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툴루즈 백국은 프랑스 남부에 있었던 백국으로, 카롤루스 대제의 12 동료 (Charlemagne's twelve peers)로 불리던 프랑스 최고의 대귀족 가문이었고 그들의 수장인 툴루즈 백작은 한 때 남프랑스의 1/3을 지배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지닌 영주였다.2. 역사
2.1. 시작
툴루즈 백작령은 카롤루스 대제가 778년에 아키텐 공을 패배 시킨 다음 날 바스크인들와의 싸움을 조율하기 위해 창설 했다. 이후 툴루즈 백작령은 카롤루스 대제 사후 만들어진 아키텐 왕국에 통합되었으나, 아키텐 왕국은 루이 1세의 손자인 피핀이 루이 1세의 막내아들인 샤를 2세에 의해 폐위되면서 사라졌다.2.2. 생질의 레몽
퐁스의 차남인 레몽은 형 기욤 4세가 딸 필리파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자, 그 지위를 찬탈하여 툴루즈 백작이 되었다. 그 때문에 필리파와 결혼한 아키텐 공작 기욤 9세는 여러 차례 백작의 지위를 주장하며 툴루즈를 공격했지만 격퇴하였다.2.3. 12세기, 대남방 전쟁
레몽 4세의 아들들인 베르트랑[1]과 그 뒤를 이은 알폰소 주르당은 여러 차례 툴루즈를 점령한 아키텐의 공작 기욤 9세과 대립하였으나, 알폰소 주르당은 아버지보다 무능했기에 푸아티에 가문에게 툴루즈를 2번이나 털렸으며, 랑그도크와 프로방스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바르셀로나 가문[2]에게 많은 이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아키텐 공국, 툴루즈 백국과 아라곤은 옥시타니아의 여러 지역들을 획득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한때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프로방스 지방을 획득하기도 하고 피레네 산맥 이북으로 진출하려고 했지만, 알비파의 반란으로 남부 프랑스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고, 그후 필리프 2세가 알비 십자군을 일으켜 옥시타니아 지역을 점령하였다.
결국 이때를 기점으로 프로방스 변경백국은 프로방스 후작령과 프로방스 백작령으로 분단된다. 하지만 필리프 드 툴루즈의 권리는 1141년, 필리프의 손녀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에게 넘어갔고, 곧 툴루즈 백국은 심각한 위협에 처해진다.
2.4.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20여년에 걸친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한 레몽 7세는 결국 1229년 자신의 딸인 잔느 드 툴루즈를 루이 9세의 동생인 알폰소 드 푸아티에와 결혼시키고, 프랑스 왕과 교황청의 사면을 받는 화의를 받아들였다. 공식적인 알비 십자군은 이때까지였으나, 이후로도 남부 프랑스는 지역 영주와 교황청 사제들에 의해 십수년간에 걸쳐 종교탄압과 민중봉기가 발생하며 악전고투가 벌어졌다. 결국 1245년에야 레몽 7세는 완전히 몰락하였고, 이후 1249년 레몽 7세가 죽고 멸망이 가시화된다.알폰소 드 푸아티에는 성불구자였기에 8차 십자군 도중에 병사할 때까지 자식을 보지 못하였고, 알폰소 사후 잔느 드 툴루즈가 죽고난 뒤부터 툴루즈 백국은 상속분쟁에 휩싸인다.# 알폰소 드 푸아티에는 동생인 샤를을, 잔느 드 툴루즈는 5촌 조카인 필리파를 상속권자로 지정하였으나#, 당시 프랑스의 국왕이자 알폰소의 조카이던 필리프 3세는 국왕의 권한으로 툴루즈 백국을 자신의 영지로 흡수시키는 정책을 착수하게 된다.
이렇게 잔느 드 툴루즈의 유지와 예법상 후계구도는 툴루즈 백작 부부 사후 랑그도크를 이전부터 노리던 카페 왕조의 상황 속에서 벌어진 궁중 내부의 암투 등이 당쟁과 엮이면서 무시되듯 뒤바뀌게 되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