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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13:53:02

체사레 베카리아

<colbgcolor=#000><colcolor=#fff> 체사레 베카리아
Cesare Beccaria
파일:Cesare_Beccaria.jpg
본명 체사레 베카리아 보네사나
Cesare Beccaria Bonesana
출생 1738년 3월 15일
밀라노 공국 밀라노
사망 1794년 11월 28일 (향년 56세)
밀라노 공국 밀라노
국적 파일:Flag_of_the_Duchy_of_Milan_(1450).svg.png 밀라노 공국
직업 법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사상 계몽주의

1. 개요2. 생애3. 사상
3.1. 사회계약과 형벌3.2. 죄형법정주의3.3. 고문과 가혹한 형벌 비판3.4. 사형제 폐지
4. 평가5. 영향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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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법학자이자 철학자, 경제학자. 이탈리아의 계몽주의자로서, 최초로 근현대적 개념의 죄형법정주의를 창시하고 형법 사상의 기초를 마련해서, 근대 형법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2. 생애

베카리아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귀족이었지만, 수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유년기에 베카리아는 이탈리아 파르마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는데, 그가 생각하기에 그 교육은 광신적이고 인간 감정의 발달을 억압하는 교육이었다. 그럼에도 베카리아는 수학 성적만은 뛰어났다고 한다. 이후 그는 파비아 대학교에 진학하여 1758년에 법학 학위를 받았다.

1760년, 22살의 베카리아는 16살에 불과한 테레사 블라스코에게 청혼했으나, 아버지가 결혼을 강력히 반대하는 바람에, 부부는 다음해 양가의 승낙없이 결혼식을 치르고 사랑의 도피를 하여 첫 번째 아기를 낳았고, 이후 3명의 아이가 더 태어났다.[1] 1762년에는 밀라노 귀족 출신 친구들을 모아 "주먹들의 아카데미 (L'Accademia dei pugni[2])"를 결성하고, 형사 사법 제도 개혁을 논의하면서 이와 관련된 계몽주의 정치철학자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764년, 그 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저술을 해보라는 아카데미 친구들의 격려로, 베카리아는 짧지만 유명한 논문 『범죄와 형벌』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베카리아는 계몽주의에 근거하여 사형에 반대하는 주장을 최초로 제시하고 있다. 이 짧은 작품에서는 베카리아는 자백을 얻기 위한 고문, 비밀 고발, 판사의 임의적 재량권, 양형의 불일치와 불평등, 가벼운 형량을 얻기 위해 인맥을 이용하는 것, 심각하거나 경미한 범죄에 대한 사형 집행에 대해 끊임없이 항의한다.

『범죄와 형벌』의 출판 후 베카리아는 유럽 지성계의 명사가 되었다. 파리 사교계의 초대를 받아 프랑스 파리에서 일시 체류하기도 했으나, 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귀향했고, 그 뒤로 이탈리아를 벗어나지 않았다. 1768년 11월에는 밀라노의 팔라티노 대학의 법률 및 경제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771년 최고 경제 위원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1791년에는 사법 개혁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국가에 귀중한 공헌을 했다.

말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자 우울증에 빠졌으며, 그의 가족과 친구들을 멀리하고는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러다가 1794년 11월 28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생을 마감했다.

3. 사상

3.1. 사회계약과 형벌

베카리아에 따르면, 법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람들이 사회에서 결속하기 위해 만든 계약이며 그래야 마땅하다. 먼 옛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끝없는 전쟁 상황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은 '자유를 더욱 평화롭고 안전하게 지키고 누리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모든 개인은 자기가 가진 것들 중 다른 사람들에게 지켜달라고 요청하는 것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정도만큼의 자유, 즉 최소한의 몫을 공공 저장소에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각 개인의 남은 자유들이 합해져 한 국가의 주권을 형성하였으므로, 법은 오로지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유용하도록 설계되어야 하며, 그 의무는 지체 높은 사람부터 미천한 사람까지 인류의 최상층과 최하층을 평등하게 결속해야 된다는 것이 베카리아의 주장이다. 곧, 법은 '최대 다수가 공유하는 최대 행복'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 이상의 권력 사용은 정의가 아니라 모두 권력의 남용이다.

