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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25 19:17:34

카를로스 헤스콕

파일:external/chivethebrigade.files.wordpress.com/carlos-hathcock-5501.jpg
사진 왼쪽의 인물이 카를로스 헤스콕이다. 그가 들고 있는 총은 M21 SWS이다.

1. 개요2. 생애
2.1. 베트남 전쟁2.2. 사고2.3. 퇴역 후
3. 기타

1. 개요

Carlos Norman Hathcock II(1942년 5월 20일 ~ 1999년 2월 22일)

미국 해병대 미군 군사경찰 부사관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한 미 해병대의 전설적인 저격수다. 베트남전 당시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1] 미 해병대 최고의 저격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기록은 금방 경신되었다.[2] 그러나, 그가 먼저 유명세를 탔고, 그가 수행한 임무의 중요도나 난이도가 높았기 때문에 미 해병대의 전설로 남았다. 또한, 1967년 당시 그가 세운 2,286m 저격은 2004년 이라크전 당시 미 육군 제75레인저 연대 2대대 저격수, 브라이언 크레머(Brian Kremer) 육군 병장(SGT)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세계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었다.[3](2019년 현재는 기록이 계속 경신되어 거리기준 세계 7위 참고)

저격술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역저격(hunter-killer)[4]에 누구보다도 뛰어나 공식기록인 93명의 반 가까이를 적 저격수 사살로 채웠다[5]는 놀라운 기록의 소유자다.

2. 생애

미국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태어난 헤스콕은 생계를 위해 어릴적부터 아버지와 함께 22구경 소총으로 사냥을 하며 사격술을 익혔다. 어려서부터 해병이 되기를 꿈꿨던 그는 1959년에 만 17세의 나이로 해병대에 지원 입대했고, 1962년에 결혼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생계형 사냥꾼이었던[6] 그는 곧 해병대 사격대회의 챔피언으로 등극했다. 1966년 미군 군사경찰로 베트남에 파병되었는데, 사격 챔피언이었던 그는 미 해병대 제1해병사단 직할 저격소대 저격수로 차출되어 나중에는 저격소대장직을 맡았다.

2.1. 베트남 전쟁

히스토리 채널 - 북베트남 장군 사살 작전
히스토리 채널 - 아파치 사살 작전

베트남 전쟁 중 그의 공식 사살전과는 93명으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저격수 중 4위에 해당한다. 미국 사살판정기준이 별도의 장교가 사살을 직접 확인해야지만 인정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 사살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아, 총 전과는 300명을 넘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물론, 다른 저격수들도 공식기록보다 비공식 기록이 휠씬 더 높다) 알려진 활약상도 상상을 초월한다. 그중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그 때문에 베트콩들은 헤스콕을 "Lông Trắng", 하얀 깃털(white feather)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이 별명은 위의 사진에서도 보이듯이 헤스콕이 부니 햇에 흰 깃털을 달고 다녀서인데, 이는 곧 유행이 되어 미 해병대 저격수들은 모두 모자에 흰 깃털을 달고 다녔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월맹군은 헤스콕의 목에 개인으로서는 최고금액인 미화 3만달러의 현상금을 걸기까지 했다.

2.2. 사고

1969년 9월 16일 광남성 쭈라이 북서부에 위치한 발디 착륙지점(LZ) 북부의 1번 국도에서 LVT-5 상륙장갑차를 타고 이동 중, 탑승한 상륙장갑차가 지뢰를 밟아 차량이 불타기 시작하자 헤스콕은 부상을 입은 몸으로 탑승한 동료 전원을 끌어냈으나 자신은 큰 화상을 입었고 특히 손을 심하게 다쳐 죽음의 고비에 몰리기도 했다. 심지어 이식할 피부 조직이 부족하여 온갖 동물들의 피부 조직까지 동원해야 될 수준이었다. 이식한 피부도 건조해지면 바로 갈라지고 피가 흘러나왔기 때문에 더운 날씨에 특히나 조심해야 했다. 이때의 공로로 퍼플 하트 훈장을 수훈했고, 30년 후에 다시 은성훈장을 수훈했다.

