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일보 총편집장 | ||
한문 | 儲安平 | |
한국식 독음 | 저안평 | |
영문 | Chu Anping | |
출생 | 1909년 11월 17일 청나라 장쑤성 이싱시 | |
사망 | 1966년 9월로 추정됨.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
학력 | 광화대학 (영문학 / 학사) 에든버러 대학교 (중퇴) | |
직업 | 정치가, 편집장, 평론가 | |
종교 | 무신론 |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평론가, 편집장, 정치인. 뤄룽지, 장보쥔, 린시링, 천링빙(陳任炳)과 함께 현재까지 중국 공산당에 의해 대우파로 간주되고 있는 5인 중 한 명이다. 중화민국 시기 국민정부의 정책과 장제스의 독재를 여러 차례 비판하다가 탄압받았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신화서점 사장, 광명일보사 총편집장, 9.3 학사 선전부 부부장 등의 직책을 맡았다. 1957년 마오쩌둥이 백화제방(百花齊放)、백가쟁명(百家爭鳴) 방침을 내세우자 이에 호응하여 공산당을 비판했다가 반우파 투쟁으로 인해 '대우파'로 간주되어 탄압받았고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직후 실종되었다.2. 생애
2.1. 초기 경력
추안핑은 1909년 11월 17일 장쑤성 이싱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안인 의흥 저씨는 당나라 대의 시인 저광희(儲光羲) 이래로 오랜 세월 조정에 출사해 이름을 날렸다. 추안핑의 12대 선조 저창조(儲昌祚), 9대 선조 저방경(儲方慶), 8대 선조 저대문(儲大文)이 모두 진사를 맡았다. 그러나 추안핑이 태어날 무렵 저씨는 몰락하여 끼니를 걱정해야 할 상황에 몰렸다.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엿새만에 세상을 떠났고 조모의 양육을 받았다. 아버지는 기방에 틀어박혀 지내는 동안 집안의 재산을 모조리 거덜냈다. 그리고 계모는 친딸만 애지중지하고 그에게는 별다른 애정을 주지 않았다. 추안핑은 훗날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14세 때 조모와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이들 모녀는 둘이서만 밥을 먹었다. 나는 항상 혼자 먹었다. 두부 한 쪽을 며칠에 걸쳐 나눠 먹었다. 설날이 되면 장조림을 한 덩어리 줬다.”
추안핑은 이러한 곤궁한 생활에서 탈피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했다. 그는 강음 남청서원에서 공부했고 1928년 상하이 광화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문학 창작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신월파'의 후발 주자로서 활동했으며, 1929년 루쉰이 편집을 담당한 '번류(奔流)' 잡지에 원고를 제출했으며 '류사(流沙)' 및 '국문주보(国闻周报)' 등 여러 신문에 자신의 글을 게재했다. 또한 1931년엔 정론지 '중일문제 각가론견(中日问题各家论见)'을 편찬하기도 했다.
1932년 광화대학을 졸업한 추안핑은 중앙일보의 편집자를 맡았고 월간 신문 <문학시대>의 주임을 맡았다. 이후 그는 중화민국의 유명 평론가로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
2.2. 정치 평론가
1933년, 추안핑은 난징의 중앙일보 부간 편집인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희극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대략 123편의 소설을 집필했지만, 스스로 문학 수준이 높지 않다고 생각하고 정치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1936년, 추안핑은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를 거쳐 에든버러 대학교에 입학하여 저명한 자유주의 사상가 해럴드 라스키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영국에서 중앙일보의 유럽 주재 기자를 지냈지만 고정 임금은 없고 원고료만 받았다.1938년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중국으로 돌아와 충칭에서 중앙일보의 저술 및 편집인, 푸단대 교수, 중앙정치대학 연구원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국민당의 부패와 독재를 여러 차례 비판했다가 국민당으로부터 여러 차례 정간되는 등 탄압받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충칭을 떠났다. 1941년, 그는 산시성의 국립 란톈 사범학교에 가서 영국의 역사와 세계정치 개론을 가르쳤다. 또한 그는 후난성과 중경의 많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5년 봄, 추안핑은 후난성에서 <중국 조간신문>의 주필을 맡았고 연말에 충칭으로 가서 <객관> 잡지를 편찬했다. 그러다가 1946년 봄 <객관> 잡지사를 떠났고 9월 1일 <관찰> 잡지를 창간해 사장과 편집장을 역임했다. '관찰'은 매주 20만 부를 발행해 국공내전 시기의 유명한 자유 간행물이 되었다. 또한 그는 푸단대 교수를 겸임하여 <비교헌법>, <각국 정부와정치> 등의 교과를 강의했다.
1948년 12월 25일, 장제스는 국민당의 부패와 장제스의 독재를 거세게 비판한 <관찰> 잡지를 압수수색하고 잡지사 임원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7군자 체포 사건 당시 칠군자 중 한 사람으로 꼽혔던 왕자오스(王造時)가 직접 나서서 관찰 임원들을 옹호하고 당국을 압박했다. 또한 1949년 2월엔 미술가 주선함(朱宣咸)을 포함한 여러 지식인들이 '관찰' 임원들을 변호했다. 결국 당국은 이들의 압박에 못이겨 '관찰' 임원들을 풀어줬다. 추안핑은 이런 국민당에 대해 다음과 같은 독설을 날렸다.