그러나 계약만으로는 현재 눈앞의 대상 때문에 일어나는 격렬한 욕망을 오랜 기간 억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법을 어기는 사람들의 횡포로부터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계기가 필요했다. 그 계기가 바로 형벌, 곧 법을 위반한 자에게 적용하는 형벌이었다. 형벌은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개인의 격렬한 욕망을 충분히 상쇄시킬 수 있었다. 형벌이 없다면 사람들은 정해진 행동 규범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형벌은 앞서 말했듯이 최대 행복과 최소 불행의 원칙에 따라 대중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절대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어야만 하며, 그 필요를 만족시키는 최소한의 패널티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범죄는 처벌하는 것보다 예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것이야말로 좋은 입법의 근본원리이며, 그러기 위해서 간단하고 명확한 법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법의 힘을 특정 계층보다 모든 개인에게 유리하게 해야 한다. 힘 있는 어떤 한 개인과 단체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 국민은 오로지 법만을 두려워하게 해야 한다. 어떤 한 개인과 단체에 예속된 사람은, 법만을 두려워하는 자유상태에 있는 사람보다, 더 쾌락적이고 더 방탕하며 더 잔인하기 때문에 범죄의 치명적인 원천이 된다.

3.2. 죄형법정주의

그러므로 오직 법만이 범죄에 대한 형벌을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형법을 제정하는 권한은 사회적인 협약으로 통합된,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입법자만이 가질 수 있다. 이때 그 어떤 법관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의라는 명목으로 그가 속한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 법에서 정하지 않은 형벌을 적용할 수 없다. 어떤 재판도 지나친 열망이나 공익을 구실로 이미 법에 따라 정해진 것 이상의 형벌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

법은 해석의 여지가 많을수록 불안정해진다. 우리의 모든 인식은 모든 관념과 맞물려 있다. 그리고 인식과 관념이 복잡할수록 그만큼 따져야 할 가짓수가 많아지고 결과도 다양해진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고유한 관점을 지니고 있어서, 같은 대상이라도 각기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때 법에 자의적인 해석이 개입하면 법의 정신은 법관의 감정적인 논리에 좌우되고 만다. 법관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따라서도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아울러 법의 해석은 법관의 지나친 욕망, 피고인의 지위와 상황, 피고인과 법관의 관계, 그리고 감정적인 변덕이 개입해 대상에 대한 인상이 바뀌는 등 여러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하여 범법자의 운명이 재판부에 따라 여러 차례 바뀌며, 그의 생명과 자유는 법관의 잘못된 추론이나 기분에 희생되기도 한다. 더군다나 법관은 자신의 확실하지도 않은 추론에서 나온 모호한 결과를 정당한 법 해석인 양 착각한다. 그런 까닭에 같은 법원에서 같은 범죄를 다룰 때도 시기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처벌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일관성 있고 변함없는 법의 소리를 따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서 생기는 잘못된 불안정성 때문이다.

법을 해석하는 것이 해악이라면, 법의 모호성 역시 해악이다. 법의 해석은 법의 모호성으로 인해 일어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법이 사람들이 모르는 언어로 이루어졌다면, 이에 따른 해악은 훨씬 더 커진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기가 한 행동에 따른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고, 법을 해석하는 몇몇 사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법은 공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아닌, 사적이고 특수한 문서로 바뀔 수 있다. 그러므로 성문화된 법이 없다면 어떤 사회도 확고한 정부 형태를 갖추지 못한다. 권력은 사회의 일부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귀속되므로, 법 역시 사회 전체의 의지에 따라 바뀌어야 하고 소수의 개인적인 힘에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공익에 반하는 모든 행위는 가장 무거운 범죄부터 가장 가벼운 범죄까지 두 극단으로 나뉠 수 있으며, 이 둘 사이는 경중에 따라 아주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다. 현명한 입법자라면 그 주된 차이를 제대로 파악해, 가장 무거운 범죄에 가장 가벼운 형벌이 부과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거운 범죄에 무거운 형벌이 가벼운 범죄에 가벼운 형벌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는 범죄와 형벌이 '일정한 비례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3.3. 고문과 가혹한 형벌 비판

죄를 심문하기 위해 고문을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것은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에 형벌을 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기 전에는 그 누구도 유죄가 아니다. 사회가 부여한 공적 보호 조건을 위반했다는 것이 입증될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공적 보호를 철회할 수 없다. 그의 죄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확실하지 않을 때, 재판관은 그에게 징벌을 내릴 권리가 있는가? 그것이 폭력적인 권리가 아니라면 무슨 권리인가? 법의 관점에서 죄가 입증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무죄이다. 그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결백한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

