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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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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 1945년 7월 6일 이후 제2공화국 망명정부연합국유엔
승인 및 국내 영향력 상실로 인해 폴란드 인민공화국과 대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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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공화국 제6대 대통령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Wojciech Jaruzelski
파일:Gen._Wojciech_Jaruzelski_13_grudnia_1981.jpg
본명 보이치에흐 비톨트 야루젤스키
Wojciech Witold Jaruzelski
출생 1923년 7월 6일
폴란드 루부스키에주 쿠루프
(現 폴란드 루부스키에주 푸와비군 쿠루프)
사망 2014년 5월 25일 (향년 90세)
폴란드 마조비에츠키에주 바르샤바
재임기간 제6대 대통령
1989년 7월 19일 ~ 1990년 12월 22일
서명 파일: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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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22c3f><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미에치스와프 야루젤스키
어머니 반다 자렘바
형제자매 여동생 테레사
배우자 바르바라 야루젤스카
자녀 모니카 야루젤스카
학력 랴잔 고등공수지휘학교 (졸업)
폴란드 참모 아카데미 (졸업)
복무 폴란드 인민군 육군
1943년 7월 ~ 1991년 1월 31일
최종 계급 대장[1] (폴란드 인민군 육군) }}}}}}}}}

1. 개요2. 약력3. 생애
3.1. 제2차 세계 대전3.2. 소련군 징집, 그리고 참전3.3. 종전 이후~냉전
3.3.1. 자유 노조와의 악연3.3.2. 동유럽 혁명
3.4. 퇴임 이후
4. 소속 정당

[clearfix]

1. 개요

폴란드의 제6대 대통령.

노동 운동가였던 레흐 바웬사의 자유노조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독재자이자 민주화된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모순된 타이틀을 갖고 있다. 정적이었던 바웬사와 함께 격동의 폴란드 현대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약력

3. 생애

1923년 루블린 근처 쿠루프(Kurów)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개인 교사를 통해 홈스쿨링을 한 터라 초등학교는 따로 다닌 적이 없으며, 1933년부터 바르샤바 비엘라니구 소재의 성모 마리아 수태회가 운영하는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학비는 가계에 심히 부담이 되었고 부모가 르부프 근처의 히루프 예수회 중학교와 리다지나 중학교로 전학가는 것도 고려한 적도 있었으나 1939년에 중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학교 졸업시험도 통과한다.

3.1.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나치 독일소련폴란드를 분할 점령하자 야루젤스키와 그의 가족은 리투아니아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40년에 리투아니아마저 스탈린에 의해 소련에 강제합병당하자 그의 가족은 총독부 지역으로 복귀하려 했으나 국경을 넘으면 가족끼리 서로 헤어질까 걱정됐던 어머니는 리투아니아에 잔류하기로 한다.

1941년 6월 14일, 가족은 전부 시베리아로 추방당했고 보이치에흐 자신은 여동생과 어머니와 함께 투로차크에서 살면서 알타이 산맥의 타이가 숲에서[3] 벌목으로 생계를 이었고, 이 과정에서 눈에 반사된 빛에 의해 광각막염에 시력이 손상되어 이후 평생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다.

아버지는 크라스노야르스크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1941년 가을에 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4]이 체결되면서 그제서야 수용소에서 석방될 수 있었고, 폴란드 대표단이 위치한 비스크로 이동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소식을 들은 나머지 가족들은 지역 NKVD의 감시를 피해 투로차크를 벗어나 아버지와 합류하기로 결정, 1942년 1월에 비스크에서 나머지 가족들과 아버지가 재회하게 된다.

이후 야루젤스키의 가족은 비스크의 고리키 거리 51번지에서 생활했고, 보이치에흐는 산림 개간사업 이후 빵집에서 짐꾼으로 일했다. 이때 NKVD의 임시 신분증 발급을 거부하자 3주동안 체포당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지역의 어업회사에서 카트 운전사로 일했으나 1942년 6월 4일에 사망하였고, 비스크의 묘지에 묻히게 되면서 보이치에흐가 가장으로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5]

3.2. 소련군 징집, 그리고 참전

1943년 5월에 입영대상자로 발령났으나 사관후보생으로 간주되어 7월까지 대기발령되었다.

1943년 7월 19에 다시 발령받아 랴잔에 위치한 폴란드 동부군 제1보병사관학교에 입교하였고, 1943년 12월 16일에 소위로 임관한다.[6]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소총소대 소대장으로 보임한 이후 1944년 5월부터 기마정찰 소대의 소대장이 되었고, 폴란드 제1군의 진격로를 따라 7월 말에는 자신의 고향인 쿠루프 근처의 비스와 강을 건너면서 본격적인 전투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이후 바르샤바 봉기에서 반군을 지원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10월에 부상을 당했으나 폴란드 인민군 최고사령부 명령 제59호에 따라 11월에 중위로 진급한다.

