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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13 16:27:33

최은희(언론인)

최은희
崔恩喜
파일:최은희기자.jpg
출생 1904년 11월 21일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연남리
사망 1984년 8월 16일 (향년 79세)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학력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니혼여자대학 사회사업학부 (중퇴)
와세다대학 법과 수료 (통신강의과정)
중앙대학교 명예문학박사
가족 남편 이석영, 2남 1녀
활동 조선일보
여권실천운동자클럽대표
대한부인회

1. 개요2. 생애
2.1. 초반2.2. 3.1 운동2.3. 일본 유학2.4. 최초의 여기자2.5. 말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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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언론인. 호는 추계(秋溪).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기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언론인이다.

2. 생애

2.1. 초반

1904년 11월 21일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연남리 301번지에서 탐진(耽津) 최씨 최병규와 달성(達城) 서씨 서덕경 사이의 5남5녀 중 5녀로 태어났다. 소학교에 다닐 당시 달걀숟가락에 얹은 상태로 달리는 달리기 시합이 있었는데, 최은희는 숟가락에 모래를 담고 그 위에 달걀을 얹어 달걀을 떨어트리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총명함을 알아본 아버지 덕분에 그녀는 해주의 의정여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여기서 당시 학감 최두현, 교무주임 노선형에 의해 일제의 악행을 듣고 민족혼을 기를 수 있었다.

2.2. 3.1 운동

1917년 최은희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당시 박희도[1]가 운영하던 동아리에 가입한다. 이 때 교내에서 수공예품을 만들어 번 돈으로 인천 사창가로 팔려간 한 소녀를 구출하기도 하는 등 선행을 한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졸업반이었던 최은희는 박희도의 지도를 받아 비밀리에 독립선언문을 입수하고 태극기를 만들어 친구들과 함께 3.1 운동에 가담한다. 당시 서울 안의 여학교 중 단체로 만세운동에 참가한 학교는 경성여고보 하나뿐이었다.[2] 그녀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육조 앞 광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파고다공원 앞문으로 나온 대열과 거리의 인파들이 홍수처럼 불어나서 합류하였다. 말을 탄 헌병과 기마 순사들은 말 머리를 이리저리 들이대서 사람들을 헤치며, 손수건을 꺼내 혈서를 쓰는 청년, 손가락을 깨물어 태극기를 그리는 청년들이 이리 번쩍 저리 번쩍 나는 듯이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올린다. 발을 구르고 몸부림을 치고 열변을 토하는 청년들도 있었다. 그 틈에서 우리 여학생들은 기고만장해서 목이 터져라 하고 독립만세를 불러댔다.”(‘최은희 전집 5’)"

최은희는 시위주동자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24일동안 수감되어있다 풀려났다. 그녀는 고향인 황해도 배천으로 내려가 또다시 만세운동을 벌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을 살게 된다. 이후 서울에서도 독립운동 삐라를 뿌리는 등의 행위로 아홉 차례나 연행되었다.

2.3. 일본 유학

1920년 최은희는 일본 유학길에 올라 1922년 니혼여자대학에 입학한다. 일본에서 그녀는 내내 일본 경찰의 감시에 시달렸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해마다 3월 1일이 되면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 한번은 집에 가는 길에 일본 형사가 미행을 하자, 반대 방향으로 이끌어내 스토커로 몰아세우기도 했다.[3] 도쿄 한복판에서도 그녀는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복을 즐겨 입었다.

2.4. 최초의 여기자

파일:997448335A2BBFA71D.jpg
기자 시절 최은희.

1924년 대학 3학년에 재학중이던 최은희는 여름 방학을 맞아 춘원 이광수의 집을 방문한다. 그녀와 친분이 있었던 부인 허영숙은 산부인과를 운영했는데, 한 손님이 진료비를 떼어먹고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한 일이 있었다. 최은희는 다음 날 바로 그 손님의 집으로 달려가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마루에서 냉면을 시켜먹고 낮잠까지 자는 등 대담함을 보였다. 이윽고 손님이 돌아오자 최은희는 돈을 요구했고, 손님은 처음엔 '말도 안되는 돈이다'라며 거부하다 나중에는 금액을 슬슬 올리더니 결국 85원 10전이라는 총액을 다 내놓고 말았다. 이 에피소드로 인해 최은희는 이광수의 눈에 들었고, 이광수는 당시 '부인기자'를 구하는 중이던 조선일보에 최은희를 추천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결국 대학을 중퇴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최초의 여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신출귀몰한 변장 능력으로 스타 기자의 반열에 오른다. 취재를 위해서라면 땟국물이 묻은 행랑어멈의 옷을 입고, 아이를 업고, 무청까지 든 채로 완벽한 변장을 선보였다. 또한 조선일보가 무선전화 시험방송을 할 때 아나운서로 나서기도 했고, 조선 여성 최초로 시구도 했으며, 조선일보 비행사인 신용인의 비행기에 탑승한 뒤 탑승기를 작성하기도 했다. 1925년 7월 한강 유역에서 대홍수가 발생하자 최은희는 조선여자청년회·경성여자기독교청년회·조선여성동우회 등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구호반을 조직하고 기생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이재민들에게 밥을 차려주는 등 구호 활동에도 발벗고 나섰다. 6.10 만세 운동 당시에는 당시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이었던 미와 경부(!)를 미행하여 경찰서 내로 진입, 일경의 대대적인 검거에 대한 보도를 쓰기도 했다.

2.5. 말년

파일:최은희노년.jpg
말년의 최은희.

활발한 기자 생활을 이어가던 최은희는 1930년 7월 7일 일본대학 법과 출신으로 법원에서 근무하던 미창(米倉) 이석영과 결혼한다. 최은희는 결혼 후 신문사를 그만두고 집안 살림에 전념하다가 광복 후에는 여권실천운동자클럽대표가 되어 최초의 관립학교 여교장을 탄생시키는 주역이 된다. 1952년에는 대한부인회 활동으로 ‘어머니날’을 제정케 한다. 1968년에는 3·1운동 여성참가자봉사회장이 되어 서울 동작동에 3·1공원을 건립한다.

최은희는 다섯 권짜리 한국여성개화열전을 남기고 1984년 8월 16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삼호아파트 자택에서 별세했다.[4] 사후 대전 국립묘지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된다. 최은희는 투병 중이던 1984년 5월 5000만원을 조선일보에 기탁했다. 조선일보는 그 기탁금을 바탕으로 '최은희 여기자상'을 제정하여 1984년부터 매년 시상하고 있다.

3. 여담



[1]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훗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한다.[2] 이는 당시 여학생들의 가정이 재력과 문벌 있는 가정이라 독립운동에 관심이 지대했던 이유다.[3] 이때 형사가 '직업상 일이 이런걸 어떡하냐' 라고 하자, '직업을 그만두라' 라는 패기까지 보였다.[4] 이 때 한겨울에도 '기름 한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라고 하여 보일러를 때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집필에 전념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