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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삼니움 전쟁 시기인 기원전 295년, 로마군이 켈트 계열인 세노네스족의 습격으로 궤멸된 전투.2. 상세
기원전 296년 총독으로서 작전을 수행하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는 집정관 루키우스 볼룸니우스 플람마 비올렌스로부터 루카니아에서 소요를 일으킨 평민들을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들어 루카니아로 남하해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비올렌스의 지시에 따라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이동해 또다른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와 합류한 뒤 휘하 병사들을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고 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에게 넘긴 뒤 로마로 귀환했다.기원전 296년 말, 삼니움-에트루리아-움브리아인들이 대군을 편성했고 켈트계 종족인 세노네스족까지 대규모 병력을 파견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다. 로마는 지금껏 수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네 개의 종족 연합군과 맞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로마인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가장 뛰어난 군사령관으로 인정받고 있던 룰리아누스를 기원전 295년도 집정관에 재선임하고, 이례적으로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에트루리아 전선으로 낙점했다. 여기에 비올렌스를 집정관에 재선시켜서 룰리아누스와 함께 하도록 했다. 하지만 룰리아누스는 이를 거부하고, 자신과 오랫동안 함께 한 동지인 푸블리우스 데키무스 무스를 동료 집정관으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이를 받아들이고, 그 대신 비올렌스의 임페리움을 1년 연장해 삼니움에서 작전을 계속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룰리아누스가 로마에 가 있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카메리눔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이 세노네스족의 습격을 받았다. 바르바투스는 방어에 좀더 유리한 언덕으로 군대를 이동시키려 했지만 적에게 포위되어 궤멸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세노네스족은 전사한 로마인의 머리를 말 목에 걸거나 창에 꽂았다고 한다.[1] 다만 바르바투스 본인은 목숨을 건졌다. 룰리아누스는 생존병들을 수습한 뒤 무스의 군단과 합세했다. 이후 에트루리아인, 삼니움인, 움브리아인, 세노네스인으로 구성된 연합군과 센티눔 평원에서 조우하면서 이탈리아의 패권이 갈릴 센티눔 전투의 막이 올랐다.
[1] 리비우스는 카메리눔의 식량 채집원들이 움브리아족의 습격을 받아 패퇴했다는 또다른 이야기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