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르트 구도심의 성벽..?
1850년 건설된 대사원 (알 아티크 모스크)
1. 개요
아랍어 ﺗﻗﺮت / تڤرت (투구르)베르베르어 ⵜⵓⴳⵓⵔⵜ,
영어 Touggourt / Tugurt
알제리 중동부의 투구르트 주의 주도. 비스크라에서 남쪽으로 200km 떨어져 있고, 서남쪽으로 150여 km 가면 우아르글라가 나온다. 인구는 15만명으로, 콩스탕틴-바트나-비스크라를 거친 알제리 동부 횡단 철도의 종점이다. 시가지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오아시스 서쪽에 형성되어 있으며, 동쪽 너머에는 투구르트 공항이 자리한다. 베르베르어로 '성문'을 뜻하는 투구르트는 15-19세기 마린 왕조의 방계인 투구르트 술탄국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다른 사막 도시들과 달리 석유는 없으나 알제리의 대표적인 대추야자 생산지이다. 날씨가 무더운 탓에 낮에는 한산하고 밤에 활발한 도시라고 한다.
2. 역사
투구르트 구도심
먼 옛날부터 베르베르 인들이 정착하였다. 다만 남쪽의 우아르글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던 15세기 중반 투구르트의 족장 유수프 이븐 하산은 하프스 왕조의 혼란을 틈타 조세 납부를 거부하였고, 마린 왕조의 방계 왕자를 수용하여 지도자로 삼았다. 이렇게 세워진 투구르트 술탄국은 투구르트와 우아르글라를 중심으로 삼았고, 특히 수도 투구르트는 사하라 횡단 무역으로 번영하였다.
2.1. 투구르트 공방전 (1552년)
투구르트 술탄 궁전
16세기 알제리 해안을 장악한 오스만 제국은 투구르트에 조공을 요구했으나 14세의 술탄 아흐메드 2세는 거부하였다. 이에 알제 총독 살라흐 레이스가 비스크라의 베니 압바스 왕국군과 남하하여 도시를 포위하였다. 3일간 포격한 후 4일째에 포위군은 총공격을 가하였고, 투구르트는 함락되었다. 살라흐 레이스는 도시를 약탈하였고 주민들이 도주한 우라르글라까지 점령하였다. 4천의 기병과 도주했던 아흐메드 2세가 조공을 약속하자 오스만 군은 5천의 포로와 다량의 금과 함께 회군하였다.
2.2. 근현대
알 아티크 모스크
19세기 들어 술탄들은 프랑스에 대항하였으나 1854년 프랑스 당국은 기어코 투구르트 술탄국을 멸망시키고 도시를 두른 해자를 메웠다. 프랑스령 알제리 시기 투구르트 대신 우아르글라가 일대의 중심이 되었다. 1871년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나 주민들이 프랑스 주둔군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이에 1914년 해안과 이어지는 철도가 놓여 프랑스 당국의 관리가 강화되었고, 오아시스 도시에 환상을 품은 오리엔탈리스트들이 방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