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373a3c> 𐰺𐰍𐰖𐰆 : 𐰔𐰆𐰴𐰆𐱅 위구르 역대 카간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742년, 당시 몽골 고원의 패자였던 돌궐 제2제국이 내분으로 약화되자 휘하에 있던 위구르, 바스밀, 카를루크의 세 부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4년 뒤인 744년, 세 부족은 수도 외튀켄을 점령하고 외즈미시 카간을 살해하여 돌궐 제2제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몽골 고원을 차지한 세 부족은 처음에는 바스밀의 수장을 엘레미쉬 카간으로 두고 위구르와 카를루크가 각각 '야브구'를 칭하기로 합의했지만, 얼마 안가 위구르의 수장 쿠틀룩 보일라가 카를루크와 연합하여 엘레미쉬 카간을 살해하고 스스로를 카간으로 칭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이때를 위구르 제국의 시작으로 본다. | |||||||||||
씨족 | 이름 | 치세 | ||||||||||
야글라카르 | 쿠틀룩 빌게 퀼 카간 (咄禄毗伽阙可汗 골돌록비가궐가한) (? Qutlugh Bilge Kül Qaghan) 회인가한 (懷仁可汗) | 744년 ~ 747년 | ||||||||||
야글라카르 | 텡그리데 볼미쉬 엘 에트미쉬 빌게 카간 (英武威遠毗伽闕可汗 영무위원비가궐가한) (𐱅𐰭𐰼𐰃𐰓𐰀⁚𐰉𐰆𐰞𐰢𐱁⁚𐰠𐱅𐰢𐰾𐰋𐰠𐰏𐰀⁚𐰴𐰍𐰣 , Teŋride bolmuš El Etmiš Bilge Qaɣan) 카를륵 카간 (葛勒可汗 갈륵가한) | 747년 ~ 759년 | ||||||||||
야글라카르 | 텡그리데 쿠트 볼미쉬 엘 투트미쉬 알프 쿨뤼그 빌게 카간 (𐱅𐰭𐰼𐰃𐰓𐰀:𐰸𐰆𐱃:𐰉𐰆𐰞𐰢𐱁:𐰃𐰠:𐱃𐰆𐱃𐰢𐱁:𐰞𐰯:𐰚𐰇𐰠𐰏:𐰋𐰃𐰠𐰏𐰀:𐰴𐰍𐰣, Tengrida Qut Bolmish El Tutmish Alp Külüg Bilge Qaghan) 뵈귀 카간 (牟羽可汗 모우가한) | 759년 ~ 780년 | ||||||||||
야글라카르 | 알프 쿠틀룩 빌게 카간 (合骨咄祿毗伽可汗 합골돌록비가가한) (𐰞𐰯:𐰸𐰆𐱃𐰞𐰍:𐰋𐰃𐰠𐰏𐰀:𐰴𐰍𐰣 Alp Kutlugh Bilge Qaghan) | 780년 ~ 789년 | ||||||||||
야글라카르 | 텡그리데 볼미쉬 퀼뤽 빌게 카간 (登里羅沒蜜施俱錄毗伽可汗 애등리라몰밀시합비가가한) (𐰖:𐱅𐰭𐰼𐰃𐰓𐰀:𐰉𐰆𐰞𐰢𐰃𐱁:𐰚𐰇𐰠𐰏:𐰋𐰃𐰠𐰏𐰀:𐰴𐰍𐰣 Ay Tengride Bolmish Külüg Bilge Qaghan) | 789년 ~ 790년 | ||||||||||
야글라카르 | 불명 (回紇六代可汗 회흘육대가한) | 790년(?) | ||||||||||
야글라카르 | 쿠틀룩 빌게 카간 (咄錄毗伽可汗 골록비가가한) (𐰸𐰆𐱃𐰞𐰸:𐰋𐰃𐰠𐰏𐰀:𐰴𐰍𐰣 Qutluq Bilge Qaghan) 봉성가한 ( 奉誠可汗) | 790년 ~ 794/795년 | ||||||||||
795년, 쿠를룩 빌게 카간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신하들이 논의 끝에 당시 재상이었던 쿠를룩을 새로운 카간으로 추대하였다. 쿠틀룩은 야글라카르 씨족이 아니라 에디즈 씨족이었기 때문에 이때부터 위구르 제국의 왕조는 에디즈 가문이 잇게 된다. 야글라카르(𐰖𐰍𐰞𐰴𐰺) → 에디즈(𐰓𐰔)로 씨족 교체 | ||||||||||||
