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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13:03:54

타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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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서산조
(1771 ~ 1788)
<rowcolor=#FCE774> 황제
태덕제
꾸이년 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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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서산조
(1798 ~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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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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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귀인조 초대 황제
泰德
타이득 | Thai Duc
파일:태덕제 완문악.jpg
서산교장 전봉장군
대월국 서산왕
서산 초대 황제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제호 중앙황제(中央皇帝)
왕호 서산왕(西山王)
연호 태덕(泰德, 1778년 ~ 1793년)
공치제 민제 (1778~1790)
꽝쭝 (1788~1792)
깐틴 (1792~1793)
작위 서산교전봉장군(西山校前鋒將軍)(정주)
성씨 호(Hồ, 胡) / 응우옌(Nguyễn, 阮/완)
반냑(Nhạc, 文岳/문악)
부모 아버지 호비복
어머니 완전
생몰년도 ? ~ 1793년
재위 기간 1778년 ~ 1793년

1. 개요2. 생애
2.1. 내력과 출생2.2. 서산 봉기2.3. 완씨 토벌2.4. 가정 쟁탈전2.5. 정씨 정벌2.6. 동생과의 갈등2.7. 여조의 멸망2.8. 완복영의 침공2.9. 조카의 배신과 사망2.10. 사후의 모욕
3. 평가4. 참고 항목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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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월 떠이선 왕조의 초대 황제이자 분열 서산 귀인조(朝)의 유일한 황제. 본래 징세리[1]였다가 농민봉기를 일으켜 광남국찐씨 정권을 붕괴시킨 후 동생들을 제후에 책봉해 외형상 대월 통일을 완성한다.

이후 동생 완혜와 영토의 통치권을 두고 잠시 내분에 처했지만 곧 화해하고 떠이선 왕조를 부춘과 귀인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분할통치를 확립하였으나 둘째 동정왕을 몰아내고 가정을 점령한 광남국의 후예 완복영의 총공격으로 자신의 조정이 멸망 위기에 몰렸다가 지원군으로 도착한 조카의 배반으로 모든 땅을 빼앗기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 그의 조정은 부춘의 제후국으로 전락한다. 연호인 태덕(泰德)을 따서 태덕제(泰德帝) 또는 생전 자칭 제호(帝號)인 중앙황제(中央皇帝)라 불린다.

2. 생애

2.1. 내력과 출생

파일:떠이선 삼형제.jpg
서산 봉기의 주축인 떠이선 삼형제
가운데가 태덕제, 오른쪽이 동정왕, 왼쪽이 광중제이다.

본래 그의 집안은 응우옌(阮)씨가 아니고, 호(胡)씨였다. 완씨 삼형제의 4대조 호비강(胡丕康)은 원래 찐씨 정권 아래에 있는 응에안(Nghệ An)에 살았지만 정완전쟁때 호비강은 완군에게 포로로 잡혀 서산읍으로 귀양당했다. 완주의 왕 완복빈은 그를 서산채주(西山寨主)로 임명했고 호비강의 후손들은 그 작위를 세습하다가 완씨 삼형제의 아버지 대인 호비복(胡丕福) 때 수원현(绥远县)쪽으로 이동했다. 완씨 삼형제는 모두 그곳에서 태어났고 또한 맏이인 호악도 아버지의 서산채주 지위를 물려받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 완씨 삼형제의 가정은 지주의 관직을 세습했고, 부유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래서 평범한 농민의 반란이 아닌 서산읍리의 하층 관리의 봉기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부패해가던 대월을 갈아엎은 것은 변함이 없고 완혜가 명군이란 점엔 아무런 반론이 없으며 초기의 서산이 농민의 고통을 이해했다는건 확실하다.

완씨 삼형제는 앞서 말했듯 완씨가 아닌 호씨였으며, 삼형제는 어렸을 때부터 계몽사상을 배웠기에 혁명을 꿈꾸게 되었고 삼형제의 아버지 호비복 역시 초헌(焦獻)의 제자였다. 장문행(張文行)의 아들인 초헌은 원래 성이 장(張)씨인데, 그의 아버지 장문행은 무능하고 부패한 권신 장복만에게 살해당해 가족인 자신도 화를 입을까 두려워 안태읍(安泰邑)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호비복과 그의 아들들인 완씨 삼형제를 가르쳤으며 그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언젠간 부패한 대월을 혁명으로 일으키도록 조언하였다.

