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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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소답동 김종영 생가 | 통영 해저터널 | 진주역 차량정비고 |
1. 개요
일제강점기 시기 건설된 통영시의 해저터널로 근대건축물이다. 1927년 5월에 착공하여 1932년경에 준공하였으며, 1996년 1차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통영시 당동에서 시작하여 미수동까지 이어져 있다.동아시아 최초의 해저터널로, 2005년 9월 14일에 등록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2. 역사
1930년대 당시 통영시 시가지와 미륵도 사이를 도보로 왕래할 수 있는 연결로가 존재하지 않아 통행에 불편함이 야기되자, 일제에 의해 1927년부터 1932년 까지 약 5년간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를 연결하는 길이 461m, 높이 3.5m, 넓이 7m, 깊이 10m[1]의 해저 터널이 건설되었다. 양측에 제방을 설치하여 물을 막고 직접 터파기한 후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가장 단순한 시공 방법인 개착식 흙막이 공법(가물막이 공법)으로 축조되었다. 통영 운하의 수심이 간조 시 3m, 만조 시 5m 정도로 얕기 때문에 거가대교 침매터널과 달리 해수면 바닥 아래를 땅굴로 파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터널의 천장이 육안으로 뻔히 보이기 때문에 선박이 다닐 수 없게 된다.이 해저터널 건설에는 꽤나 재미있는 속설이 있다. 보통이라면 다리를 지었겠지만 그곳이 하필 착량묘(鑿梁廟) 자리였던 것이다. 착량묘는 착량지 부근에 위치해 있는데, 착량지는 당포 해전 당시 패주하던 왜군이 해협에 다리를 만들어 도주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2] 이 때문에 당시 일본인들은 조상들의 시체가 있던 곳 위를 조선인들이 지나갈 수 없다고 하여 기존의 착량교를 해체하고 해저터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광복 이후에도 사용되고 있었으나, 1932년 완공 이래 오랜 시간이 경과되어 바닷물이 스며드는 등 시설이 상당히 노후되자 충무교를 가설하고 자전거를 제외한 차량의 통행을 금지하였다. 1967년에 해저터널 인근 착량교가 있던 위치에 운하교인 충무교(판데다리)가 완공되고 1998년에는 통영대교가 준공되면서 현재는 이들이 통영반도와 미륵도를 오가는 교통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이후 미륵도 상수공급 목적으로 터널 양측에 상하수도관을 매설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하면서 터널의 폭이 당초 7m에서 5m로 좁아지게 되었다.
2005년에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로 등록문화재에 지정된 이래로 통영시에서는 해저터널을 관광시설로 개발하려는 갖은 시도를 했지만 교통용으로 건축된 밋밋한 콘크리트 구조물 뿐이라 특색이 없고 관광 컨텐츠도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방문객들도 상당수가 불만족스럽다고 반응하며 발길이 끊기자,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내부 벽면에 해저터널 역사 및 통영 관광 정보 전광판 등을 설치하였고 앞으로도 문화재 현상변경 허용기준 내 다양한 리모델링 방안을 계획 중이다.#
2010년 거가대로의 가덕해저터널 개통 이전까지는 이곳이 한국의 유일한 해저터널이었다.
3. 기타
- 원래 이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경칭 태합(太閤, 타이코)에서 유래된 태합굴이었다.[3] 따라서 해방 이후 시에서는 관광자료나 지도에 통영운하로 또는 통영해저터널 등 다른 명칭으로 바꿔 표기했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하기 전에 문화재청에서는 문화재가 생성될 당시의 명칭을 따른다는 원칙으로 '통영태합굴해저도로'로 등록을 예고했다가 논란이 되어 결국 지금의 명칭으로 바꿔 등록했다.
- 터널의 양쪽 입구 상단에는 '龍門達陽(용문달양)'이라고 한문이 새겨진 석재 현판이 있다. 이는 용문(龍門)[4]을 거쳐 산양(山陽)[5]에 달한다는 뜻으로, 터널 건설 당시 해저터널 건설에 입김을 넣었던 통영읍장 야마구치 세이(山口精)의 글씨라고 한다.
- 1996년에 터널 내 외부로 대형 정비를 거쳤는데, 1996년 정비 이전에는 해저터널 입구의 캐노피 지붕이 현재처럼 갈색 샌드위치 패널이 아닌 백색 양철 지붕이었으며 지붕에 ‘친절, 청결, 질서로 관광충무 건설하자’ 와 ‘민도높은 문화시민 성숙한 시민사회’ 라는 검은색 문구가 쓰여 있었다.[6] 높은 언덕이나 건물 옥상 등에 올라가면 볼 수 있었던 문구다.
4. 관련 문서
[1] 평균 해수면 기준.[2] 착량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충무공 이순신의 사당인 착량묘가 있다.[3] "왜정시에는 해저 터널을 다이코보리(太閤이 팠다는 뜻의 왜말. 太閤은 豊臣秀吉의 존칭)라 불렀다. 역사상 풍신수길이 조선까지 출진한 일이 없었는데 일본인들까지 해저 터널을 다이코보리라 불렀으니 우습다." -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中[4] 중국 황하 중류에 있는 물살이 센 여울목으로, 잉어가 여기를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고 한다. 미륵도의 용화사(龍華寺)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5] 산양읍(당시 산양면)이 있는 미륵도를 말한다.[6] 1995년 도농통합 이전까지는 해저터널이 위치한 곳이 현재는 사라진 충무시 권역에 포함되는 곳이었기에 문구에 충무라는 단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