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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6 21:56:26

트브르트코 2세

파일:보스니아 왕국 국장.png
보스니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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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C337><colcolor=#6D7585> 보스니아 제5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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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브르트코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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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rtko II}}}
파일:트브르트코 2세.jpg
출생 미상
사망 1443년 11월 (향년 불명)
보스니아 왕국 비소코
재위 보스니아 국왕
1404년 ~ 1409년
보스니아 국왕 (복위)
1421년 ~ 1443년
아버지 트브르트코 1세
어머니 도로테야 브딘스카
배우자 도로테야 고르얀스카
가문 코트로마니치 가문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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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스니아 왕국 제5대 국왕.

2. 생애

보스니아 초대 국왕 트브르트코 1세와 불가리아 차르 이반 스라치미르의 딸인 도로테아 브단스카의 외아들이다. 1391년 3월 10일 아버지 트브르트코 1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그는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촌 또는 이복 형제인 스테판 다비샤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4년 후 다비샤는 죽었고, 다비샤의 미망인인 옐레나 그루바가 여왕으로 등극했다. 1398년 보스니아 귀족들은 옐레나를 폐위하고 스테판 오스토야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1404년 5월, 보스니아 대공 흐르보예 부크치치 흐르바티니치와 보스니아 대귀족 산달리 흐라니치 코사차는 자기들과 갈등을 벌이던 스테판 오스토야를 무력으로 폐위하고 트브르트코 2세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트브르트코 2세는 흐르보예의 꼭두각시 취급을 받았으며, 흐르보예의 영지인 사나에서 살았다. 1405년 봄, 흐르보예는 보스니아에서 가장 부유한 광산인 스레브레니차의 관리권을 확보했다. 트브르트코 2세는 흐르보예의 견해에 따라 헝가리 왕위를 놓고 지기스문트와 전쟁을 치르던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오를 지지했다. 한편, 산달리 흐라니치 코사차는 오스토야를 지지하던 라디치 산코비치를 공격해 일부 영지를 빼앗았다.

스테판 오스토야는 1404년 정변 때 가까스로 빠져나간 뒤 지기스문트에게 귀순했고, 그를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하겠다고 밝혔다. 지기스문트는 즉시 그를 복위시키기 위해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 1404년 6월, 헝가리군은 우소라와 보보비츠를 공략했다. 하지만 모든 보스니아 귀족은 트브르트코 2세를 왕으로 인정했기에 전쟁은 지속되었다. 1408년 9월, 지기스문트는 도보르 인근에서 보스니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트브르트코 2세는 1409년 초 보스니아에서 여전히 왕을 칭하며 라구사 공화국과 서신을 교환했지만, 헝가리의 강한 압력에 굴복한 보스니아 귀족들이 오스트야 편으로 돌아서자,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409년 말 해외로 망명했다.

1414년 5월, 오스만 제국은 자기들에게 망명한 트브르트코 2세만이 보스니아의 합법적인 왕이라고 선포했다. 그들은 보스니아 침공을 단행해 여러 마을과 도시를 약탈했다. 하지만 보스니아 대다수 귀족들이 오스토야를 계속 지지하자, 오스만군은 점령지에 트브르트코 2세를 남겨두고 돌아갔다. 1415년, 지기스문트는 동료 보스니아 귀족인 산달지 흐라니치를 무단으로 공격한 흐르보예에게 화가 나 그와 갈등을 벌인 끝에 흐르보야. 브라치, 흐바르, 코르출라를 몰수했다. 이에 흐르보예는 오스만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오스만 제국군이 출격해 라슈바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군은 더 이상 공세를 벌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트브르트코 2세를 무시하고 오스토야를 왕으로 인정한 뒤 돌아갔다.

1418년 스테판 오스토야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그의 아들 스테판 오스토이치가 새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1420년 보스니아 대귀족 산달리 흐라니치 코사차와 갈등을 벌이다가 오스만 제국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 산달리에게 패배해 권좌에서 밀려났다. 트브르트코 2세는 1421년 8월 또는 9월에 보스니아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라구사 공화국이 코나블레 영지를 가지는 걸 승인하는 대가로 그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렇게 복위한 트브르트코 2세는 비소코에 궁정을 차리고 내치를 다졌다. 그의 두번째 치세 동안, 보스니아 광산 발굴은 최고조에 달했다. 라구사 상인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으며, 베네치아 공화국과 무역 협정을 맺어 경제를 더욱 활성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자기들 라이벌인 베네치아와 손잡은 것에 분노한 라구사인들은 1424년 트브르트코 1세의 사생아 또는 부크 코트로마니치의 아들로 알려진 부크 바니치가 쿠야바 라디노비치 왕비[1]의 지원을 받아 반기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뒤 도망쳤을 때 자기들에게 망명하도록 했다. 트브르트코 2세는 라구사 정부에 부크를 인도하거나 추방하라고 권고했지만 모두 거부되었다. 세르비아 공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라구사 공화국의 도움을 받으며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을 때, 트브르트코 2세는 세르비아가 점거한 보스니아 영토인 스레브레니차 탈환을 시도했지만 격퇴되었다. 이에 악감정을 품은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오스만군을 격퇴한 뒤 보스니아로 약탈대를 파견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도록 했다.