2.2. 서산 봉기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떠이선 농민 운동
, 광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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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악은 상인일을 하는 중, 안양산(安陽山)을 지나 칼 하나를 얻었는데, 호악은 이 칼을 신비로운 칼이라며 소수민족인 상족(尙族)을 선동하여 광남국 내에서 반란을 일으키게끔 선동하기도 했다. 이후 징세리로 일하게 된 호악은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학정, 있따른 자연재해로 농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이 걷은 세금을 농민들에게 뿌렸고 그렇게 지명수배가 찍혀 한동안 도적으로 살았다.

이후 1771년 농민들을 결집해 광남국 조정을 공격, 승리하여 장복만과 무능한 완왕 완복순을 실각시키고 정치적 목적으로 성을 호씨에서 광남국의 국성인 완(阮)씨로 바꾸었다. 또한 민심 확보를 위해 관리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뿌렸다. 완악의 봉기는 대규모 봉기로, 여러 농민들과 참파의 여왕 씨화(氏火)도 완악을 지원했다. 현지 백성들은 완악의 봉기군을 황손군(皇孫軍), 광남국의 군대를 국부군(國傅軍)이라며 구분하였다.

이어서 완악은 귀인성까지 점령하기 위해 꾀를 써서 부하들에게 자신을 죄수처럼 압송시키듯이 하여 귀인을 관리하던 순무 완극선(阮克宣)이 완악을 옥에다 집어 넣었다가 밤이 되자 서산군이 몰려오자 완극선은 도망가고 완악은 풀려나 귀인까지 점령해 그곳을 서산당의 근거지로 삼았다.

2.3. 완씨 토벌

파일:완악의 도성 터.jpg
완악의 도성 터

한편 북방의 실질적인 통치자 정삼광남국의 반란을 알게되자 1774년 황오복을 보내 광남의 간신 장복만을 친다는 명분으로 광남을 공격했다. 광남 내에선 장복만이 곧 명분이였다는걸 알자 그를 잡아다가 정군에게 갖다 바쳤으나 정삼은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철군하지 않았다. 황오복의 군대는 광남의 수도이자 서산의 근거지가 되어 버린 부춘을 함락했고 완왕 완복순은 광남영(廣南營)으로 도주했다. 농민봉기와 정주의 침입 중 농민봉기가 일어난 이유, 즉 민심을 달래기 위해 완복순은 친척 완복양을 세자로 책봉했고 완복양은 황오복에게 저항 준비를 갖췄다. 이와 동시에 서산군도 귀인에서 출발해 광남영까지 가려 하였다.

정군이 광남으로 진격한다는걸 알게된 완악은 완복양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그를 회안(會安)으로 맞이한 다음 후군(後軍)을 자처하여 이아집(李阿集)을 선봉에 두고 이재(李才)를 중군(中軍)에 두어 정군을 막았다. 하지만 패배하여 정주에게 광남을 빼앗기고 완복순은 가정으로 도망가 다시 재기를 꾀했다. 완주의 신하 송복흡(宋福洽)이 군대를 이끌고 경화성 일대[2]를 수복, 참파여왕 씨화를 죽인 다음 부안성(富安省)을 공격했다. 완악은 자신이 멸망 직전의 광남국과 정주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껴있다는 사실을 알고 압박을 덜기 위해 반문세(潘文歲)를 보내 황오복과 강화조약을 맺어 정씨(곧 여씨 왕조)에 충성을 맹세하고 정삼은 완악을 1775년 전봉장군(前鋒將軍) 및 서산교의 장(西山校長)에 봉했다.

완악이 정주와 평화협정을 맺고 멸망 직전의(형식상으론 자신의 주군격인) 광남의 완복양에게 자신의 딸 수춘(富春)을 바치고 완주의 장군 송복흡에게 거짓으로 투항하여 당분간은 광남의 부춘 수복을 도왔다. 항복 소식에 그것이 진짜인지 송복흡이 사람을 보냈는데 진짜 완악이 완복양을 주군 모시듯 하자 그걸 믿고 완악을 믿었다. 광남 세력의 서산에 대한 경계심이 없어지자 완악은 동생 완혜에게 기습공격을 명했고 완주를 완전히 멸망시키자 패한 송복흡은 잔병을 거느리고 운봉(雲峰)으로 도망갔다.

