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강학순(姜鶴順)·최학순(崔鶴順) |
출생 | 1896년 |
함경북도 회령군 풍산면 일리[1] (현 함경북도 회령시 풍산리)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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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최정수(崔正洙)는 1896년 함경북도 회령군 풍산면 일리(현 회령시 풍산리)에서 태어났다.1920년 대한국민회 제1남지방부(第1南地方部) 통신원으로 중화민국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화룡현[2] 및 함경북도 회령군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밀정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해 음력 7월 유봉춘·박준학·황운흥(黃雲興) 등과 함께 밀정 윤달수(尹達壽) 처단에 참여하였으며, 음력 8월 1일에는 회령군 팔을면 창효동(현 회령시 창효리)에서 마을 주민 18명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다음날인 2일에도 회령군 팔을면 원산동(현 회령시 원산리)에서 최태항(崔泰恒)·강기용(姜璣鎔)·최병윤(崔秉淵)·윤영준(尹永俊) 등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차출하겠다는 서약서를 받았다.
그해 8월 20일경에는 이용학(李龍學)·한창준 등과 함께 길림성 연길도 화룡현 사기동(砂器洞)에서 밀정 김덕기(金德基)를 심문하고 부근의 토성산복(土城山腹)으로 연행하여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21년 7월경 체포되었다.
그리고 1921년 12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살인, 강도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이에 공소하여 1922년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본인에 대한 원심 판결이 취소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1년 8월 18일 가출옥한 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