"70일 동안에는 아주 작은 오물이었으나 20년 동안에는 큰 오물이 되었고 20년 후엔 완전히 썩어 박살났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관찰>은 복간되었고 추안핑은 게속 편집장을 맡았으나 1950년에 종간시켰다. 관찰이 종간된 후, 그는 신화서점의 부사장을 맡았으며 1952년에 중앙출판총서 발행국 부국장으로 전임하였다. 1954년에는 구삼학사 중앙위원 겸 선전부 부부장을 역임하였고 제1회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도 역임했다. 그러나 몇년 후, 그는 정치탄압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만다.
2.3. 반우파 투쟁의 희생양
1957년 4월 1일, 추안핑은 후차오무(胡喬木)의 추천으로 <광명일보> 총편집장을 맡았다. 그러던 1957년 4월 30일, 마오쩌둥은 천안문 성루에서 민주당파 당직자들을 불러 좌담회를 열어 공산당의 정풍운동을 적극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괜히 비판했다가 탄압받을까봐 나서려 하지 않자, 공산당은 "말을 하는 자는 죄를 주지 않겠다"는 원칙을 재확인 시켜줬다. 이에 추안핑 등 지식인들은 점차 중국공산당에 대해 비판의견을 제시하기 시작했다.1957년 6월 1일,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 공작부에서 소집한 간담회에서, 추안핑은 "마오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드리는 의견"이란 제목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는 "저명한 종파주의와 정당과 대중 사이의 나쁜 관계는 포괄적인 상황이다."라며 이러한 상황은 중앙 정부와 많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백화제방 이후 일반 당원과 하급 간부들은 의견을 많이 냈지만,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들은 아무도 의견을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정부는 이미 일당 천하가 되었고 국무원 부총리를 비롯한 12명 중 당외 인사가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뒤 이 일당 천하에서 사상 문제를 정리한 것이 모든 종파주의 현상의 최종 원인이며 당과 당외 인사 간의 모순의 기본 요소라고 강조했다.
"신중국 성립 후 처음 중앙인민정부의 6명의 부주석 안에 3명, 4명의 부총리 안에 2명이 중공당원 이외에서 임명되어 ‘연합정부’의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부주석이 1명으로 감소한 것은 좋다고 해도, 12명의 부총리에 한 사람의 비당원도 없다. (중략) 전국의 모든 부문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당원을 배치하고, 사람들은 일의 대소를 불문하고 당원의 얼굴을 살펴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에서 천하는 공산당의 것, 즉 「黨의 천하」라는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날, 그의 주장이 실린 글은 <인민일보>, <광명일보>에 게재되었다. 후차오무의 아들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이 글을 읽고 한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한다. 6월 6일, 시중쉰(習仲勛)[1] 국무원 비서장이 당외 인사들을 초청해 좌담회를 열었다. 국무비서관보 노울문(盧郁文)이 모두 발언을 하면서 추안핑의 '일당천하' 비판은 심각한 오류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6월 8일, 마오쩌둥은 본격적으로 반격을 개시했다. 인민일보는 이날 마오쩌둥이 직접 집필한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국무원비서장 보좌 노욱문(盧郁文)에게 보내진 협박장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했다.
"소수의 우파분자는 '공산당의 정풍을 원조하라'라는 이름하에 공산당과 노동자계급의 지도권에 도전하고 거리낌없이 공산당에게 퇴장하라고 외치고 있다. 그들은 이 기회에 편승하여 공산당과 노동자 계급을 전복시키고 사회주의의 위업과 사업을 전복시키려고 하고 있다."
같은 날 중국공산당 중앙은 각 성위에게 <힘을 조직하여 우파분자의 공격에 반격을 준비하는 것에 관한 지시>를 하달했다. 이 지시는 모택동이 직접 쓴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반동분자가 광분하여 공격을 가하고 있다. 일부 좋지 못한 자본가, 좋지 못한 지식분자 및 사회의 반동파가 노동자 계급과 공산당에 미친듯이 공격을 가하고 노동자계급이 지도하는 정권을 타도하려고 하고 있다."
이후 추안핑은 대대적인 비난과 폭로에 시달렸다. 자녀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고, 동료들은 추안핑의 '반공 성향'을 고발했다. 1957년 6월 21일, 추안핑은 9.3 학사의 중앙 상무위원회 제 16 차 확대회의의 말미에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는 대만과 홍콩의 '반동 신문'이 자신의 의견에 환호했을 때 "무거운 느낌을 받았다"라며 자신의 사상적 근원을 진지하게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뤄룽지, 장보쥔과 야합해 반동 그룹을 결성했다는 비난은 오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7월에 열린 제1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제4차 회의에서, 추안핑은 "인민에게 항복한다."라는 제목의 발언을 했고 인민일보에 그의 발언 전문이 실렸다.
