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22:27:45

티스콴툼

스콴토에서 넘어옴


1. 개요2. 생애3. 여담


Tisquantum
(1580년 경 – 1622년 11월 30일)

1. 개요

후일 미국 매사추세츠로 불리는 지역의 파투셋 마을에 살던 왐파노아그 족 출신 아메리카 원주민.

영어식 발음인 "스콴토(Squanto)"로도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정착한 청교도들을 도와주고 옥수수 경작법 등 유용한 기술들을 전파해 주었으며, 추수감사절의 탄생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2. 생애

유럽인들에게 2번이나 노예로 잡혔다가 탈출한 사람으로, 메이플라워호가 도착하기 1년 전에 이 마을에 정착했다. 그리고 메이플라워호가 도착하고 2년 후에 역병으로 죽었다.

그의 출생일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사학자들이 1585년 1월 1일 또는 1582년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는 왐파노아그족의 한 갈래인 파두셋(Patuxet)족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그곳은 오늘날의 매사추세츠 플리머스 근처에 위치한다. 1605년 플리머스 회사의 소유주였던 페르디난도 조지 경을 위해 뉴잉글랜드의 해안을 탐사하고 있었던 조지 웨이머스 선장이 티스콴툼과 그의 종족 5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는 그들을 모두 잉글랜드로 데려갔다. 조지는 티스콴툼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그를 통역자로 훈련시켰다.

1614년 티스콴툼은 존 스미스 선장이 이끄는 탐사대와 함께 뉴잉글랜드로 돌어왔다. 파두셋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그는 스미스 선장의 장교 중 한명이었던 영국인 토마스 헌트에 의해 납치당했다. 헌트는 생선옥수수 그리고 포로로 잡은 인디언들을 스페인 말라가에 팔 계획이었다. 그곳에서 헌트는 티스콴툼과 다른 원주민들을 스페인에 두당 20 파운드에 팔려고 했다.

현지에 있던 몇몇 수도자들이 헌트의 납치 행각을 발각하고는, 티스콴툼이 포함된 미국 원주민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데리고 갔다. 티스콴툼은 수도자들에게 자신을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설득했다. 그는 가까스로 런던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영어를 가르쳐 준 조선업자 존 슬래니와 함께 몇 년을 일하면서 살았다. 슬래니는 티스콴툼을 데리고, 뉴펀들랜드에 있는 쿠퍼 만을 항해하는데 데리고 갔다. 고향인 뉴잉글랜드에 가기위해 티스콴툼은 북미의 동해안을 탐사하는 역할을 맡아서 그 탐사에 참가했다. 그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자, 1618년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마침내 1619년 티스콴툼은 뉴잉글랜드의 해안을 탐사하는 탐사대에 참가하여 그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곧 뉴잉글랜드 해안의 파두셋 부족을 발견했지만, 그들은 이미 천연두로 의심되는 몇 년에 걸친 전염병으로 많은 이들이 죽은 이후였다.[1]

1621년 3월 22일, 왐파노아그 족의 추장 마사소이트를 접견하고 있던 아베나키 족 대추장 사모셋은 그들이 전에 살았던 마을 근처에 있던 플리머스 식민지 사람들에게 티스콴툼을 소개했다. 그가 필그림에게 옥수수 경작법을 가르쳐 가혹한 첫 겨울을 이겨내도록 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1621년, 스티픈 홉킨스와 에드워드 윈슬로가 왐파노아그 추장 마사소이트에게 외교 사절로서 내륙을 여행할 때 안내자이자, 통역사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그해 윌리엄 브랫퍼드 지사의 연이은 외교 임무를 맡던 중 배반자였던 부추장 코비턴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다가 네마스켓 마을[2]에서 붙잡히게 된다.

마일스 스탠디시는 플리머스에서 10명의 정착민을 이끌고 티스콴툼을 구출하기 위해 나섰다. 그가 살아있으면 구출하고, 살해당했다면 복수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다행히도 살아있었고, 플리머스 필그림들의 환호를 받으며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식민지를 보조하는 중요한 역할을 지속하였다. 티스콴툼이 비록 부족 연합을 위해 일을 했지만, 처음에 그를 필그림 연락관으로 지목했던 추장 마사소이트는 개척민들과 부족의 협상을 하는데는 티스콴툼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스콴토를 감시하기 위해 호보목을 파견했고, 그에게 2번째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부여했다.

왐파노아그 족과 필그림 사이에 손상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회합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티스콴툼은 열병으로 쓰러지게 된다. 그의 코에서는 출혈이 시작되었다. 어떤 사학자들 중에는 티스콴툼이 추장을 배신했다고 여겨져 왐파노아그 족에 의해 암살되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몇 일 후 스콴토는 1622년 매사추세츠 채트햄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는 표식도 없는 곳에 매장되었으며, 플리머스의 묘지였던 뷰리얼 힐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왐파노아그와 필그림 사이의 평화는 이후 50년간 지속되었다.

3. 여담

스콴토가 사망한 후에도 정착민과 왐파노아그인들의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나, 정착민들이 영토 확장을 빌미로 왐파노아그 영토를 침범하면서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결국 필립왕 전쟁으로 왐파노아그족은 거의 멸망하고 이주민들의 본격적인 미대륙 침범의 야욕이 실현되었다.

현대에 왐파노아그족 후손은 약 2,756명 정도가 남아있으며, 추수감사절 무렵 '국가 애도의 날'이라는 시위를 통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고통과 끊임없는 저항의 역사를 대중에게 가르치고 있다.
[1] 2010년 연구 조사에서 이 전염병이 렙토스피로시스라고 주장하는 논문이 발표되었다.[2] 오늘 날의 매사추세츠 미들버러에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