에디즈 | 텡그리데 울룩 볼미쉬 알프 퀼뤽 빌게 카간 (騰里邏羽錄沒密施合祿胡毗伽可汗 애등라우록몰밀시합록호비가가한) (𐰖:𐱅𐰭𐰼𐰃𐰓𐰀:𐰆𐰞𐰍:𐰉𐰆𐰞𐰢𐱁:𐰞𐰯:𐰸𐰆𐱃𐰞𐰸:𐰚𐰇𐰠𐰏:𐰋𐰃𐰠𐰏𐰀:𐰴𐰍𐰣 Ay Tengride Ulugh Bolmish Alp Qutluq Külüg Bilge Qaghan) 회신가한 (懷信可汗) | 795년 ~ 805년 | ||||||||||
에디즈 | 텡그리데 알프 퀼뤽 빌게 카간 (滕里野合俱錄毗伽可汗 등리야합구록비가가한) (滕里野合俱錄毗伽可汗 애덕갈리록몰이시합밀비가가한) | 805년 ~ 808년 | ||||||||||
에디즈 | 텡그리데 쿠트 볼미쉬 알프 빌게 카간 (登里羅沒蜜施合毗伽可汗 애등리라몰밀시합비가가한) (𐰖:𐱅𐰭𐰼𐰃𐰓𐰀:𐰸𐰆𐱃:𐰉𐰆𐰞𐰢𐱁:𐰞𐰯:𐰋𐰃𐰠𐰏𐰀:𐰴𐰍𐰣 Ay Tengride Qut Bolmish Alp Bilge) 보의가한 (保義可汗) | 808년 ~ 821년 | ||||||||||
에디즈 | 텡그리데 울룩 볼미쉬 알프 퀴췰뤽 빌게 카간 (登羅羽錄沒密施合句主錄毗伽可汗 등리라우록몰밀시합구주록비가가한) (𐰚𐰇𐰤:𐱅𐰭𐰼𐰃𐰓𐰀:𐰆𐰍𐰞:𐰉𐰆𐰞𐰢𐱁:𐰚𐰇𐰲𐰠𐰏:𐰋𐰃𐰠𐰏𐰀:𐰴𐰍𐰣 Kün Tengride Ulugh Bolmish Küçlüg Bilge Qaghan) | 821년 ~ 824년 | ||||||||||
에디즈 | 아이 텡그리데 쿠트 볼미쉬 알프 빌게 카간 (愛登里囉汨沒蜜施合毗伽可汗 애등리라골몰밀시합비가가한) (𐰖:𐱅𐰭𐰼𐰃𐰓𐰀:𐰸𐰆𐱃:𐰉𐰆𐰞𐰢𐱁:𐰞𐰯:𐰋𐰃𐰠𐰏𐰀:𐰴𐰍𐰣 Ay Tengride Qut Bolmish Alp Bilge Qaghan) 소례가한 (昭禮可汗) | 824년 ~ 833년 | ||||||||||
에디즈 | 아이 텡그리데 쿠트 볼미쉬 알프 퀴췰뤽 빌게 카간 (登里羅沒蜜施合句主錄毗伽可汗 등리라몰밀시합구주록비가가한) (𐰖:𐱅𐰭𐰼𐰃𐰓𐰀:𐰸𐰆𐱃:𐰉𐰆𐰞𐰢𐱁:𐰞𐰯:𐰚𐰇𐰠𐰏:𐰋𐰃𐰠𐰏𐰀:𐰴𐰍𐰣 Ay Tengride Qut Bolmish Alp Külüg Bilge Qaghan) 창신가한 (彰信可汗) | 833년 ~ 839년 | ||||||||||
에디즈 | 카사르 카간 (㕎馺可汗 압삽가한) | 839년 ~ 840년 | ||||||||||
창신가한 사후인 840년, 내부 권력 다툼에서 밀린 셍귄 퀼뤽 바가는 남시베리아 예니세이 강에 자리를 잡고 있던 키르기스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요청을 수락한 키르기스족은 10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해 위구르 제국의 수도 오르두 발릭을 침공하고 철저히 파괴하였고, 이를 기점으로 위구르 제국은 사실상 멸망하였다. 이후에도 2명의 카간이 더 있지만 이들은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 ||||||||||||
에디즈 | 외게 카간 (烏介可汗 오개가한) | 841년 ~ 846년 | ||||||||||
에디즈 | 에니안 카간 (遏捻可汗 알념가한) | 846년 ~ 84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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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𐱅𐰭𐰼𐰃𐰓𐰀⁚𐰉𐰆𐰞𐰢𐱁⁚𐰠𐱅𐰢𐰾𐰋𐰠𐰏𐰀⁚𐰴𐰍𐰣 (텡그리데 볼미쉬 엘리트미쉬 빌게 카간)Qarlïq qaghan(갈륵가한, 葛勒可汗)
재위기간 (747 ~ 759)
위구르 제국의 2대 카간. 葛勒을 행운으로 의미하거나 백운(白雪) 또는 순결(純潔)을 의미한다고 보는 등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이름은 바얀 초르(마연철, 磨延啜).