그러나 추안핑에 대한 비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57년 11월 12일, '광명일보'의 총편집자였던 추안핑은 광명일보의 사장 장보쥔과 함께 해임되었다. 또한 1958년 1월 18일부터 24일까지 열린 9.3학사 제4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추안핑은 중앙위원, 중앙선전부 부부장에서 해임되었다. 제1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제5차 회의가 1월 31일에 소집되어 저장안평인대 대표 자격을 박탈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추안핑은 '대우파'라는 누명을 쓰고 오랫동안 탄압받았다.
2.4. 의문의 실종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추안핑은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인민일보는 1966년 6월 1일에 '모든 소와 뱀을 소탕하자'는 사설을 발표하며 추안핑을 '소탕'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8월 31일, 추안핑은 규탄대회에 끌려가 여러차례 비판을 받고 강에 투신해 자살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고 9.3 학사로 압송되어 관리대상이 되었다. 일주일 후 집에 돌아온 추안핑은 집에 있던 재산이 홍위병들에게 몰수당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방과 거실이 모두 약탈당했고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휴지조각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추안핑은 절망에 빠진 채 집을 나와 어디론가 향했다.추안핑의 막내 아들 추왕화(儲望華)에 따르면, 9월 중순의 어느날 제9대 중앙조직의 일상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양모(梁某) 여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그녀가 "당신의 아버님은 당신에게 가셨습니까? 그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추왕화는 "아버지는 당신들에게 기소됐잖습니까? 그의 집회를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했지만 나중에 가서야 그들도 아버지가 어디 있는 지 알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1966년 9월 20일, 중앙 통전부는 10월 1일 이전에 추안핑을 찾아 안전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9.3 학사는 간부 한 명을 파견해 가족들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가족들은 추안핑과 왕래했던 친구들을 찾아보고 베이징을 돌아다니며 아버지의 행적을 추적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추왕화의 증언에 따르면, 1968년 여름 어느날 군복 입은 간부가 찾아와 저우언라이의 명을 받들어 공안부, 통전부 등으로 저안평안 전담반을 구성해 전국적으로 안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아버지 사진 몇 장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추왕화는 이들이 손쉽게 사진 정도는 얻을 수 있을 텐데 굳이 가족에게 사진을 달라고 한 것에 의아해했지만, 나중에 이 전담조들은 자신이 아버지와 분명히 선을 긋고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그런 시험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추왕화는 일찍이 아버지가 "자살하고 싶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추안핑은 반우파 투쟁 이후 대외적으론 자신의 죄를 인정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여기지 않았고 비굴하게 굴며 누명을 벗고 싶지도 않았다고 한다. 추왕화는 '뜻'이 실현되지 못하자 굴욕을 참을 수 없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그의 자유주의적 성향을 볼 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추안핑의 실종에 대해 "절에 출가했다", "자살했다", "살해당했다" 등 여러 추측이 제기되고 있지만 현재까지 그의 최후가 어땟는 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추안핑이 실종된 지 16년 후인 1982년 6월 중앙 통전부는 추안핑이 1966년 9월 상순에 집을 떠나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서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3. 어록
- "인민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고 진정으로 민주적인 정치를 실현하려면 오늘날 공산당 통치구역에 살고 있는 인민들에게 공산주의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자유를 허용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가? 공산당 구역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이 공산당에 반대하거나 공산당을 비판하는 발언을 한 적이 없는데, 일본이 자유롭게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신문이 있겠는가?"
-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지금 자유를 쟁취하고 있다고 하지만, 국민당 통치하에서 이 '자유'는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라면 공산당 통치하에서의 자유는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4. 저서
추안핑은 <객관> 주간지를 1946년 11월 충칭에서 창간하고 직접 사설을 집필했다. 그는 국민당 일당 독재에 반대했고 공산당 역시 극단적인 사회주의가 중국에 적합하다는 논리를 인정할 수 없다며 비판을 가했다. 그는 영국의 민주제도를 신봉했고 군대의 국가 방위군화[2]와 민주 헌정 및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민주적인 중국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중산층의 대두를 장려하고 민주정치의 간부가 돼야 한다.특히 자유로운 사상의 대학교수와 저술가 등에 대해서는 그들이 나서서 말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민주국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전한 여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추안핑은 1946년에 창간한 <관찰>에서 객관적인 자유주의적 태도를 계승하고 지식인의 양심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공정한 원칙에 따라 국가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해 폭넓게 자유평론을 펴면서 언론의 힘으로 정부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고자 했다.언론의 힘으로 정부 및 각 방면의 힘을 비판할 수 있는 가장 유명한 자유주의 작가들이 대거 운집해 솔직하고 공정하며 지혜로운 필치로 지식인 독자를 끌어모았고, 판매량은 400대에서 10만 부로 급격히 늘어났다.
- <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1936년)
- <영국풍문록> (1945년)
- <영인법인 중국인>(1948년)
- <영국과 인도>(1940년대)
- <마나스강 간척지역-신강 여단> (1956년)
- <신강의 새로운 모습-신강여행 통신집>(1957년)
- <추안핑 문집> (199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