이후 헤스콕은 강한 정신력으로 재활에 성공한 다음 미 해병대 저격학교 교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1975년부터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해서 화상 후유증으로 중추신경계에 이상을 유발하는 다발성 경화증(MS) 진단을 받았고, 이후 평생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화상의 후유증은 점점 악화되어 1979년 복무 20년을 채우기 55일 전에 해병대 중사(GySgt., E7)로 의병전역했다. 사실 미군이 헤스콕에게 한 방출은 헤스콕을 위한 일이였는데, 당시 미군은 건강 문제로 은퇴하면 100% 장애연금을 받게 되나, 반대로 20년을 채운 후 정상 은퇴할 경우에는 최종 월급의 50% 밖에 받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2.3. 퇴역 후

1979년 의병전역 후 헤스콕은 군이 자신을 쫓아낸 듯한 느낌이 들어 한동안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상어 낚시를 하며 우울증을 극복했고, 경찰이나 네이비 씰 6팀과 같은 군 부대에서 민간인 사격교관으로 근무하다, 1999년에 후유증인 다발성 경화증이 악화되어 만 56세의 이른 나이로 사망했다.

3. 기타


[1] 제2차 세계 대전까지 포함시키면 시모 헤위헤, 바실리 자이체프, 류드밀라 파블리첸코, 마테우스 헤체나우어 같은 대단한 사람들도 있다.[2] 베트남 전쟁 중 미 해병대 최고의 저격수는 척 마휘니(Chuck Mawhinney) 해병대 병장(Sgt.)으로 공식 기록 상 103명을 사살했다. 참고로 베트남 전쟁 중 미군 최고의 저격수는 아델버트 월드론(Adelbert Waldron) 육군 하사로 공식 기록 상 109명을 사살했다.[3] 후술하겠지만, 이 때 사용한 총은 놀랍게도 저격총이 아니라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이었다.[4] 먼저 쏜 쪽에서는 이미 차탄사격에 필요한 정보들(적의 위치, 탄착위치)을 이미 획득한 상태지만, 저격을 받은 쪽은 적 저격수의 위치나 거리정보 등에 대한 정보획득 시간이 필요하고 적의 위치를 확인해야 하는데 섬광도 안 터지고 위장을 해서 안 보이고, 또 해당 정보들을 얻기 위해 머리를 내밀거나 해야 하기에 찾다간 머리에 바람구멍이 날 수 있다. 그래서 적 저격수를 사살할 때 보통 역저격 사살보다 포병, 미사일, 공습 등으로 하는 것이다.[5] 93명이라는 기록은 저격수의 사살확인은 장교가 확인을 해야 인정되는 규정하에서 확인된 것이다. 비공식 사살수는 300명 가까이 될 것이라는 말도 있다.[6] 사실 헤스콕은 가정사가 불행한데 12세에 부모가 이혼하고 헤어지면서 그를 친척에게 맡기는 바람에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다가 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사냥을 하면서 잡은 야생동물을 파는것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7] 처음 시도 때에는 렌즈가 크고 두꺼운데다가 여러 개가 조합되는 방식의 현대식 스코프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총탄이 렌즈를 전부 통과하지 못했다. 두 번째 시도때에는 베트남전 당시의 스코프를 사용해 간신히 성공했다.[8] 사실 이동하는 물체 위에 타서 뭘 사격해서 맞추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이동하는 표적을 쏠 때는 리드샷이라고 해서 탄자가 날아갈 동안 목표가 이동할 지점을 미리 예정 조준해서 사격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이동하는 상황이라면 네거티브 리드샷이라고 해서 내가 움직이는 속도만큼을 빼고 조준해야 하는데, 이동하는 물체에 타고 내가 움직이는 중에 표적도 이동하는 중이라면 더더욱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