정주군은 전염병으로 이미 철군한 상태였고 자연스럽게 이 일대는 서산이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1776년 완악은 완여에게 명하여 완씨 세력의 마지막 영토인 가정성을 공격해 잠시동안 점령하고 완복순은 도주했지만 완주의 장수 두청인이 완여를 몰아내고 완여는 가정의 물품만 일부 약탈했다가 결과적으론 점령에 실패하고 돌아온다. 하지만 완악은 남부의 땅 대부분을 차지했고, 도빈성(闍槃城)을 지은다음 서산왕(西山王)으로 칭왕하였다. 이전에 패해 붙잡힌 완복양을 십탑사(什塔寺)에 감금했으나 탈출했고 가정으로 도망가자 이재가 서산에게 반기를 들고 완복양을 신정왕(新政王), 완복순을 태상왕으로 옹립했다.

이듬해인 1777년, 정삼은 완악을 광남진수(廣南鎮守). 선위대사(宣慰大使), 공군공(恭郡公)에 책봉했다. 완악은 다시 두 동생을 불러 가정을 공격했고 배반한 장수 이재는 전사했으며 완복순은 금구성(金甌省). 완복양은 영륭성(永隆省)으로 도망갔으나 완혜의 추격병에게 사로잡혀 두 완왕을 비롯한 완씨 일족은 참수당해 멸족당한다. 이로써 광남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했으나 완복양의 4촌 완복영은 살아남아 도망쳤고 완복영은 각국에 군사를 빌려 서산과 항쟁한다. 그리고 이전에 완주에게 항복한 청나라 사람 막구(鄚玖)의 아들 막천사는 하선진(河仙鎮)을 완주의 제후격으로 다스리고 있었는데, 막천사 역시 서산에게 항전했다. 서산군이 그에게 투항을 요구했지만 거부했다.이후 막천사는 항전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자 시암으로 도주했고 주인이 빈 하선진을 점령한다. 완여, 완혜군은 귀인으로 돌아가 가정으로 돌아갔다.

1778년 완악은 도반성(闍槃城)에서 이전의 칭왕과 더불어 황제만 쓸 수 있는 연호를 태덕(泰德)이라 개원해 떠이선 왕조를 건국한다. 그리고 둘째 동생 완여를 절제(節制), 막내 완혜를 용양장군(龍驤將軍)에 봉한다.

2.4. 가정 쟁탈전

파일:가륭제(세조).jpg
평생의 숙적 완복영(가륭제)

서산조는 이미 광남국을 멸망시켰지만 그 일족 완복영은 왕조 재건을 위해 여전히 활동하고 다녔다. 완혜와 완여가 북쪽으로 돌아간 뒤 용천(龍川)에서 완복영이 거병했고 두청인, 여문균(黎文勻), 완문홍(阮文弘), 송복광(宋福匡), 송복량(宋福樑)등 구 완씨를 지지하는 파벌들도 거병하여 동산(東山)군을 이루었다.

완복영은 단번에 가정을 탈환하려 했고 동산군의 뛰어난 지휘로 가정성을 비롯한 번안진(藩安鎮), 변화진(邊和鎮), 정상진(定祥鎮), 영청진(永清鎮), 하선진(河仙鎮) 일대를 수복했고 서산군도 여러 차례 남진하여 공격했으나 완복영에게 패했다. 완복영이 재건한 광남은 세력이 회복되기 시작하고 평순부를 무너뜨렸으며 연경부까지 위협, 옛 영향력을 회복할 기미를 보여겼다. 그러나 두청인이 횡포를 부리다 완복영에게 처형당하자 동산군이 서로 배반하는 등 혼란에 빠졌는데, 서산은 다시금 기회를 잡게 된다.

1782년 완악과 완혜는 수병, 보병 3천명을 거느리고 남진하여 가정성을 침공한다. 칠기강에서 완복영의 군대와 교전했고 이 전투에서 완복영은 프랑스인 마뉴엘이 서양의 배를 이끌고 완복영을 도왔으며 응우옌 왕조때 편찬된 가정성통지(嘉定城通志)에 따르면 완혜가 칠기강에서 완복영과 교전했고 한 차례의 수상 격전이 일어나자 적병(적군의 병사로 완혜를 말한다)이 바람을 타며 돛을 달고 곧장 돌진하자 아병(완복영)은 순식간에 무너져버렸고 서양의 군대는 싸움을 거부하자 완혜군은 그 배들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패배 직전의 완복영을 평순절제(平順節制) 존실유(尊室裕)가 완복영을 지원하러 와 서산군을 제거한 다음 그 서산군의 지휘관인 범언(范彥)을 죽였다. 그리고 청나라인으로 구성된 화의군(和義軍)은 모두 변발을 했는데 완악은 광남과 완주를 지원해 가정을 공격한 화의군에 깊은 증오를 느꼈고 가정이 함락된 후 서산군은 변발한 자들을 학살했다. 1만 여명의 중국인 화교들이 처형당해 시체가 강물에 버려졌고 가정은 다시 서산조로 편입되었다.