또한, 고통에 대한 인상이 고문을 당하는 사람의 정신을 완전히 사로잡는 지점에 이르면 고통받는 사람은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가까운 길을 찾을 수밖에 없으므로, 고문당하는 사람은 죄가 없어도 스스로 죄가 있다고 인정할 것이다. 고문으로 결백한 사람과 죄가 있는 사람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고문의 고통 때문에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죄를 털어놓는 사람을 일일이 열거해 논거를 보강할 필요는 없으리라. 그런 사례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를 바꾸려 하지 않고 올바른 결론을 내리는 것을 등한시해왔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유죄 판결을 받아서 형벌이 집행될 때에도 그 형벌이 잔혹해서는 안 된다. 공익이나 의도한 목적에 어긋나지 않더라도, 가혹한 형벌은 개화된 이성의 결과인 계몽주의와 박애 정신에 어긋난다. 계몽주의와 박애 정신은 주권자에게 사람들을 노예 상태가 아닌 자유롭고 행복한 상태에서 통치하도록 가르치며, 그러므로 가혹한 형벌은 정의와 사회적 합의에도 반한다. 형벌의 정치적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잔혹한 형벌이 이 목적이 달성될까? 그렇지 않다. 형벌이 잔혹해질수록 사람은 처벌받는 것을 피하려고 다른 범행을 저지른다. 형벌의 가혹함이 범죄자를 더욱 대담해지게 하는 것이다. 잔혹한 처벌로 가장 악명 높은 국가와 시대에는 언제나 피로 물들며 더없이 비인간적이고 극악무도한 범죄가 자행되었다. 형벌이 잔인해질수록 우리의 정신은 완강해지고 둔감해진다. 죄인의 사지를 벌린 상태에서 바퀴에 묶어 처형하는 수레바퀴형과 같이 심한 형벌도 100년간 이어지면 이전의 감옥보다 더 큰 공포감을 주지 못한다. 형벌은 형벌을 통해 받은 해악이 범죄로부터 얻는 이익을 넘어서는 정도이면 충분히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이를 넘어서는 모든 가혹함은 필요하지 않으며, 압제일 뿐이다.

자유를 박탈하는 것도 일종의 형벌이기 때문에, 구금은 형에 대한 선고가 있기 전에 가능한 한 짧은 기간에 행해져야 한다. 구금은 피고인이 유죄를 선고받든 무죄를 선고받든 피고인을 가두어 놓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기간이 짧아야 하고 최대한 가혹하지 않아야 한다. 구금 기간은 재판에 필요한 준비 기간에 한해야 하며, 오랜 기간 구금된 피고인부터 순차적으로 재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구금은 범죄자의 도주를 방지하거나 범죄 증거를 인멸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 그 이상이어서는 안 되며, 재판은 최단 기일 안에 종결해야 한다. 판사의 안일함과 피고인의 고통스러운 불안감, 무신경한 재판관의 편안과 가엾은 수감자의 불결한 환경, 이보다 더 잔인한 대비가 또 어디 있는가. 일반적으로 형벌의 정도와 범죄의 결과는 일반인에게는 최대한 효과적이어야 하되, 범죄자에게는 가능한 한 고통을 최소로 줄여야 한다. 이 명제가 근본원칙으로 통용되지 않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정당하게 법을 지킨다고 말할 수 없다. 사회가 구성될 때 사람들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해악만 부담하기로 약정했기 때문이다.

3.4. 사형제 폐지

한 국민의 죽음은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필연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사실이 명백한 경우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국가가 자유를 회복하려는 때이거나 상실할 위기에 처했을 때, 즉 무질서가 법을 대신하는 절대적 무정부상태일 때만 유효하다. 반면, 평온한 시대에 법의 지배를 받는 정부, 국민의 충분한 지지를 받는 정부, 국가의 통합된 소망으로 승인된 정부, 내부와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정부에서는 어떤 이유로든 국민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통치자가 집행권을 휘두르더라도, 그리고 돈으로 쾌락을 살 수 있지만 권위는 살 수 없는 국가에서도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는 없다.

사형은 우리를 더 낫게 한 적이 없는 무익한 형벌로, 사형은 주권과 법의 근간에도 위배된다. 주권과 법은 각 개인의 사적 자유 중 가장 작은 부분을 합산한 일반의지일 뿐인데, 여기서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권리를 타인에게 부여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각 개인의 가장 작은 자유를 희생하여 만든 주권과 법이, 모든 선 가운데 가장 큰 생명을 앗아간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사형이라는 형벌은 어떤 논리로도 허용될 수 없다. 사형은 공공의 선에 필요하지 않고 유용하지도 않은 파괴행위이며, 국가가 한 명의 국민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다.

