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9-02 02:37:09

코모도로리바다비아

Comodoro Rivadavia
코모도로리바다비아
<colbgcolor=#dddddd><colcolor=#000> 지리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dddddd><colcolor=#000> 국가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부에노스아이레스
광역자치단체 추부트주
하위 행정구역 산호르헤 만
시간대 한국과 12시간 차 }}}}}}}}}
인문 환경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dddddd><colcolor=#000> 인구 201,854명[기준]
인구 밀도 370명/km²
면적 566,81km²
기후 추운 스텝 기후(BSK) }}}}}}}}}

1. 개요

아르헨티나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남부 45도선 남쪽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약칭은 코모도로이다.

2. 역사

코모도로 리바다비아는 1901년 2월 23일, 아르헨티나 해군 기지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코모도로는 파타고니아 남부의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되었고, 육지와 해상을 연결하는 보급 기지로서 역할을 하기 위해 도시가 형성되었다. 도시의 이름은 19세기 아르헨티나 해군 제독인 마르틴 리바다비아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코모도로는 아르헨티나 이민 장려 정책에 따라 유럽 이민자들이 정착하였다. 특히 1903년 제2차 보어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의 탄압을 견디지 못한 600가구 보어인 가족이 코모도로로 이주하였다. 이는 아르헨티나 정부가 이 곳으로 이주한 보어인들에게 농경지를 공짜로 제공해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 부족으로 인해 농경지는 잘 개발되지 않았다. 그래서 물을 찾기 위해 시추를 했지만, 발견 된 것은 물이 아니라 석유였다. 하지만 모든 광물 매장지가 국가에 속하도록 규정한 아르헨티나 법 때문에 석유는 국가의 차지가 되었고, 보어인들은 사르미엔토와 주변 지역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농장을 세웠다.

1907년 석유 발견은 코모도로 리바다비아의 경제 성장을 촉진시켰다. 석유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국가 차원의 관심과 투자가 집중되었고, 1922년에는 국영 석유회사 YPF(Yacimientos Petrolíferos Fiscales)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이로인해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기반 시설이 정비되었으며, 코모도로 리바다비아는 남부 아르헨티나의 핵심 도시로 자리잡게 되었다. YPF의 공기업 체제 아래 강력한 노동조합이 형성되었으며, 1940~50년대에는 페론주의 운동과 연결된 정치적 활동이 활발해졌다. 1960년대에는 YPF 노동자들의 파업이 자주 일어났으며, 이는 도시의 정치적 긴장을 높였습니다. 특히 군사 독재 정권는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많은 활동가들을 탄압하였다. 국제 석유 가격 변동과 함께 국가의 석유 정책 변화는 지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코모도로는 아르헨티나 군사 작전의 중심지였는데, 공항은 아르헨티나 공군의 격납고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패배하자 군부의 퇴진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1992년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YPF는 민영화되었고, 다국적 석유 기업들이 지역에 진출했다. 민영화 이후 해고된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실업자 운동(piqueteros)이 등장하였고, 이는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중요한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1998년 12월, 국제 유가가 11.34달러로 떨어지면서 코모도로의 상황은 악화되었고, 민간 기업들은 운영의 수익성 부족으로 인해 대량 해고에 나섰다. 그래서 시정부는 파타고니아의 강한 바람을 이용한 풍력 발전소 및 풍력 터빈 공장을 세우거나 어획물을 가공하기 위한 산업 인프라를 갖춘 자유무역지대를 세우는 등 수입 다각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 수입 다각화는 결실을 맺아 2010년 이후 아르헨티나에서 빈곤 수준이 가장 낮은 4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3. 경제

이 도시가 처음 생겨났을 당시에는 소규모 항구 활동, 어업, 농촌 활동에 주력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양 사육이었다. 그러나 1907년 석유가 발견되면서 코모도로의 경제는 활황이었다. 그래소 국가 석유 수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루에 46,000 m3가 채굴되며, 이는 아르헨티나 원유 생산량의 46%를 차지한다.

4. 여담


[기준]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