한편 완조의 잔존 세력인 동산의 두한칩(杜閑蟄)은 곧 부안(富安)에서 군사를 이끌고 완복영을 지원하여 서산에게 저항하였다. 1783년 완악은 완여, 완혜, 장문다(張文多)를 파견해 완복영을 격파했고 부국도에 몰아냈다. 완복영은 포기하지 않고 프랑스 선교사 피뇨에게 도움을 청하는 한편 주문접을 보내 시암에도 도움을 요청헤 라마 1세에게 2만여명의 병사와 전함 300척을 얻어내 가정을 수복하려고 했다. 시암군이 가정 일대를 공격하자 서산의 장문다는 완악에게 지원을 청했고 완혜가 병사를 이끌고 서산군을 몰아낸다. 이 전투에서 완복영의 수하인 주문접(朱文接)이 전사했고 서산군은 완복영의 본거지인 부국도를 공격했고 완복영은 측근 몇 명만 데리고 시암으로 망명한다.

2.5. 정씨 정벌

완복영의 세력을 몰아낸 뒤, 완악은 정씨가 차지하는 순화 일대를 공격했다. 형의 명을 받은 완혜가 출병해 순화를 공격하고 순화의 범오구(范吳俅)를 처형한 뒤, 완혜는 완유정의 조언에 따라 북벌을 감행해 승룡(하노이)을 함락하여 정주를 붕괴시켰다.

귀인에 있던 완악은 동생이 무단으로 북벌을 감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춘으로 사람을 보내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완혜의 행군이 더 빨라 완악의 사신이 부춘에 이르렀을 땐 완혜가 승룡을 함락했다는 소식만이 전해졌고 완악은 동생이 북쪽 땅을 점령해 자립할 것을 우려하여 급히 친위병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했다. 황제 소통제는 완혜를 정주의 부(府)에서 살게 했고 완악이 그제서야 도착하자 완악은 소통제의 북쪽 땅의 통치권을 마지못해 인정하고 소통제는 서산조에게 수군(數郡)을 할양하려 했으나 완악은 거절했고 모든 일이 끝나자 완악과 완혜는 다시 남하했다.

2.6. 동생과의 갈등

파일:완악의 옥새와 주장.jpg
완악의 옥새와 주장(奏章)[3]

완혜가 정주를 멸한 후, 1788년 완악은 귀인에서 중앙황제(中央皇帝)를 칭했다. 둘째 완여를 동정왕(東定王)에, 막내 완혜를 북평왕(北平王)으로 봉해 부춘을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곧 완혜와 완악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대남정편열전초집·위서열전(大南正編列傳初集·偽西列傳)에 의하면 완악은 황제가 된 후 날마다 폭정을 일삼았으며 공신 완장(阮樁)[4]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또한 정씨를 토벌하는 전쟁에선 이익은 동생 완혜가 차지했고, 그렇게 생각한 완악이 완혜에게 땅 일부를 줄 것을 요구했으나 완혜는 거절했다. 완혜 역시 광남을 원했으나 완악에게 거절당했으며 사이가 뒤틀어지자 완악은 완혜의 처첩까지 간음해 완혜를 분노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결국 완혜는 형 완악의 죄상을 열거한 뒤 완악을 공격해 인성(仁城)을 점령했고 귀인성 밖 토산(土山)의 대포로 완악의 귀인성을 공격했다. 완혜군의 포탄 공격은 맹렬했고 전투가 격해지자 완악은 울면서 성루에 올라가 외친다.
皮鍋煮肉,弟心何忍?
가죽으로 만든 항아리로 고기를 삶는다 해도[5], 아우의 마음이 참겠는가?

동생인 완혜도 크게 감동해 철수하고 포위를 풀었다. 이후 완악과 완혜가 강화를 맺으면서 판진(板津)을 경계로 하여 광남은 완악이, 북쪽은 완혜가 다스리는 걸로 화해하였다.

2.7. 여조의 멸망

한편 완혜의 부춘조정에선 정석양이 소통제를 협박해 정봉에게 대권을 넘기자 이에 반발한 완유정이 정봉을 축출하고 정주의 부(府)를 불태워 북쪽에서 혼란이 벌어진다. 당시 부춘을 다스리던 완혜는 탕롱으로 진격하여 1787년 완유정을 제거하고 소통제는 청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청나라건륭제는 20만 대군을 보내 민제의 복위를 시도했으나 완혜는 광중(光中)으로 개원하고 청군을 격파하자 여조의 황제 소통제는 청으로 망명해 후여조가 멸망했다.

