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 술탄국 술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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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탈리아 해변에 있는 케이휘스렙의 동상
기야스 앗 딘 케이휘스렙
페르시아어, 아랍어 : غياث الدين كيخسرو بن قلج ارسلان
영어 Ghiyāth ad-Dīn Kaykhusraw ibn Kilij Arslān
튀르키예어 I. Gıyâseddin Keyhüsrev
1차 재위 1192년 8월 ~ 1196년
2차 재위 1206년 ~ 1211년 6월 17일
1. 개요
룸 술탄국의 6대 술탄. 1차 즉위 후 동로마 제국 7년 간의 망명을 경험하며 그 체계를 파악한 후 1206년 복위하였다. 4차 십자군 후의 혼란을 틈타 니케아 제국과 대립하였고, 안탈리아를 점령하여 룸 술탄국의 첫 지중해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비록 1211년 옛 은인 알렉시오스 3세와 함께 니케아 제국을 침공했다가 테오도로스 1세에 패하여 전사하였지만, 이미 룸 술탄국의 상승세를 확보해 둔 후였다.2. 생애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11 아들들 중 막내로, 동로마 제국 귀족 출신 모친에게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정진하였고, 특히 외국어에 능하여 튀르크어 및 페르시아어 외에도 아랍어와 그리스어를 구사하였다. 3차 십자군 후의 혼란기에 부왕을 도와 형 쿠트브 앗 딘의 반란 진압에 나서며 후계자로 낙점되었고, 악사라이 포위 도중 부왕이 사망하자 계승하였다.3. 1차 재위와 망명
즉위 직후 케이휘스레브는 필라델피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축출된 동로마 귀족 테오도로스 마카파스의 망명을 받아주었다. 다만 얼마후 알렉시오스 3세가 거금과 함께 그의 안전을 보장하자 동로마로 인도하였다. 1196년 형 루큰 앗 딘 쉴레이만샤가 반란을 일으켜 콘야로 진격해오자 케이휘스레브는 친분이 있던 동로마 조정으로 망명하였다.알렉시오스 3세의 환대를 받은 그는 주요 귀족 중 하나인 마누일 마우로조미스의 딸과 결혼하였고, 일설에 따르면 세례까지 받았다 한다. 망명 중 케이휘스레브는 자신의 처지를 (본인 이름의 유래가 된) 샤나메에서 망명 생활을 겪는 인물 잠셰드에 빗대었다 한다. 1203년 알렉시오스 3세가 4차 십자군을 피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출하자 케이휘스레브 역시 장인 마누일을 따라 에게해의 섬으로 도피하였다.
4. 2차 재위
1204년 쉴레이만샤 2세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클르츠 아르슬란 3세가 계승했다는 소식을 접한 케이휘스레브는 마누일과 함께 콘야로 향하였다. 비록 클르츠 아르슬란 3세의 부탁을 받은 테오도로스 1세가 그들을 체포했지만, 극적으로 탈출한 케이휘스레브는 지지 세력을 모아 조카를 죽이고 술탄으로 복위하였다. 케이휘스레브는 자신을 도운 장인 마누일을 지원하여 그가 라오디케아 (데니즐리) 일대에 공국을 세우게 도왔고, 아미르로 봉하였다. 내부를 안정시킨 케이휘스레브는 4차 십자군 후의 혼란을 틈타 정복 활동에 나서 1207년 니케아 제국에게서 아탈리아 (안탈리아)를 점령, 룸 셀주크의 지중해 진출로를 확보하였다.내부를 다지느라 룸 셀주크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던 테오도로스는 1209년, 장인이자 전임 황제 알렉시오스 3세가 당도하여 양위를 요구하자 거부하였다. 이에 알렉시오스는 콘야로 향하여 룸 술탄의 개입을 청하였고, 이에 호응한 케이휘스레브는 7천여 병력을 모아 니케아 제국의 실질적인 수도인 스미르나 (이즈미르)를 향해 출정하였다. 이에 테오도로스는 라틴 기사들을 포함한 2천 병력을 맞섰고, 1211년 6월 트랄리스 (아이든) 부근에서 벌어진 메안데르의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케이휘스레브는 승기를 잡았으나 테오도로스와의 1대1 대결에서 전사해버리며 전투는 니케아 측의 역전승으로 귀결되었다. 사후 장남 케이카우스 1세와 차남 케이쿠바트 1세가 연이어 계승하여 룸 셀주크의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