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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1 00:57:52

캔디즈

キャンディーズ
캔디즈 | Candies
파일:캔디즈.png
<colbgcolor=#de284f><colcolor=#fff> 데뷔 1973년 9월 1일
(데뷔일로부터 [dday(1973-09-01)]일, [age(1978-04-04)]주년)
해체 1978년 4월 4일
장르 가요
레이블 파일:cbs sony logo.png


1. 개요2. 멤버3. 활동
3.1. 해체 선언과 마지막 콘서트
4. 음반5. 여담

[clearfix]

1. 개요

캔디즈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3인조 아이돌 그룹이다. 멤버 란(ラン), 스(スー), 미키(ミキ)는 10대 소녀의 순수하고 발랄한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워 큰 인기를 얻었으며, 노래와 춤,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아우르는 '아이돌 활동'의 기본 형태를 만들었다.

2. 멤버

파일:MiKi.png
파일:RaNn.png
파일:ShuU.png
미키
1955. 01. 13.
([age(1955-01-13)]세)
1956. 1. 15.
([age(1956-01-15)]세)
1956. 04. 08. ~
2011. 04. 21. (향년 55세)
본명 이토 란(伊藤蘭). 애칭이 바로 란(ラン)이다. 리더로서 대부분의 무대에서 센터를 맡았다.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함께 데이트하고 싶은 여자친구'의 이상형으로서 당시 일본 남성들에 절대적 인기를 구가했다.
1989년 배우 미즈타니 유타카와 결혼했다. 캔디즈 해산 후에도 영화, 연극, 솔로가수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2023년에는 캔디즈 50주년을 기념해서 제74회 NHK 홍백가합전에 출장하였다.[1]
본명 후지무라 미키(藤村美樹). 애칭은 미키(ミキ)이다. 무대에서 주로 왼쪽 자리를 맡았다. 미키(ミキ)는 귀여운 동생 같은 친근한 매력으로 사랑받았다. 캔디즈 멤버 중 가장 음악적 감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산 후에는 잠시 솔로 가수로 복귀했으나 결혼 후엔 대중 노출이 없다.[2]
본명 다나카 요시코(田中好子). 애칭은 스(スー)이다. 리더 란이 "여자 친구" 이미지라면, 스는 상대적으로 차분하고 지적인 분위기로 '결혼하고 싶은 여성'으로 인식되었다. 데뷔 당시에는 무대에서 센터를 맡았으나 본격적인 활동 직후 오른쪽 자리를 맡게 되었다.
캔디즈 해산 후에는 연기자로 전향, 영화 및 드라마 출연 등 연예계 활동을 이어왔다.
2010년 십이지장 궤양에 몸이 약해져 재발한 유방암의 급속한 전이로 결국 2011년 사망하였다.[3]

3. 활동

1972년 4월 NHK "가요 그랜드쇼"의 마스코트 걸로 발탁된 세 멤버는 '너무 귀여워서 먹어버리고 싶은 소녀들'이라는 의미로 '캔디즈'라는 이름을 얻었다. 기획사 와타나베프로에 의해 발탁, 1973년 9월「あなたに夢中」 로 데뷔했고, 당시 가창력이 뛰어난 최연소 멤버 스가 메인보컬을 맡았다.

기획사는 캔디즈의 인기 전략을 분석하며, 특히 매력적인 누나 이미지인 란의 팬층이 남성 비율이 높고 연령대가 폭넓다는 점에 주목했다. 1975년 "연하의 남자아이(年下の男の子)"에서 란을 센터로 내세워 오리콘 9위라는 첫 top10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하루이치방(春一番)" 등 연속 히트곡을 내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인기 절정기에도 예능 프로그램 8시라구! 전원집합 등에 꾸준히 출연하며 친근한 이미지를 유지했다. 특히 란의 헤어스타일은 '란 컷'이라 불리며 유행했다.

같은 시기 핑크레이디와 경쟁 구도로 비교되었으나, 실제로는 경쟁자가 아닌 동료로 지냈다. 핑크레이디의 폭발적 판매량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예능 대응력과 활동의 다양성, 중고생·대학생 팬층의 열성적 지지를 바탕으로 70년대 말 아이돌 씬을 이끌었다.

3.1. 해체 선언과 마지막 콘서트

인기 절정기의 갑작스러운 해체 선언에 이어진 고라쿠엔 구장에서의 해산 콘서트가 전설이 되었다.

1977년 여름, 인기 절정의 캔디즈가 히비야 야외음악당 콘서트에서 소속사와 사전 협의 없이 해체를 선언했는데, 멤버들은 눈물로 팬들에게 사과했고, 특히 란의 "평범한 여자아이로 돌아가고 싶다"(普通の女の子に戻りたい!!)는 발언은 당시의 유행어가 되었다.

발표한 해체는 6개월 연기되어 1978년 4월 4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캔디즈의 마지막 콘서트 '파이널 카니발'이 개최되었다. 5만 5천명의 관객이 운집한 가운데 5시간동안 52곡을 부른 이 공연은 여성 가수 최초의 스타디움 콘서트였으며, 당시 가요계 최대 규모의 쇼로 평가받았다.

4. 음반



5. 여담



[1] 캔디즈로 1975~1977년에 3회 출장한 이래 46년 만의 출장[2] 후술할 스(スー)의 장례식에서 멤버 란과 함께 잠깐 매체에 등장[3] 이 때 임종을 가족들과 더불어 캔디즈 멤버들이 함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