같은 해 11월에 중위로 진급 후 폴란드 동부군 제2사단에 배속되어 바그라티온 작전, 스투지안키 전투에 참여, 1945년 1월 바르샤바 전투에서는 비엘라니구 방향으로 수도에 입성하였다.

이후 비스와-오데르 공세 과정에서는 야루젤스키가 속한 제5보병연대가 4월 중순에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도달하였고, 야루젤스키는 이틀 뒤에 상위로 진급하였다.

1945년 5월 3일에는 엘베 강에 도달했고, 닷새 뒤에 독일이 항복하자 연대는 나우엔 북동쪽으로 자리를 옮겼고, 야루젤스키는 6월에 베를린에 머물렀고, 7월 1일에 나이세 강을 건너 폴란드로 귀국한다.

3.3. 종전 이후~냉전

이렇게 주요 전투에서 여러 무공을 세운 야루젤스키는 그 능력을 인정받아 종전 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성립되자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폴란드 인민군 내에서 계속 진급하여 1960년에는 수석 정치장교가 되고 1968년에는 국방장관의 자리에 올랐다. 1970년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를 사임시키는데 성공적으로 관여하여 1972년에는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3.3.1. 자유 노조와의 악연

1980년~1981년에 걸쳐 레흐 바웬사의 주도로 설립된 자유노조 솔리다르노시치가 폴란드 전역에서 돌풍을 불러일으키며 폴란드 내에서 자유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 와중이던 1981년 2월 11일 야루젤스키는 수상 자리에 올랐다. 폴란드 통일노동당 제1서기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는 협상에 나서 바웬사와 그단스크 협정을 맺었다가 당내의 격렬한 반발로 인하여 1980년 9월 5일, 일방적으로 심장병 환자 선고를 받고 9월 6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해임당했다. 이 과정에서 야루젤스키는 기에레크의 실각과 새로 스타니스와프 카니아의 제1서기 취임을 지지하였다.

그 공으로 1981년 3월, 총리에 선출되었으며, 그의 임명안은 85%의 지지 속에서 통과되었다. 야루젤스키는 부총리로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자유적인 신문인 《폴리티카(Polityka)》의 편집장으로 활동해온 미에치스와프 라코프스키를 임명하여 바웬사와 협상하게 했으며 바웬사에게 3개월 간의 파업 모라토리엄을 제안하였다. 계속된 파업으로 인해 폴란드 여론도 상당히 지친 상태였고, 자유노조는 이 제안을 수락하였다.

1981년 3월 4일, 야루젤스키와 카니아는 크렘린으로 소환되었다. 브레즈네프와 소련 정치국은 야루젤스키와 카니아가 가톨릭과 깡패 떨거지들에게 지나치게 무르게 대처한다고 질책하였고,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이용한 침공을 운운하였다. 여기에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꼽사리 끼어서 폴란드에 대한 개입을 주장했다. 야루젤스키 본인은 이후 인터뷰#에서 당시의 계엄령 선포 및 자유 노조 탄압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브레즈네프 독트린에 따라 소련이 1956년 헝가리 혁명이나 1968년 프라하의 봄 때처럼 폴란드에 무력 개입할 의사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으며 개혁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1985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페레스트로이카를 단행할 때 야루젤스키는 그의 강력한 우군 중 하나이기도 했다. #
1981년 계엄 선포 당시의 폴란드
소련을 간신히 설득시킨 야루젤스키는 1981년 10월 16일부터 10월 18일까지 진행된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카니아를 해임하고 184명의 참석자 중 180명의 찬성표를 받아 새로운 제1서기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2월 13일 야루젤스키는 전격적으로 폴란드 전역에 계엄령을 발령하고 구국군사평의회(Wojskowa Rada Ocalenia Narodowego·WRON)를 설치, 자유노조 지도자과 가톨릭 신부 등 민주화 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으며 1983년 10월에는 자유노조를 완전히 해산했다. 레흐 바웬사도 이때 가택 연금을 당했다. 이로 인해 거의 2년 간에 걸친 폴란드의 자유화 바람은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야루젤스키는 폴란드 국민들의 증오를 받았으며 레흐 바웬사의 질긴 민주화 투쟁도 계속 이어졌다.

어쨌든 자유노조는 이후 10년 가까이 가혹한 탄압을 받았으며 야루젤스키는 이 시기 당 서기장과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3.3.2. 동유럽 혁명

1989년에 들어서면서 동유럽 전체에 자유화 분위기가 고조되고 그 첫 주자는 바로 야루젤스키가 지도자로 집권하고 있던 폴란드였다. 자유노조가 다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여 1989년 2월 6일부터 4월 15일까지 공산당과 자유노조 간 원탁회의가 열려 역사적인 자유 총선 실시[7]가 합의되었다. 같은 해 6월 4일과 18일에 상하원 선거가 열렸고 상원에서 자유노조가 선거 대상인 100석 중 99석을 가져가는 초압승을 거두었다.

