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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26 17:01:28

토머스 그레이(제2대 도싯 후작)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2대 도싯 후작
토머스 그레이
Thomas Grey, 2nd Marquess of Dorset
성명 토머스 그레이
Thomas Grey
출생 1477년 6월 22일
잉글랜드 왕국 레스터셔 그로비
사망 1530년 10월 10일 (향년 53세)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애슬리
배우자 엘레노어 세인트 존
마거릿 워튼(1509년 결혼)
자녀 헨리, 메리, 엘리자베스, 캐서린, 레너드, 앤, 존, 토머스
아버지 초대 도싯 후작 토머스 그레이
어머니 세실리 본빌
형제 에드워드, 앤서니, 리처드, 레너드, 조지, 세실리, 브리짓, 도로시, 엘리자베스, 마거릿, 엘레노어, 메리
직위 제2대 도싯 후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후작, 군인. 헨리 7세헨리 8세 치세 초기에 여러 요직을 역임하면서 잉글랜드 최강의 대영주 중 한 사람으로 군림했다.

2. 생애

1477년 6월 22일, 잉글랜드 왕국 레스터셔 그로비에서 초대 도싯 후작 토머스 그레이와 제6대 하링턴 남작과 초대 본빌 남작 윌리엄 본빌과 캐서린 네빌[1]의 딸이며 제7대 하링턴 여남작, 제2대 본빌 여남작인 세실리 본빌의 3남으로 출생했다. 앞서 동복형들인 에드워드와 앤서니 모두 요절해서 3남인 그가 그레이 가문의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친할머니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의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이었기에 토머스는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장남으로, 당시 왕세자였던 에드워드 5세의 이부조카가 되며 잉글랜드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훌륭한 미래가 보장되었다.

그러나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급사한 뒤 새롭게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5세의 호국경이 된 에드워드 4세의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결혼을 불법으로 선언하고, 이를 근거로 왕위를 찬탈해 리처드 3세로 등극했다. 토머스의 삼촌 리처드 그레이, 종조부 앤서니 우드빌, 모친 세실리 본빌의 계부인 윌리엄 헤이스팅스가 이에 반발했다가 리처드 3세의 손에 처형되었고 아버지 토머스 그레이는 버킹엄 공작의 반란을 지지했다가 반란이 실패로 끝나자 자식들을 데리고 브르타뉴 공국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랭커스터 왕조의 후예이자 잉글랜드의 왕위를 노리는 헨리 튜더와 합류했다.

1485년, 아버지 토머스 그레이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리처드 3세와 화해했고, 당시 파리에 있던 아들에게 잉글랜드로 돌아오라고 권고했다. 헨리 튜더가 성공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여긴 아버지 토머스는 잉글랜드로 돌아가려고 시도했지만, 콩피에뉴에서 붙들려 억류되었다. 헨리 튜더는 그에 대한 신뢰를 접고, 잉글랜드 원정에 착수했을 때 그를 대동하지 않았다.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가 패사하고 헨리 튜더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로 등극한 후 아버지 토머스는 작위와 영지를 회복했다. 하지만 새 왕의 신뢰를 별로 받지 못했고 1487년 램버트 심넬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고 한 때 런던 탑에 갇혀 지내기도 했다.

1492년, 아버지 토머스는 헨리 7세에게 충성에 대한 보장을 하기 위해 당시 '하링턴 경'으로 불리던 15세의 아들을 군주의 보호 아래 두기로 했다. 한 사료에 따르면, 아들 토머스는 1495년 옥스퍼드의 막달렌 칼리지에 입학하여 나중에 잉글랜드 추기경과 대법관이 될 토머스 울지 밑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울지는 1498년부터 막탈렌 칼리지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토머스의 정규 교육에 대한 다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이 사료의 신뢰성은 의심스럽다. 그러나 성인이 된 토머스는 분명히 울지와 친밀하게 지냈는데, 아마도 울지가 그의 가정교사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헨리 7세에게 신임받지 못했던 반면, 토머스는 왕실에서 좋은 대접을 받았고, 헨리 7세의 두 아들 아서 튜더헨리 왕자세례성사를 거행할 때 참석했으며, 1501년 아서 튜더가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결혼할 때 거행된 의식에도 참석했다. 1494년 헨리 왕자가 요크 공작으로 선임되었을 때, 토머스는 바스 기사 작위를 받았다. 1501년 9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았다으며, 그 해가 끝나기 전에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1502년 런던에서 판사로 활동했으며, 헨리 7세로부터 채틀리 영지를 받았고, 1507년에는 위버스톤 숲의 관리인 직임을 맡았다. 또한 1506년 윈저 궁 인근에서 헨리 7세와 펠리페 1세의 회동에 참석했다. 그러던 1508년, 토머스는 튜더 왕조를 타도하려는 요크파 잔당이 그를 추대하려 한 음모에 가담한 혐의를 받고 런던 탑으로 보내졌고, 나중에 칼레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당대 연대기 작가 에드워드 홀은 1509년 4월 헨리 7세가 사망하고 나서야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는 것을 모면했다고 기록했다. 새 국왕인 헨리 8세는 그를 석방하라고 명령했지만, 새 통치가 시작된 뒤 발표된 사면 칙령에서 제외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하지만 그는 곧 헨리 8세의 총애를 얻었다. 그는 헨리 7세 치세 때 이미 저명한 마상창시합 선수였으며, 1501년 아서 왕자와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결혼 축하 행사에서 두각을 나타낸 바 있었다. 헨리 8세 치하에서는 1511년 국왕의 첫 아이인 콘월 공작 헨리 튜더의 탄생을 기념하는 토너먼트에 참여해 좋은 활약을 선보여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후 토머스는 몇 년간 중요한 마상 창 시합에 빠짐없이 출석했다. 1524년 3월에 열린 한 마상 창 시합에서는 헨리 8세도 직접 참여해 그와 겨뤘는데, 왕이 헬멧 바이저를 내리기 전에 창을 내지른 바람에 왕의 얼굴을 다치게 했다. 그는 나중에 고의가 아니었다고 해명하며 왕에게 사죄했고, 헨리 8세는 너그럽게 용서했다.

