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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10:45:17

코라니 러요시

파일:Korányi Lajos.jpg
이름[1] 코라니 러요시크로넨베르거
(Korányi Lajos-Kronenberger)
생년월일 1907년 5월 15일
사망년월일 1981년 1월 29일 (향년 73세)
국적 파일:헝가리 국기.svg 헝가리 인민 공화국
출신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세게드
포지션 풀백
신체조건 182cm | 74kg
소속팀 바슈처 FC (1927-1930)
페렌츠바로시 TC (1930-1938)
푀부스 FC (1938-1939)
넴제티 SC (1939-1940)
WMFC 체펠 (1940-1941)
로손치 AFC (1941-1943)
국가대표 40경기 0골 (1929-1941)
감독 로손치 AFC (1941-1943)
케치크메티 AC (1946-?)
야스베레니 (1947-1948)
톰퍼이 SE (1948-?)
세크세라르디 에피퇴크(1951)
미슈콜치 VSC (1952-1954)
서르버시 트락토르 (1955)
센테시 키니지 (1957-?)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클럽4.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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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코라니는 고향 세게드를 연고로 하는 우이세게디(Újszegedi)에서 축구를 배우다 바슈처(Bástya)로 팀을 옮겼고 그 곳에서 프로 선수로 데뷔했다.

코라니는 바슈처에 있던 3시즌동안 기량을 키워 당시 헝가리에서 최고급 수비수로 성장했고 1930년에 페렌츠바로시 TC로 이적, 폴가르 줄러 등과 단단한 수비 라인을 구축했다. 리그 전승 우승의 기록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의 일.

하지만 1933년 10월에 입은 다리 골절로 코라니는 한동안 명단에서 빠져야 했다. 이후 팀에 복귀한 코라니는 페렌츠바로시의 1937-38 시즌 우승과 1937년 미트로파 컵 우승에 힘을 보탰다.

코라니는 푀부스에서 뛰던 시기에 동생이 뛰던 프랑스로 이적을 추진하려 했고 거의 성사될 뻔 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이적이 엎어졌다.

2.1.2. 국가대표

코라니는 1929년 4월 14일, 스위스를 상대로 처음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헝가리는 난타전 끝에 스위스를 5대4로 제압했다.

그는 비로 샨도르와 헝가리 대표팀에서 든든한 풀백 라인을 구축했지만 1933년의 부상으로 인해 대표팀을 3년 반이나 비워야 했다. 이는 곧 코라니가 1934년 월드컵에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1937년 4월에서야 다시 헝가리 대표팀에 복귀한 코라니는 다시 비로와 호흡을 맞췄고 결국 1938년 월드컵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코라니는 비로와 함께 준결승전까지 3경기를 모두 뛰었고 헝가리는 월드컵 우승에 마지막 한 경기를 남겨 놓았다. 하지만 헝가리의 코칭스태프는 전술적 이유로 코라니 대신 폴가르 줄러를 선택했고 결과는 2대4 패배였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1941년 4월 6일에 있었던 독일전으로 헝가리는 독일에 무려 7골을 실점, 0대7 대패를 당했다.

코라니는 대표팀에서 40경기에 출전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코라니는 뛰어난 운동 능력에 기반한 공중볼 경합에 강점이 있었고 수비시 위치 선정도 좋았다.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1] 헝가리 출신 인물은 성+이름의 조합으로 이름을 표기하고 항목명도 그에 따랐다. 다만 인터넷 검색을 하려면 서양식으로 이름+성의 순으로 검색하는 게 더 찾기 쉽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