형벌의 가혹함은 관중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정도이면 충분하다. 형벌은 범죄자가 아닌 국민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형벌이 정당화되려면 타인의 범법행위를 억제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가혹성만 갖추기만 하면 된다. 더군다나 범죄자의 끔찍한 죽음은 순간적인 공포를 유발시키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인간을 살펴보면, 인간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고통의 강렬함이 아니라 고통이 지속되는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광신 때문에, 또 어떤 이들은 저승까지 따라다니는 허영심 때문에, 혹은 비참한 삶을 멈추기 위해 죽음을 대담하고 덤덤하게 바라보기도 하나, 그러한 사람들도 사슬과 족쇄, 몽둥이와 철장 속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여기서 이들의 절망은 불행의 끝이 아닌 시작처럼 보인다.

따라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짐 나르는 가축 같은 신세가 되는 형벌을 받고, 이로써 사회에 끼친 피해를 복구하는 본보기로 삼는 편이 유사한 범죄를 저지하는 효과가 훨씬 더 크다. 구경꾼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범죄자가 남아 있는 여생을 이처럼 비참한 상태로 살리라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어둠 속에서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훨씬 더 강력한 억제책이다. 범죄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대가로 자신의 자유를 영구적으로 상실해도 좋다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신노역형은 사형 못지않게 범죄를 의도하는 자를 제지하는 데에 필요한 엄격함을 갖고 있다. 아니, 더 많이 갖고 있다. 그는 범죄의 불확실한 성공 가능성과 범죄의 결실을 즐길 짧은 시간을 자신이 겪을 고통스러운 불행과 비교할 것이다. 그의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잘못으로 계속해서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은, 처형이라는 형벌보다 훨씬 더 큰 인상을 줄 것이다.

또한 사형은 사람들에게 잔혹함의 본보기를 제공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사회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비록 전쟁의 격정이나 불가피함이 사람들에게 동족의 피를 흘리도록 가르치지만, 인류의 잔혹함을 억제해야 할 법마저 야만성의 본보기로 이를 더 증폭시켜서는 안 된다. 사법적 살인은 공식적으로 신중하게 집행되기 때문에 더욱 해롭다. 살인자를 찾아내어 처벌하는 법이, 살인을 방지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은, 일의 이치에 맞지 않다. 사형집행인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경멸과 분노를 읽을 수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국외적 안전을 책임지는 군인과 마찬가지로, 국내의 보안을 책임지는 사형집행인을 공공의 의지를 실행하는 자이자 사회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선량한 국민으로 느껴야 되지 않은가? 하지만 그에 대한 인간의 수치스러운 감정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 까닭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모두 어떤 원초적인 천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개인의 삶은 누군가의 권력에 따라 합법적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세상을 주관하는 필연성만이 이를 지배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4. 평가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은 이탈리아에서 출간하자마자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1765년 프랑스어판이 나온 데 이어 1800년까지 23개의 이탈리아어판, 14개의 프랑스어판, 11개의 영어판이 나왔으며, 네덜란드, 스페인, 덴마크, 그리스, 러시아, 일본을 비롯해 22개국의 국어로 번역되었다.

베카리아는 자신의 생각이 당시 법체계에 비판적이어서 논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정부의 반발을 우려해 익명으로 『범죄와 형벌』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의 책은 크게 호평받았다. 러시아 군주인 예카테리나 2세는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했고, 미국 헌법 제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후 정부가 이 책을 승인한 것이 명확해지자 베카리아는 이 책을 실명으로 다시 출판했다.

이 책은 출간 즉각 유럽 전역을 강타했다. 당시 법률학자들은 베카리아의 글을 환영했고, 러시아 군주를 비롯한 유럽 황제들은 그의 원칙을 따를 것을 맹세했다. 하지만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베카리아의 주장을 납득한 동시대인은 거의 없었다. 토스카나 대공국이 세계 최초로 사형을 폐지했을 때조차 그 이유는 사형의 효용성이 부족하다는 베카리아의 주장을 따른 것이었을 뿐 국가에 시민을 처형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범죄와 형벌』에 감명 받은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1766년에 이 책에 대한 해설서를 썼다. 볼테르는 이 책을 계몽주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저서라고 평가하며 '우리의 정신을 치유하는 치료법'으로 격찬했다. 볼테르의 종교적, 철학적 관용은 베카리아에게 영향을 주었고, 볼테르 역시 베카리아를 통해 기존의 가혹하고 모순적이며 자의적인 법제와 관행을 막을 제도적 원리를 확인했다.

5. 영향

6. 여담


[1] 14년 후인 1774년 테레사 블라스코가 병으로 사망하자, 베카리아는 안나 데이 콘티 바르나바 바르보와 두번째로 결혼했고, 아들 1명을 낳았다.[2] pugno의 복수형이 pugni. '주먹'이라는 뜻이다. 동사로 쓰일 때 '싸우다', '주장하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이런 이름을 채택한 까닭은, 계몽주의자로서 비이성적 제도, 불합리한 관습과 싸우겠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