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 ||
Olympique de Marseille | ||
<colbgcolor=#0b9bd5,#191919> 이름 | 파브리치오 라바넬리 Fabrizio Ravanelli | |
출생 | 1968년 12월 11일 ([age(1968-12-11)]세) 이탈리아 페루자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88cm | |
직업 | 축구선수(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감독 | |
소속 | <colbgcolor=#0b9bd5,#191919> 선수 | AC 페루자 칼초 (1986~1989) US 아벨리노 1912 (1989) 카세르타나 FC (1989~1990) AC 레지아나 1919 (1990~1992) 유벤투스 FC (1992~1996) 미들즈브러 FC (1996~1997)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8~2000) SS 라치오 (2000~2001) 더비 카운티 FC (2001~2003) 던디 FC (2003~2004) AC 페루자 칼초 (2004~2005) |
감독 | 유벤투스 FC (2011~2013 / 유스) AC 아작시오 (2013) FC 아르세날 키이우 (2018) | |
기타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2024~ / 고문) | |
국가대표 | 22경기 8골 (이탈리아 / 1995~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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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2. 클럽 경력
고향팀 페루자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하부리그로 처진 페루자에서 3시즌 간 90경기 41골로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세리에 B의 아벨리노가 그를 영입했다. 카세르타나 임대를 떠나서 또 좋은 활약을 펼치자 세리에 B의 다른 팀 레지아나가 그를 영입했고, 본격적으로 프로리그에 입문한 라바넬리는 1990-91 시즌 16골, 1991-92 시즌 8골로 프로에 성공적으로 안착한다.이후 명문팀 유벤투스 FC가 그를 전격적으로 영입했다. 로베르토 바조, 잔루카 비알리 등 포지션 경쟁자들이 죄다 국대급이었던 탓에 그는 교체출전에 만족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시즌 5골로 출전 시간 대비 좋은 결정력을 선보였다. 이 덕분에 그는 1993-94 시즌부터 선발 기회를 부여받기 시작했고, 이 기회를 라바넬리는 놓치지 않아 리그 9골을 넣으며 주전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비안코네리의 주전으로 올라서게 된 건 마르첼로 리피 감독 체제의 1994-95 시즌부터다 이 시즌 리그 33경기 15골로 커리어 하이 기록을 작성했고, 코파 이탈리아 6골, UEFA컵 9골로 시즌 도합 30골을 넣는 기염을 토한다. 이 시즌 리그, 컵 더블을 달성한 유벤투스는 1995-96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성공하게 되는데 이 때 라바넬리는 챔스 7경기에서 결승전 포함 5골을 넣으며 우승의 일등공신이 된다. 리그에서도 26경기 12골로 준수한 활약을 이어나갔다.
1996년 그는 돌연 잉글랜드로 이적하며 새로운 도전을 하기 시작한다. 지금같으면 흔한 일이겠지만, 당시 세리에 A보다 평가가 낮았던 프리미어리그에서도 하위권 팀인 미들즈브러 FC로 이적한 것이다. 그는 주니뉴 파울리스타와의 좋은 호흡으로 시즌 15골을 넣으며 제몫을 했지만 결국 부실한 수비가 발목을 잡아 2부리그 강등을 경험하게 된다. 한 시즌만에 짧은 잉글랜드 생활을 마감하고 1997년엔 프랑스로 건너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 입단했다. 여기서도 1997-98 시즌 리그 9골, 1998-99 시즌 리그 13골과 UEFA컵 7경기 출전 등 제 몫을 다 했고, 1999-00 시즌 전반기 14경기 6골을 넣으며 겨울까지 활약했다.
2000년 1월, SS 라치오가 그를 리그 우승의 승부수로 점찍고 영입해왔다. 이미 30대의 베테랑이 된 그는 당시 스타선수가 즐비했던 라치오에서 주전으로는 뛰지 못했다. 그래도 교체 위주의 출전에서 2골을 넣었고, 팀의 리그 우승과 코파 우승에 한 몫했다. 2001-02 시즌에도 부족한 출전기회였지만 시즌 6골로 여전한 골 감각을 유지했다.
2002년 다시 프리미어리그로 건너가 더비 카운티 FC에 입단했다. 어느덧 노장이 되었지만 더비에서 31경기 9골로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또 강등을 경험했다. 이번에는 바로 떠나지 않고 더비에 남아 2002-03 시즌 2부리그에서 19경기 5골을 넣었다. 이후 짧은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험을 거쳐 2003-04 시즌 세리에 A 팀이 된 그의 데뷔팀 페루자에 입단해 15경기 6골을 넣었다. 그러나 또 강등을 경험하며 2004-05 시즌 2부리그에서 한 시즌을 보낸 뒤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3. 국가대표 경력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공격진의 한 축을 담당했다. 유로 1996 예선 에스토니아전에서 A매치에 데뷔했고, 데뷔전 데뷔골까지 터뜨렸다. 이후 유로 본선 무대인 유로 1996에 출전해 2경기에 나섰다.1998 월드컵에서도 엔트리에 들었으나 부상을 당했고, 체사레 말디니 감독은 그 대신 엔리코 키에사를 데려가며 결국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1999년 마지막으로 국가대표에 소집된 뒤 국가대표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4. 플레이 스타일
90년대 중후반 이탈리아의 탑클래스 공격수였다. 188cm의 큰 키에도 빠르고 민첩한 편이었고, 가공할만한 왼발 킥력과 좋은 프리킥 능력을 갖췄으며, 테크닉은 평범했지만 어마어마한 활동량과 투지를 갖췄던 선수이다. 또한 2선 공격수와 윙포워드까지 소화 가능한 범용성이라는 장점을 가진 선수기도 했다.5. 감독 경력
2011년 유벤투스의 유소년 팀 감독으로 다시 축구계에 등장했다. 2013년까지 2년간 유스팀을 지휘했다.이후 2013년 6월, 프랑스의 AC 아작시오 감독에 선임되며 커리어 첫 성인 클럽팀 감독직에 도전했다. 하지만 12경기 1승 4무 7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거두고 결국 중도에 경질되고 말았다.
5년 뒤, 우크라이나 리그의 FC 아르세날 키이우 감독에 취임해 다시 한 번 프로 감독직에 도전했으나 9경기 1승 1무 7패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채 3개월만에 경질되었다. 이후 감독직을 다시 맡고 있지 않다.
6. 여담
- 지금은 규정상 더 이상 볼수 없지만, 한 때 여러 축구 선수들이 애용했던 상의를 얼굴 위로 덮어 쓰고 뛰어다니는 세레머니의 원조다. FIFA가 상의 탈의 세레머니를 2006년 전면 금지하자 라바넬리의 이름이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