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의 前 축구인 | ||
톰 손더스 Tom Saunders | ||
<colbgcolor=#eeeeee,#191919> 출생 | 1921년 | |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리버풀 | ||
사망 | 2001년 12월 14일 (향년 79세) | |
잉글랜드 머지사이드주 리버풀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축구선수은퇴 중등교사은퇴 축구코치 축구 행정가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뉴 브라이튼 AFC 버스코프 FC 플릿우드 타운 FC 머린 AFC 프레스콧 케이블스 |
교사 | 올리브 마운트 중등학교 웨스트 더비 스쿨 | |
지도자 | 리버풀 FC (1970~1986)코치/스카우터 | |
행정 | 리버풀 FC (1993~2001)디렉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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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잉글랜드)의 축구인으로, 빌 샹클리 시절 '부트 룸(Boot Room)'의 핵심 멤버이자 리버풀의 전성기 붉은 제국을 이끈 레전드 코칭 스태프 중 한 명이며, 90년대 후반부터는 팀의 디렉터로도 활약한 인물이다. 손더스는 빌 샹클리 시대의 '부트 룸' 멤버 중 유일하게 코치 자격증을 보유했던 비 프로 축구선수 출신 코치로 알려졌고, 영국 축구사에서 최초로 교단에서 프로 축구 팀 코치로 스카우트되어 유스 개발 총괄로 재직한 지도자이기도 했다.2. 선수 및 교사 시절
손더스는 1921년 리버풀에서 태어나 16세의 나이로 영국 육군에 입대하여 4년간 북아프리카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뉴 브라이튼, 버스코프, 플릿우드, 머린, 프레스콧에서 축구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아마추어로 뛴 것이었다.축구를 그만둔 그는 리버풀 웨버트리에 있는 올리버 마운트 중등학교에서 교직에 취임하여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17년간 교직에 있다가 리버풀의 웨스트 더비 학교로 자리를 옮겨 저학년 교장에 취임했다. 그는 웨스트 더비에서 남학생들의 축구를 지도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학교 축구팀 감독을 맡았다. 그 후 그는 10년간 힉교 팀을 지도했다.
3. 지도자 경력
학교팀을 지도하던 손더스는 잉글랜드 슈롭셔주 릴레샬에서 정식 축구 코치 자격증을 취득했고 이후 리버풀의 유스팀 코치였던 토니 웨이터스의 추천으로 빌 샹클리가 지휘하던 리버풀로 합류하게 된다. 그의 직책은 유스 팀 개발 총괄이었고 70년대 이후로 그는 수 많은 팀 의 유소년들을 성장시키게 된다. 리버풀의 위대한 '부트 룸' 코치진들 ,좌측부터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로니 머랜, 루벤 베넷, 톰 손더스, |
손더스는 데이비드 페어클로프, 지미 케이스, 스티브 헤이웨이 등 1970년부터 1986년까지 거의 모든 선수들의 성장 및 개발을 책임지면서 리버풀의 유럽 대항전 상대들을 분석하는 분석관 역할도 겸임하였다. 그는 유럽 대륙 전역의 잘 알려지지 않은 상대들을 대상으로 수 많은 분석 자료를 만들어냈으며 이러한 경력에 힘입어 이후엔 팀의 수석 스카우터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손더스는 수석 스카우터를 맡으며 1973년 프랭크 스켈리라는 스카우터를 발굴하여 팀 스카우터진에 합류시키기도 하였는데, 스켈리는 이후 리버풀의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가 되는 브루스 그로벨라를 발굴하기도 했다.
리버풀의 첩보원이라 불렸던 톰 손더스 |
손더스는 다른 '부트 룸' 코치들처럼 외부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7-80년대 리버풀이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을 지배한 전성기에 있어서 클럽의 눈과 같은 존재로 핵심적인 내부 인사였다. 그는 프로 축구선수로 뛰지 않은 비 프로 출신의 코치였지만 어린 선수들을 보는 눈썰미와 그들의 역량을 터트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스카우터 업무에 있어서 그의 역할은 팀에게 절대적이었는데 그의 의견은 항상 팀에게 높은 신뢰도를 자랑했으며 특히 주요 이적건에 있어서 손더스는 늘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그가 리버풀의 코치진으로 부임하던 시절에 그는 리버풀의 첩보원라는 이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그가 유럽 전역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선수들을 스카우팅하고 상대팀을 분석하여 막대한 정보력을 다졌기 때문이다. 그는 팀의 전성기를 이끈 정보력을 통하여 빌 샹클리부터 제라르 울리에에 이르기까지 역대 리버풀 감독들에게도 가까운 곳에서 사기를 북돋아주며 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손더스는 16년간 리버풀의 유스 개발 총괄로 활약하다가 1986년 마침내 은퇴를 결심하고 팀을 떠나게되었다.
4. 디렉터 경력 및 말년
1986년을 끝으로 팀의 코치 및 스카우터직을 은퇴한 손더스는 1993년 구단 보드진 이사회에 의해서 디렉터로 선출되어 안필드로 돌아왔다. 그의 코치 재직 시절 그에 대한 구단의 신뢰도는 매우 높았고 그가 축구계 비즈니스에 있어서도 능력을 보여왔기 때문. 그의 주된 임무는 팀을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관리하는 것이었지만, 코치진 내부에서 팀을 오래 관리해온 코치 출신 답게 그는 그레이엄 수네스와 로이 에반스 같은 인물들이 감독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줄곧 코치진과 스쿼드를 도왔다. 손더스는 팀의 전성기를 이끈 수비수였던 필 톰슨을 제라르 울리에 감독에게 수석 코치로 추천하기도 했다. 손더스는 약 8년 가량 팀의 디렉터직을 맡아 헌신했으나 지병을 앓아 2001년 7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2019년, 그는 리버풀이 선정한 '리버풀을 만든 인물들' 35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5. 여담
- 팀 내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불렸다. 그 이유는 축구계에 들어오기 전 웨스트 더비 스쿨에서 학교장 생활을 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