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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 실롱스키에 | ||||
면적 | 301km² | ||||
인구 | 395,513명[1] | ||||
역사 | 8세기 설립 | ||||
시간대 | UTC+01:00 (GMT)[서머타임] | ||||
링크 | http://www.szczecin.p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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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토비체는 폴란드의 도시이자 폴란드 실롱스키에 주의 주도다. 2017년 기준으로 도시의 인구는 297,000명이지만 주변에 소스노비에츠, 글리비체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많이 붙어 있어 광역권 인구는 약 300만에 달한다.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지배를 받던 19세기 중~후반부터 대규모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그 이후로 고지 실레시아 지역의 중심도시로 남아 있다. 카토비체 광역권인 상부 실롱스크 지역[3]은 바르샤바 일대와 더불어 폴란드 최대의 산업지대로, 특히 석탄 광산이 많고 이 밖에 제철소, 중화학 공업단지도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다.전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본명 카롤 보이티와)의 고향인 바도비체와도 가까운 도시이다.
2. 언어별 표기
폴란드어 | Katowice |
독일어 | Kattowitz(카토비츠) |
3. 인구 추이
카토비체 인구추이 [2000-2019년] | |
2000년 | 330,625명 |
2005년 | 317,220명 |
2010년 | 306,826명 |
2015년 | 299,910명 |
2019년 | 292,774명 |
4. 역사
카토비체 지역에는 실레시아가 실롱스크 공국의 지배를 받던 약 12세기부터 마을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카토비체는 그리 특출난 것이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후 실레시아가 여러 지배자들의 손을 거침에 따라 이 마을을 통치하는 국가도 보헤미아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 순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 통일을 앞두고 산업화에 박차를 가할 때 카토비체는 도시로서 개발되었다.상부 실레시아 지역은 유럽에서 가장 큰 석탄 지대 중 하나인데, 산업 혁명 이전 석탄의 중요성이 적었을 때는 이 지역에서 석탄광산이 거의 개발되지 않았다. 하지만 18세기 중순부터 프로이센은 석탄광산을 조금씩 개발했고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던 19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개발했는데, 카토비체 주변에는 석탄광산이 4개나 있어 광업 노동자들이 카토비체로 몰려들었다. 이에 따라 카토비체는 1865년부터 도시의 지위를 얻어 성장했다. 이후 독일 제국은 석탄이 많이 필요한 제철소들을 다른 곳에 짓지 않고 석탄 산지인 카토비체와 그 광역도시에 많이 세워 카토비체는 다른 상부 슐레지엔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고도로 산업화되었다.
↑ 카토비체의 대 시나고그. 1939년 나치가 파괴했다. 전후 끝내 복원되지 못했다.
독일 제국의 지배기 오버슐레지엔에는 전체적으로 폴란드인이 더 많았지만 이들은 주로 도시가 아닌 교외에 살았기 때문에 카토비체 시의 인구는 독일인이 다수를 점했다. 유대인도 일부 살았는데, 이들은 1900년 도시에 아름다운 시나고그를 세웠다. 1차 세계대전 이후 1922년, 독일의 오버슐레지엔이 주민투표로 분할되면서 카토비체는 신생 폴란드로 넘어갔다. 사실 이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치열했는데, 오버슐레지엔 주민투표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는 이곳을 참고하기 바란다. 폴란드로 넘어간 고지 실레시아 일부에는 자치주인 실롱스크 주가 설치되었고 카토비체는 주도로서 실롱스크 자치의회가 설립되었다. 전간기 카토비체는 폴란드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고 폴란드 정부는 상부 실롱스크의 석탄을 해외로 수출하기 위해 카토비체와 그디니아 간 철도도 연결하면서 지역 경제가 한층 더 성장했다. 또한 폴란드의 다른 주요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카토비체의 유대인 인구도 증가했다.
↑ 전간기 카토비체의 보제 다리(Boże Dary) 석탄 광산.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도시를 방어하던 폴란드군 대부분은 카토비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주요 도시 크라쿠프를 방어하기 위해 떠나면서 소수의 자원병과 폴란드 스카우트의 청소년들이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곧 함락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동안 카토비체는 총독부가 아닌 나치 독일의 직접 지배를 받는 곳으로, 상부 슐레지엔 소관구(Gau)의 주도였다. 나치는 대 시나고그를 완전히 파괴하고 거리와 건물명을 독일어로 바꿨으며 폴란드어 대화조차 금지하는 매우 강압적인 독일화를 진행했다. 도시에 거주하던 약 13,000명의 유대인들은 5km떨어진 바로 옆 도시 소스노비에츠의 게토로 보내졌고, 이곳에 수용된 약 35,000명의 유대인들은 여러차례에 걸쳐 바로 옆 도시인 오시비엥침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졌다.
↑ 소스노비에츠&벵드진 게토 봉기의 지휘관 프룸카 프워트니카.