토머스는 귀족 신분, 국왕과의 친밀함, 마상창시합 선수로서의 명성 덕분에 궁정에서 열리는 여러 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14년 헨리 8세로부터 루이 12세의 신부인 메리 튜더 공주를 프랑스로 모셔가는 임무를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과 함께 수행했다. 국왕은 이 두 사람이 결혼식을 위해 조직될 마상창시하벵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리라 기대했고, 그들은 왕의 기대에 유감없이 부응했다. 1516년, 토머스는 가터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인 왕의 부관이 되었고, 1518년에는 프랑스와의 영훤한 평화 조약과 국왕의 딸인 메리 공주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장남인 도팽 프랑수아의 결혼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1520년 6월 헨리 8세가 프랑수아 1세와 회담을 가진 금빛 천의 들판에서, 그는 잉글랜드 왕국의 검을 들었다. 1년 후, 그는 그라블린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접견했고, 그를 잉글랜드로 모셨다.

토머스는 헨리 8세의 원정에 변함없이 참여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1512년 캉브레 동맹 전쟁에서 프랑스로부터 기엔을 탈환하기 위한 군대를 이끌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아라곤 국왕 페란도 2세의 의뢰를 받고 페란도 2세의 나바라 왕국 침공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 작전에 참여한 잉글랜드군은 식량 문제와 지독한 더위, 전염병 창궐로 고통받았고, 규율은 엉망이 되었다. 몇 달 후 군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머스는 병에 걸린 채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페란도 2세는 나바라 왕국에 진주한 군대가 통제 불능에 빠진 모든 책임을 토머스에게 돌렸다.

1513년, 토머스는 헨리 8세의 투르네 포위 공격과 투르네를 구원하려는 프랑스군을 격퇴한 기네게이트 전투에 참여했고, 1523년에는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벌어진 군사 작전에 참여했지만 실제로 지휘권을 받지는 못했다. 1516년에는 토머스가 프랑스 해안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함대 60척을 지휘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다. 1521년 헨리 8세는 토머스를 유럽 대륙 내 잉글랜드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했지만, 토머스 울지가 그의 높은 직위 때문에 급여와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 거라고 지적했고, 헨리 8세는 울지의 견해가 옳다고 보고 계획을 취소했다.

토머스는 생애의 상당 부분을 자기 영지에서 보냈다. 토지는 그에게 높은 지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입을 제공할 것으로 여겨졌지만, 어머니 세실리 본빌이 자신의 상속 재산과 그레이 땅의 상당한 몫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문의 영지를 전부 누리지는 못했다. 게다가 세실리 본빌은 1503년 윌트셔 백작 헨리 스태퍼드와 재혼했다. 토머스는 계부가 그레이 가문의 상속 재산을 가로챌 것이 두려워서 어머니의 재혼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의 두려움은 근거가 없지 않았다. 세실리 본빌은 연간 1,000 파운드의 수입을 가져다주는 영지를 평생 스태퍼드에게 양도했고, 아들이 먼저 죽으면 남은 모든 재산을 그에게 물려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끝내 재혼하자, 토머스는 그레이 가문이 보유한 토지에 대한 어머니의 지위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후 세실리 본빌과 토머스의 격렬한 소송전이 이어졌고, 헨리 8세와 의회가 개입해야 했다. 헨리 8세의 중재를 통해, 세실리는 본인이 짊어진 빚을 갚을 때까지 선친의 재산을 관리할 수 있지만, 그녀가 그레이 가문의 상속 재산 전체를 아들에게 양도할 때까지 지참금을 처분할 권리가 없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또한 그녀는 이제 자신의 재산을 토머스에게 물려줄 의무가 있었다. 세실리는 생전에 연 소득이 최대 천 마르크인 재산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있었지만, 일정 기간 동안만 가능했다. 따라서 토머스는 자기 어머니의 개인 권리 중 그의 권리와 장자 상속의 전통에 모순되는 부분에서 제한을 이룰 수 있었다.

