병기도 청동제였다. 이는 해당국 영토에 구리광산, 주석광산이 많이 있나 철광산이 많이 있나로 갈라진다. 무기의 완전철기화는 한대 이후로, 그전까지 고급 무기는 청동제가 많았다.

무기뿐만 아니라 갑옷도 철기화의 이득을 많이 받았다. 청동 갑옷은 무게가 엄청나기 때문.

3. 제조 과정

주로 거푸집에 청동물을 부어 만드는 주조방식이 대부분이다. 한국의 경우 각각 청동검의 한 면을 파낸 2개의 거푸집을 붙여서 주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로 인해 거푸집의 틈사이로 청동물이 흘러나와 거푸집에서 갓 꺼낸 청동검에는 청동 찌꺼기가 잔뜩 붙어있었으며, 날 역시 날카롭지 못하고 뭉툭했다. 그렇기에 날에서 청동 찌꺼기를 떼어내고 추가로 숫돌로 갈아 날을 세우고 광을 내는 과정을 거쳐야 청동검 한 자루가 완성된다. 검의 손잡이의 경우, 검과 손잡이를 한 번에 주조하는 일체형과 검신만 따로 주조하여 나무로 된 손잡이에 끼우는 방식이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주로 후자의 방식이 사용되었다.

동검과 함께 동검을 담을 나무로 된 칼집이 제작되기도 하였는데, 가끔가다 동검이 칼집에 넣어진 상태로 발굴된 사례가 몇이나마 있다. 다만, 칼집에 넣어진 채로 땅속에서 매우 오랜 기간동안 방치되었기 때문에 칼집과 검이 일체화되어 칼집에서 검을 빼는게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나무 칼집에는 옻칠을 하기도 했는데 이를 칠초동검이라 부른다. 이 칠초동검은 철기가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할 시점까지 살아남아 최후의 청동검이 되었다.

4. 여담



[1] 하술하겠지만, 청동검이 활발히 제조될 당시엔 기술 수준 때문에 철제무기도 쉽게 부러졌다. 청동검이 무조건 전투용 무기가 아니었다고 할 수 없는 이유.[2] 한창균 "예를 들어 조양시 용성구 열전창 유적에서 교정연대가 기원전 2015년~기원전 1475년, 기원전 1990년~기원전 1760년, 기원전 2030년~기원전 1830년, 기원전 2265년~기원전 1965년으로 나왔고, 북표현 풍하 유적에서 기원전 2020년~기원전 1760년, 건평 수천 유적에서 기원전 2290년~기원전 2070년으로 나왔다. 한편 내몽골자치구 오한기 대전자의 하가점 하층문화에서는 기원전 1870년~기원전 1600년, 기원전 1830년~기원전 1560년으로 교정연대값이 나왔는데, 이 유적에서는 작은 종류의 청동유물이 발굴된 바가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적봉 지주산 하가점 하층문화기의 교정연대값이 기원전 2550년~기원전 2270년으로 나온 바가 있었는데, 현재 이 측정값은 하가점 하층문화기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것이다."[3] 한반도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기 때문에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불리고 있었다.[4] 물론 이때 철검은 가공기술이 청동기보다 부족했기 때문. 이후 풀무의 발명으로 고온을 사용하기 쉬워져서 철기 가공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청동기는 역사 뒷편으로 사라진다.[5] 당시의 청동검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에 비해, 철기는 종류 불문하고 전부 부식되어 형체만 간신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