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토머스 플로리 (Thomas Florie) |
생년월일 | 1897년 9월 6일 |
사망년월일 | 1966년 4월 26일 |
국적 | 미국 |
출신지 | 뉴저지 해리슨 |
포지션 | 포워드, 하프백 |
신체조건 | 불명 |
등번호 | -[1] |
소속팀 | 해리슨 SC (1921-1922) 아메리칸 (1922-1924) 프로비던스 FC (1924-1928) 뉴 베드포드 웨일러스 2 (1928-1931) 폴 리버 FC (1931) 뉴 베드포드 웨일러스 3 (1931-1932) 포터킷 레인저스 (1932-1934) 포터킷 FC (1934-?) |
국가대표 | 8경기 2골 (1925-1934) |
1. 개요
미국의 전 축구인.2. 생애[2]
2.1. 축구 선수
2.1.1. 클럽
플로리는 뉴저지 주 해리슨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이탈리아 출신이었으며 플로리는 어릴 때부터 축구를 즐겼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군인으로 참전하느라 그의 선수 데뷔가 늦어졌고 1921년부터 고향팀 해리슨 SC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플로리는 해리슨 SC에서 단 3경기 출전에 그쳤고 1922년 아메리칸 AA라는 아마추어 팀으로 이적했다.1924년부터 프로비던스 FC 소속이 된 플로리는 아메리칸 사커 리그에서 최고급 아웃사이드 플레이어로 성장했다. 1928년부터 뉴 베드포드 웨일러스에서 활약하면서 플로리는 2차례의 리그 우승과 1회의 컵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대공황으로 인해 미국 스포츠계는 전체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으며 웨일러스를 포함한 축구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웨일러스도 뉴욕 양키스 축구팀과 합병 등 팀의 변화가 있었고 1932년엔 플로리가 컵대회 결승 2경기에서 1골씩을 넣어 더블을 차지했음에도 1933년에 팀이 아예 공중분해되었다.
플로리는 1932년 포터킷 레인저스로 이적했고 1934년부터 포터킷 FC에서 선수 생활을 매조지었다.
2.1.2. 국가대표
플로리는 1925년 6월 7일, 캐나다를 상대로 미국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미국은 캐나다에 0:1로 패했다.다음 해인 1926년에 미국은 캐나다와 다시 A매치를 치렀고 이번엔 6대2로 승리하며 1년 전의 패배를 설욕했다. 플로리는 이 경기에서 1골을 기록했다.
플로리는 미국 대표팀으로 초대 월드컵과 2회 대회에 참가했는데 초대 월드컵 당시 미국 대표팀의 주장이었다. 플로리는 첫 경기였던 벨기에전에서 전반 종료 직전 골을 기록하여 3대0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고 미국의 4강 진출을 이끌었다.
이탈리아 월드컵 1라운드 경기 이탈리아전이 플로리의 마지막 A매치였으며 플로리는 대표팀에서 8경기 출전, 2득점을 기록했다.
3. 뒷이야기
- 플로리는 1934년 월드컵에 출전할 때 생후 36세 264일로 해당 대회 참가 선수 중 최고령자였고 당시에는 월드컵 통산 최고령자 출전 기록이기도 했다.[3] 그리고 1934년 월드컵 당시 유일한 19세기 출생자이자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중 마지막 19세기 출생자이기도 하다. 드비의 FIFA 월드컵 최연장자 참가와 플로리의 최연장자 출전 기록은 1954년 월드컵에서 스탠리 매튜스에 의해 깨졌고 현재 월드컵 최연장자 관련 기록은 에삼 엘하다리가 가지고 있다.
4. 수상
4.1. 클럽
- 아메리칸 사커 리그 우승 2회: 1931 가을, 1932 봄(뉴 베드포드 웨일러스 3)
- 내셔널 챌린지 컵 우승 1회: 1932 봄(뉴 베드포드 웨일러스 3)
- 아메리칸 사커 리그 준우승 2회: 1930 봄, 1930 가을(뉴 베드포드 웨일러스 2)
- 루이스 컵 준우승 1회: 1929(뉴 베드포드 웨일러스 2)
4.2. 개인
-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86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당시 최고령자 참가 기록은 지난 대회에 벨기에 소속으로 참가했던 장 드비(Jean de Bie)가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92년 5월 9일생으로 초대 월드컵 당시 38세였다. 당연히 FIFA 월드컵 출전 선수 중 가장 이른 출생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