이렇게 소송전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토머스의 수입은 여전히 적었고, 그 결과 1509년 의회에 그로비의 페러스 남작으로만 소환되었다. 당시엔 그가 후작의 지위를 유지하기에는 너무 가난하다고 여겨져서 남작으로 소환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추가적인 양보를 얻어내어 수입이 증가했고, 1511년부터 도싯 후작으로 의회에 참석했다. 1520년대에 어머니에게 일곱 명의 생존한 형제자매에 대한 책임을 분담해 달라고 요구했다. 왕을 대신하여 중재자 역할을 한 토머스 울지는 세실리와 토머스에게 가문의 네 명의 시녀, 즉 도로시아, 메리, 엘리자베스, 그리고 세실리의 지참금을 마련하라고 명령했고, 세실리 본빌은 자기 재산으로 세 명의 어린 아들들에게 영구적인 지참금을 지불하도록 했다.

1522년, 토머스는 반역 혐의로 처형된 제3대 버킹엄 공작 에드워드 스태퍼드의 영지 중 3개 영지를 받았다. 1529년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그는 어머니의 모든 땅과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제8대 하링턴 남작이자 제3대 본빌 남작이 되었으며, 16개 주에 100개가 넘는 영지를 보유했으며, 이 드넓은 영지를 통해 인상적인 수입을 얻었다. 또한 그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연간 1,000 파운드에 달하는 정기 연금을 받았다. 프랑수아 1세가 급여를 줄이자, 토머스는 역시 프랑스 왕실로부터 연금을 받던 토머스 울지에게 자신을 위해 중재해서 같은 급여를 계속 지급하도록 프랑스 왕실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그는 마상 창 시합에서 맹활약하면서 큰 물질적 이익을 얻었을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501년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뒤 다이아몬드루비로 만든 '튜더 장미'를 받았다고 한다. 토머스는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그는 1523년 트렌트 강 남쪽의 왕립 삼림의 관리인으로 임명되었고, 1528년 워릭 성의 성주가 되었으며, 1529년에는 케닐워스 성의 성주가 되었으며, 5개 주에서 열린 평화 위원회에 근무했다.

이렇듯 막대한 수입을 챙긴 토머스는 많은 수행원을 거느렸고, 이들에게 줄 급여를 마련하기 위해 다른 토지 소유 가문과 경쟁해야 했다. 1516년 레스터셔의 영지를 놓고 제3대 헤이스팅스 남작 조지 헤이스팅스와 심한 갈등을 벌였다. 헤이스팅스 남작이 장인 리처드 사세베럴 경과 함께 많은 수행원을 이끌고 법원에 나타나자, 그 역시 수행원을 대규모로 끌고 왔다. 정해진 기준대로 수행원 수를 국한시키지 않고 많이 끌고 온 것은 법 위반이었기에, 두 영주는 왕립 법정에 소환되어 이에 관해 해명해야 했다. 두 사람의 분쟁은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때로는 격렬한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이에 헨리 8세는 1522년 레스터에서 소요 사태가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 그레이 가문과 헤이스팅스 가문의 문장이 있는 옷을 입는 것을 금지했다. 2년 후, 토머스의 요리사와 헤이스팅스의 하인 사이의 싸움이 수백 명이 연루된 폭동과 대규모 피살 사태로 번졌다. 토머스 울지는 토머스와 조지 헤이스팅스에게 각각 1,000 파운드의 보석금을 내라고 강요했고, 토머스를 웨일스로 보내 메리 공주 의회의 명예 총장직을 맡겼다.

1529년, 토머스는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결혼 무효 소송에서 왕의 편에 서서 증인으로 출석해, 그녀와 아서 왕자의 결혼이 이미 성사되었으므로 그녀와 왕의 결혼은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530년 생애의 마지막 몇 달 동안 다른 영주들과 함께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헨리 8세의 결혼 무효 승인 요청을 신속히 승인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에 서명했다. 이와동시에, 그는 토머스 울지에 대한 왕의 판결문에도 서명함으로써,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하려 했다.

1530년 10월 10일, 토머스는 오래 전부터 앓고 있었던 과도한 땀 분비로 인한 피부 염증이 악화하면서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유언에 따라 워릭셔 애슬리 성 교구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제5대 슈루즈버리 백작 리처드 네빌의 딸,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몬터규 후작 존 네빌의 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