2. 생애
747년, 쿠틀룩 빌게 퀼 카간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바얀 초르가 카간 위를 계승하였다. 카를륵 카간은 즉위한 후부터 당나라에 사신을 꾸준히 파견하였다. 751년, 고선지가 이끄는 서역원정군이 이슬람 제국의 아바스 왕조와 탈라스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튀르기쉬의 반란으로 패배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당의 서역 지배권은 실추되었다. 위구르 제국은 이 전투로 타림 분지의 지배와 서역 일대의 오아시스를 경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위구르인이 이슬람 제국과 교역을 맺으면서 중국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다.755년, 양귀비의 양자 안록산이 유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당의 낙양, 장안 등 대도시를 점거하였다. 756년, 이형이 영무에서 당숙종으로 즉위하고 카를륵 카간과 우호관계를 확인하고 군사를 요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카를륵 카간은 우선 그의 딸을 이승채에게 시집 보내면서 수령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와 화친을 청하였고 당나라는 회흘공주를 비가공주(毗伽公主)라고 책봉하였다. [1] 이에 카를륵 카간은 약 4,000명의 군사를 발동해 장안을 탈환하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당나라를 구원하는 대가로 장안에서 다량의 선물을 받았고,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안사의 난을 참조.
756년, 낙양을 수복하기 전에 숙종은 카를륵 카간과 군사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특이한 점은 이 연회에서 카를륵 카간과 광평왕 이숙이 형제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광평왕 이숙은 카를륵 카간에게 바르게 대하였고 이에 카를륵 카간은 기뻐하여 그에게 형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광평왕 이숙과 부원수 곽자의 등이 위구르의 병마를 이끌고 신점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형세가 불리하자 안경서는 업군으로 물러났고 이에 당군은 여세를 몰아 낙양을 공격해 탈환하였다.
758년, 숙종은 조서를 내려 어린 딸 영국공주(寧國公主)를 위구르에 출가시킨다. 이와 같은 당의 조치는 카를륵 카간이 안사의 난을 진압한 점도 있지만, 당과 위구르가 서로 상호연합 관계를 맺는다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전통적으로 한족과 북방민족이 서로 연계하는 사례는 드물다. 이러한 관계는 이미 위구르가 유목 생활에서 농경 정착 생활로 변모해 가면서 중국 문화의 수입과 교역의 필요성이 절대적이었고, 중국으로서도 당시의 군사력이 변방 국가, 특히 위구르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정도로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속될 수 있었다. 어쨌든, 갈륵가한은 영국공주를 카툰(가돈, 可敦)[2]으로 책봉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륵 카간은 사망하였고 영국공주는 순장을 강요받았으나, 자신의 얼굴에 자해를 하여 면하고 귀국하였다. 카를륵 카간의 뒤는 뵈귀 카간이 계승하였다.
카를륵 카간 시기 위구르 영토는 예니세이 강 상류, 추강-탈라스 근교, 내륙 아시아 및 케룰렌을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에 이르렀다. 카간의 아들들은 돌궐 제국에서처럼 야브구와 샤드로 임명되어 제한된 지역에서 일정한 통치력을 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