2.8. 완복영의 침공

1787년 방콕에 있던 완복영은 서산조가 내분에 빠졌고, 가정 일대가 취약하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부국도로 몰래 돌아와 용천으로 이동했다. 멸망한 완씨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귀순하자 완복영은 가정을 재차 공격해 동정왕 완여를 몰아내고 프랑스의 선진적인 무기와 군사들을 앞세워 평순, 평강, 연경을 수복해 나갔고 완악의 영토는 점점 축소되어 귀인 일대만 다스리는 지방정권과 다를게 없어진다. 완복영의 수군은 귀인의 군사 요충지를 불태웠고 프랑스 지원군의 도움으로 손쉽게 퇴각하였다.

2.9. 조카의 배신과 사망

이후 완혜가 1792년 죽었다는 소식에 완악은 신하 300명을 거느리고 부춘을 방문해 직접 조문하려 했다. 그러나 조카이자 완혜를 계승한 완광찬이 조문을 불허하고 광의(廣義) 일대에 군대를 파견하자 완악은 부춘에 여동생을 보내 조문했다.

1793년 가정을 탈환한 완복영은 완악에게 총공격을 가해 부안(富安)을 점령한다. 완복영의 수군과 육군은 인성의 재탈환을 노렸고 완악은 태자 완문보(阮文寶)를 파견해 시내해구(施耐海口)에서 완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인성을 빼앗기는 국면에 처한다.

결국 완악은 부춘 조정에 지원을 청했다. 부춘의 경성제는 태위 범공흥(范公興), 완문훈(阮文訓), 예여충(隸黎忠), 오문초(吳文楚)를 비롯한 병사 1만 7천명을 보내 전투용 코끼리 80마리를 구조했고 오문초의 심복 등문진(鄧文真)이 귀환하였으며 완악도 연경으로 군대를 이끌고 철수했다. 그러나 경성제는 이참에 귀인 조정의 땅을 몰수할 생각이였고, 범공흥 등은 귀인성을 점령한 후 귀인의 모든 관청을 폐쇄한다. 완악은 조카의 배신에 크게 노하여 병에 걸렸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 태자이자 아들이였던 완광보는 경성제에 의해 효공(孝公)으로 책봉되었으나 경성제의 괴뢰(제후)에 불과했다.

2.10. 사후의 모욕

효공은 아버지의 죽음이 또안의 배신에 원인이 있다고 봐서 또안에게 원한을 품고 아인과의 내통으로 복수를 이루려고 했다. 만약 성공해서 아인에게 귀부했다면 떠이선 왕조의 유일한 생존자가 될 수 있었겠으나, 결국 또안이 선수를 쳐서 효공을 푸쑤언으로 끌고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효공은 그곳에서 사형당한다.

그리고 1802년 서산조의 수도 탕롱이 완복영에게 점령당해 서산이 멸망하자 완악의 아들인 완청(阮清), 완흔(阮昕), 완용(阮勇)을 비롯한 경성제를 비롯한 서산의 종실들은 능지형으로 처형당했으며 이미 죽은 완혜와 완악의 능을 파내어 시신을 꺼내 완혜의 황후 배씨와 완광찬의 시신을 감옥에 가두어 영금(永禁)이라 명한 후 부관참시하였다.

또한 완악의 다른 아들이자 민간에서 숨어살던 완문량(阮文良)과 완문량의 아들 완문두(阮文兜)가 1831년 체포되어 처형당하자 서산의 명맥이 완전히 끊겼다.

3. 평가

4. 참고 항목

5. 둘러보기

대월의 서산왕
칭왕 완문악 건원
대월의 서산왕(건원)
건원 태덕왕 완문악 칭제
파일:떠이선 왕조 국기.svg
통일 서산의 역대 황제
칭제 초대 태덕제 완문악 서산 분할
(광중제)
파일:떠이선 왕조 국기.svg
서산 귀인조의 역대 황제
서산 분할 초대 태덕제 완문악 식읍으로 폐지
(완문보)


[1] 세금을 걷는 관리.[2] 平順(평순), 平康(평강), 延慶(연경).[3] 천자(天子)에게 아뢰어 올리는 문서.[4] 완악이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막 난을 일으킨 후, 그를 도와준 공신이다.[5] 베트남엔 사냥후 동물의 가죽으로 항아리를 만들어 고기를 삶아먹는 풍습이 있는데 여기선 형제끼리 서로 죽이는 걸 뜻한다.[6] 「泰德年老,逸樂苟安,不圖後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