국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직에는 원탁회의 합의에 따라 야루젤스키가 7월 19일 대통령에 선출되어 민주화된 폴란드 제3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찬성 270표, 반대 233표였고, 합의에 따라 34명이 기권하여 다소 아슬아슬한 결과였다. 야루젤스키는 바웬사에게 자유노조 측에 산업부, 보건부, 환경부, 건설부 장관직과 부총리를 주는 대신에 대연정을 실시하자고 제안했으나 이미 승기가 확실했던 바웬사는 다수의 민중의 지지를 받는 세력에 정권을 이양하는 것만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이를 거부했다.

이러한 전개에 반발한 통일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1989년 7월 21일, 야루젤스키를 제1서기에서 해임하고 라코프스키를 새로운 제1서기에 선출하였다. 하지만 라코프스키 외에는 후보가 없었음에도 반대표가 41표나 나오는 등 당의 분위기는 이미 어수선하였다. 결국 바웬사는 더 이상 통일노동당과의 대화를 거부하였다. 야루젤스키도 악수를 두었는데, 그는 내무장관 체스와프 키슈차크 장군을 총리로 임명하였다. 이에 레흐 바웬사는 키슈차크가 차라리 대통령에 출마했다면 지지했겠지만, 총리로는 지지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이어 레흐 바웬사는 공산주의자 없는 정부를 선포, 야루젤스키를 완전히 몰락시켰다. 키슈차크는 내각을 구성하지도 못하고 8월 14일에 쫓겨났고 바웬사는 8월 17일, 야루젤스키에게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를 새 총리로 임명하라고 지시했다. 최후의 발악으로 라코프스키가 8월 22일,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를 걸어 소련의 개입을 요청했으나, 고르바초프가 소련이 폴란드에 내정간섭하는 모양새가 된다고 거절하면서 그마저도 물건너갔다.

이미 실권은 개혁파로 완전히 넘어갔고, 개혁의 지연과 옛 공산권 세력 잔류에 불만을 품은 개혁파들은 야루젤스키에게 조기퇴임 압력을 넣었다. 1990년에 이루어진 완전한 자유 지방선거에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자유노조가 승리했고, 더불어 통일노동당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국방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자리까지 자유노조로 넘어갔다. 야루젤스키는 10월에 결국 자유노조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대통령 임기를 리셋하는 헌법 수정(amendment)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대통령에서 퇴임했으며, 이에 따라 임기 5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수정이 이루어졌다. 수정된 헌법에 따라 11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통해 레흐 바웬사가 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3.4. 퇴임 이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ojciech_jaruzelski_2006.jpg
2006년 당시의 모습
1991년 야루젤스키는 군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이후 2001년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회민주주의자로 전향했다고 밝혔으며 스스로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념임을 인정했다. 사실 1980년대 이전의 경력만 봐도 전통적 스탈린주의를 신봉하는 낌새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1970년 항쟁에서 기에레크를 지지했기에 딱히 자유노조를 탄압할 스탠스라고 상상도 못할 수준이기는 했다.

2006년 공산당 서기장 재임시절 벌어진 인권 탄압에 대한 재판이 열렸으나 야루젤스키의 지병으로 인해 재판은 중단되었다. 야루젤스키는 2014년 5월 25일 타계했다. 그는 바르샤바 근처에 있는 군인 묘지인 포봉스키(Powązki)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19세기초부터 조국을 지키다 전사한 폴란드 군인들의 묘지인 포봉스키 공동묘지에 묻기로 한 결정에 항의도 상당했다.

그의 재임시절 탄압을 받은 바웬사와 다른 자유노조 지도자들은 그에 대한 평가에 대해 '오직 신만이 아실 것'이라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4.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기간 비고
폴란드 노동당 1944 - 1948 -
폴란드 통일노동당 1948 - 1990 -


[1] 한때 원수 계급 수여가 추천됐으나 본인이 고사했다고 한다.[2] 병과대장 중 하나로 대한민국 국군 중장에 대응.[3] 비스크에서 약 300㎞ 떨어진 곳.[4]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폴란드 망명정부-소련 사이에 체결한 협정.[5] 이후 회고록에 따르면 수의를 못 구해서 아버지 시신을 프라우다 신문에 싸서 장례를 치러야 했다고 한다.[6] 당시 성적이 우수한 인원은 중위, 나머지 인원은 소위로 임관했는데 야루젤스키는 평균 성적이었다고 한다.[7] 공산당(통일노동당) 의석을 제외한 일부 의석 한정. 진짜 완전 자유 총선은 1991년 실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