하지만 이곳에서도 필사적이고 영웅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1943년 8월 마지막 이송 과정에서 소스노비에츠 게토와 근처 벵드진(Będzin) 게토의 유대인 전투단 조직원(Żydowska Organizacja Bojowa, ŻOB)들이 여성 지휘관 프룸카 프워트니카(Frumka Płotnicka)의 지휘하에 나치에 대항한 봉기를 일으켰다. 이 전투단은 1942년 여름 나치가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26만명을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 보낸 후, 남은 유대인들 중 자신들의 운명을 깨달은 이들이 최후의 저항을 위해 만든 조직이다. 이들은 비밀 연락망을 통해 폴란드의 다른 게토에도 조직을 확장했고, 나치의 대규모 이송이나 게토 정리가 있을 때면 필사적으로 저항해 나치를 괴롭혔다.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의 주축도 이들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성공 가능성이 없는 저항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학살당하기보단 전사함으로써 명예롭게 최후를 맞았다. 1943년 말 게토 정리가 대부분 완료되었을 때 조직은 거의 사멸했으나 살아남은 일부 조직원들은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까지 참여해 나치에 맞섰다. 프워트니카가 이끌던 400명의 부대도 치열한 전투 끝에 전멸하고 말았다.
1945년 1월 카토비체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고지 실레시아를 포함한 실레시아 전체는 나치가 상당한 저항을 하며 방어했기 때문에 카토비체에서도 전투가 일어났고 포탄이 많이 쏟아지는 바람에 시가지 상당부분이 파괴되고 말았다. 하지만 바르샤바보단 훨씬 파괴가 덜했기 때문에 전후 복구가 빨랐고 한동안 폴란드 최대의 산업도시로 기능했다.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정부는 다른 공산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중화학 공업 육성에 집중하는 다소 불균형한 경제정책을 폈는데, 덕분에 카토비체는 상부 실롱스크의 다른 도시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공장이 들어서며 더욱 산업화되었다. 또한 1950~1970년대까지 전 세계적으로 제조업 중심의 2차 산업이 융성하면서 카토비체의 석탄 생산도 늘어 1974년에는 피크를 찍었다. 사람들이 도시에 몰려들면서 경제 뿐아니라 다른 분야도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1968년에는 상부 실레시아를 대표하는 실롱스크 대학이 세워졌고 도심지에는 깔끔한 모더니즘 건물들이 들어섰다. 하지만 도시 외곽은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성냥갑들의 공격을 받았다. 한편, 카토비체는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죽은 스탈린을 기린다며 스탈리노그루트(Stalinogród)로 불린 나쁜 기억이 있다.
↑1981년 민주화 시위가 일어난 부예크 광산.
1981년 12월 이 도시에서 폴란드 민주화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 일어났다. 그단스크에서 발원한 솔리다르노시치 운동이 폴란드 전역을 휩쓸자 당시 폴란드 통일노동당(공산당) 지도자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Wojciech Jaruzelski)는 12월 16일 계엄령을 내렸다. 3일 뒤, 카토비체의 부예크(Wujek) 석탄광산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계엄령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는데, 인민정부는 이들을 가혹하게 진압해 9명이 사망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솔리다르노시치가 경험한 첫 유혈사태로, 분노한 솔리다르노시치 노동자들은 희생당한 이들을 기리며 저항을 계속해 결국 1989년 폴란드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현재 부예크 광산의 구 건물에는 거대한 십자가 조형물이 설치되어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공산정권이 붕괴된 이후 카토비체의 2차 산업은 조금 쇠퇴했다. 여전히 원자재인 석탄은 대량 생산되지만 도시의 경제 구조는 조금씩 3차 산업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 도시의 거대한 산업 인프라 덕분에 해외의 투자도 많이 받고 있다.
5. 기타
크라쿠프에서 기차로 1시간 정도만 가면 도착하는 주요도시임에도 카토비체는 도저히 관광도시라고 부를 순 없다.[4] 카토비체 중앙역에서 나오면 오래되고 예쁜건물들이 모인 거리가 조성되어 있는데 서너 블록 정도면 끝나서 그 크기가 작다. 확실히 시간이 많지 않은 배낭여행객들이 방문할 가치는 거의 없는 도시이다. 하지만 폴란드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면 한나절 정도로 둘러 볼 만한 여행지는 있다. 도시 북쪽에는 구 광산 건물을 개조한 실레시아 박물관이 있고 시내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나가 니키쇼비에츠(Nikiszowiec) 구역으로 가면 구 광산 노동자들이 살던 다가구 주택 단지가 있는데, 사실상 카토비체의 유일한 관광지이다.아우슈비츠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거쳐가는 도시이기도 하다. 카토비체에서 출발하는 S8 열차를 타면 오시비엥침까지 50분만에 도착할 수 있다.
독일 제국,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 대규모 산업단지나 광산 주변에는 파밀로크(Familok)라 하는,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거대한 다가구 주택 단지가 들어섰는데 카토비체의 니키쇼비에츠(Nikiszowiec) 구역에는 1908년 독일 제국 지배기 건설된 파밀로크 단지가 잘 남아있다. 당시 중부유럽 산업도시의 구조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인 지역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 후보에 올라가 있다.
Electronic Sports League에서 개최하는 Intel Extreme Masters의 월드 챔피언십 대회를 매년 카토비체의 스포덱 아레나에서 개최한다. 주로 개최되는 종목은 카운터 스트라이크: 글로벌 오펜시브와 스타크래프트 2.
[1] 2023년 6월 30일 기준.[서머타임] [3] 따라서 이 지역을 상부 실롱스크 광역권이라 한다.[4] 애초에 19세기 말엽부터 개발된 곳이니 브로츠와프, 오폴레 등 실레시아 타 지역의 유서 깊은 도시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