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27 16:00:10

크리스티나 여왕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60a42 0%, #a80d53 20%, #a80d53 80%, #860a42);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문쇠 왕조 스텐실 왕조
에이리크 6세 올로프 3세 아눈드 3세 에문드 2세 스텐실
<rowcolor=#fff> 스텐실 왕조
에리크 7세 할스텐 스텐실손 아눈드 4세 호칸 뢰데 잉에 1세
에리크 8세
블로트 스벤 잉에 1세 필리프 할스텐손 잉에 2세 랑발드
<rowcolor=#fff> 스텐실 왕조 스베르케르 왕조 에리크 왕조 스텐실 왕조 스베르케르 왕조
망누스 1세 스베르케르 1세 에리크 9세 망누스 2세 칼 7세
<rowcolor=#fff> 에리크 왕조 스베르케르 왕조 에리크 왕조 스베르케르 왕조 에리크 왕조
크누트 1세 스베르케르 2세 에리크 10세 요한 1세 에리크 11세
<rowcolor=#fff> 스베르케르 왕조 에리크 왕조 폴쿵 왕조
크누트 2세 에리크 11세 발데마르 망누스 3세 비르예르 망누손
<rowcolor=#fff> 폴쿵 왕조 메클렌부르크 왕조 칼마르 동맹
망누스 4세 알브렉트 마르가레타 에리크 13세 크리스토페르
에리크 12세
호칸
<rowcolor=#fff> 칼마르 동맹 바사 왕조
칼 8세 크누트손 크리스티안 1세 요한 2세 크리스티안 2세 구스타브 1세 바사
<rowcolor=#fff> 바사 왕조
에리크 14세 요한 3세 시기스문드 칼 9세 구스타브 2세 아돌프
<rowcolor=#fff> 바사 왕조 팔츠츠바이브뤼켄 왕조
크리스티나 여왕 칼 10세 구스타브 칼 11세 칼 12세 울리카 엘레오노라
<rowcolor=#fff> 헤센카셀 왕조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
프레드리크 1세 아돌프 프레드리크 구스타브 3세 구스타브 4세 아돌프 칼 13세
<rowcolor=#fff> 베르나도테 왕조
칼 14세 요한 오스카르 1세 칼 15세 오스카르 2세 구스타프 5세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칼 16세 구스타프 }}}}}}}}}
<colbgcolor=#a80d53><colcolor=#ffffff>
스웨덴 바사 왕조 제7대 국왕
크리스티나
Kristina
파일:Queen_Christina_(Sébastien_Bourdon)_-_Nationalmuseum_-_18075.tif.jpg
이름 크리스티나 알렉산드라
(Kristina Alexandra)
출생 1626년 12월 18일
스웨덴 스톡홀름 트레 크로노르[1]
사망 1689년 4월 19일 (향년 62세)
교황령 로마
장례식 1689년 6월 22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재위 스웨덴 왕국의 여왕
1632년 11월 16일 ~ 1654년 6월 16일[2]
아버지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어머니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엘레오노라
종교 루터교가톨릭
서명 파일:크리스티나 여왕 서명.svg
1. 개요2. 생애3.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스웨덴 바사 왕조의 마지막 국왕.

2. 생애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왕비 마리아 엘레오노라의 딸.

구스타브 2세의 자녀 중에서 장성할 때까지 살아남은 이는 크리스티나뿐이었고, 구스타브 2세도 1632년에 뤼첸 전투에서 전사하자 7살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크리스티나는 비록 어렸지만 다행히 요한 바네르(Johan Banér), 레나르트 토르스텐손(Lennart Torstensson), 악셀 옥센셰르나(Axel Oxenstierna)와 같은 중신들이 보좌를 맡아[3] 30년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스웨덴은 포어포메른을 포함한 발트해 연안에 거점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1638년에는 훗날 델라웨어주가 되는 지역의 북쪽에 식민지 포트 크리스티나가 세워졌으나 이 식민지는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1651년에 네덜란드 공화국에게 빼앗겼다.
파일:external/www.lefrancofil.com/dispute-reine-christine-vasa-rene-descartes.png
이미지 오른쪽 테이블에서 첫 번째. 왼손을 든 사람이 국왕이다. 데카르트는 M자 머리 남자 왼쪽에 있다.