1425년, 트브르트코 2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과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헝가리와의 관계를 개선하기로 했다. 그 결과 같은 해 또는 이듬해에 헝가리와 조약을 맺었다. 오스만 제국은 적국인 헝가리와 손잡은 것을 응징하기 위해 보스니아를 전격 침공했고, 트브르트코 2세는 급히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이고 매년 공물을 바치기로 했다. 오스만군이 만족해 하며 철수하자, 그는 어떻게든 헝가리와 군사 동맹을 맺으려 했다. 지기스문트는 그에게 자기 장인인 첼레 백작 헤르만 2세를 자녀가 없는 그의 추정 상속인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트브르토크 2세는 1427년 가을에 헤르만을 추정 상속인으로 인정했다. 여기에 더해, 헝가리 귀족의 딸인 도로테아 고르얀스카와 결혼했다. 산달리와 즐라토노소비치 가문은 1428년에 열린 결혼 축제에 참석하지 않음으로써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산달리와 화해했지만, 즐라토노소비치 가문의 영지를 몰수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1432년, 스테판 오스토야의 사생아인 라디보이 오스토이치가 트브르트코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스테판 라자레비치의 뒤를 이어 세르비아 데스포티스를 자처한 주라지 브란코비치, 트브르트코 2세의 친 헝가리 정책에 반감을 품던 산달리, 그리고 오스만 제국은 라디보이를 지원해 보스니아 대부분을 장악하도록 도왔다. 트브르트코 2세는 유라이 보이살리치의 지원을 받으며 보스니아 중부와 북서부 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달리는 곧 중병에 걸려 대외 활동을 중단했고, 주라지 브란코비치는 트브르트코 2세가 즐라토노소비치 가문으로부터 몰수한 영지를 자기 것으로 삼은 것에 만족해 라디보이를 더이상 지원하지 않았다. 다만 오스만 제국은 라디보이를 계속 지원했고, 1434년에 그의 이름을 내세우며 보보바츠를 공략했다.

트브르트코 2세는 헝가리 왕국에 구원을 간절히 청했지만, 헝가리군은 1434년 중반이 되어서야 보스니아로 진군했다. 그들은 야이체, 호디제드, 보차츠, 코모틴 성을 탈환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철수했고, 탈환했던 영역은 도로 라디보이에게 넘어갔다. 트브르트코 2세는 헝가리군과 함께 부더로 이동해 그곳에 머물렀다. 이리하여 라디보이가 사실상 보스니아 왕이 되었지만, 어떤 기독교 국가도 그를 합법적인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1435년 오스만 제국이 라디보이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자, 라디보이는 트르브트코 2세 추종자들의 반격을 받고 자클루미아에 있는 코사차 궁정으로 피신했다. 트브르트코 2세는 헝가리군의 도움을 받아 보스니아로 복귀했다. 그 후 보스니아의 비소코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443년 11월 사망했다.

트브르트코 2세의 첫번째 아내는 1409년 라구사인들의 헌장에 "보스니아의 트브르트코 왕의 아내인 왕비"로 언급되었지만,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트브르트코 2세는 헝가리의 영역이 된 보스니아 지역 우소라의 반(Ban)인 가라이 야노시의 딸인 도로테아 고르얀스카와 두번째로 결혼했고, 1438년 9월 도로테아가 사망한 뒤엔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다. 사료에는 그가 도로테아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었다는 언급이 없으나, 20세기 후반 보보비츠의 보스니아 왕실 예배당에서 두 부부의 무덤 사이에 어린이의 무덤이 확인되면서, 유아기나 어린 시절에 사망한 자녀가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아무튼 사망할 무렵엔 자녀가 없었던 그는 차기 국왕으로 라디보이의 남동생으로 지금까지 별다른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던 스테판 토마시를 지명했다. 이는 자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던 라디보이에게 악감정을 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하여 스테판 토마시가 보스니아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


[1] 스테판 오스토야의 미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