나이를 먹어 친정을 시작한 크리스티나는 르네 데카르트와 같은 유명한 학자와 예술가를 스웨덴으로 초빙해 문화 발전에 힘쓰는 한편 페르 브라헤 백작을 핀란드로 보내 오보, 헬싱포르스, 타바스테후스, 빌만스트란드 등 주요 도시들의 인프라를 확충하였다. 또한 1640년에는 오보에 핀란드 최초의 대학교인 오보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미혼이었던 여왕의 배우자 문제가 거론되고, 크리스티나도 어릴 때부터 부왕의 방침에 따라 남장을 자주 한 점도 있어서 결혼에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국교인 루터교회가 아닌 가톨릭에 심취하였다. 결국 크리스티나는 1654년에 사촌 오빠인 팔츠츠바이브뤼켄클레부르크 궁정백 카를 구스타프에게 양위한 뒤, 1655년 성탄절 전날에 브뤼셀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로마에 정착해 여생을 보내다가[4] 1689년에 사망했으며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자녀가 없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쪽 친척들은 가톨릭교도여서 계승권이 없었기에[5], 스웨덴 바사 왕조는 크리스티나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여담으로 데카르트를 스웨덴으로 초빙하기도 했는데 데카르트의 수명이 단축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데카르트는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했고 늦잠이 습관이었는데, 크리스티나는 데카르트가 자기 발로 찾아오도록 좋게 모셔온 것도 아니고 군함을 보내 반강제로 끌고 오다시피 한 주제에 새벽 5시부터 철학 강의를 시작하라[6]고 요구했다. 데카르트도 별 수 없는 노릇이라서 요구대로 강행했다. 그러나 억지로 생활습관을 바꾼것과 맞물려 과로로 체력이 소진된데다가 추운 스웨덴 기후에 몸이 상하여 오래지나지 않아 폐렴으로 앓아놓게 되었고 결국 초청 1년 만에 세상을 뜨게 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급작스럽게 퇴위를 하여 스웨덴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고, 퇴위하는 시점에서 가지고 나간 궁중의 수 많은 보석과 재화들을 모두 탕진할 정도의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퇴위 이후 외사촌오빠의 아들 칼 11세가 재위하던 시절까지 스웨덴 궁중에 손을 벌리는 등 자기밖에 모르는 행위를 통해 스웨덴이라는 국가의 문화를 중흥시켰을지는 몰라도, 차후 정통성에 직결되는 왕조의 단절과 국가 방향성을 안 좋은 쪽으로 정해버린 평가를 받기도 한다.

여담으로 퇴위 후 6촌인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의 퇴위로 공위가 된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무산되었다.

3. 매체에서

파일:Queen_Christina_1933.jpg}}} ||
실제로 피멘텔은 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음에도 크리스티나의 측근이 되면서 염문이 돌았다. 그러나 크리스티나의 퇴위 직후에 결투로 죽진 않았고, 왕위를 버린 뒤에도 세계 정세에 관여하던 크리스티나를 향후 몇 년간 보조했으며, 이후엔 스페인의 외교관으로 계속 일했다.
파일:The _Abdication_1974_Liv Ullmann.jpg}}} ||
실제로 당대에 이 둘 사이에 대해서도 염문이 돌았는데, 크리스티나가 보낸 편지에 애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구절이 있기도 하다.


[1] 현재 스톡홀름 왕궁의 전신.[2] 대관식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 열렸다.[3] 모후 마리아 엘레오노라는 정신질환 때문에 정사는 커녕 양육에서조차 배제되었다. 크리스티나 여왕의 어린 시절을 돌본 사람은 고모였던 카타리나 공주(칼 10세 구스타브의 어머니)였다.[4] 생활비는 크리스티나의 명의로 된 스웨덴 영지에서 해결했다.[5] 애초에 할아버지인 칼 9세가 본인의 자손들만 계승권을 갖도록 못박아서 요한 3세의 폴란드 바사 왕조는 스웨덴 왕위 계승권이 없었다. 다만 폴란드 바사 왕조는 계속 스웨덴 왕위를 주장하다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얻어 맞고서 1660년에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6] 크리스티나의 기존 스케줄을 망가뜨리지 않고 시간을 내려면 비는 시간대가 그때밖에 없었다.[7] 로마가 추가될 때는 범용 모델을 쓰다가, 북방의 사자 패치로 전용 모델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