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배경
젊은 파이크는 여느 빌지워터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학살의 부두에서 밥벌이를 시작했다. 매일같이 바다 밑 깊은 곳에 서식하는 거대한 괴물들을 끌어 올려 부둣가를 따라 늘어선 도살장으로 보내 가공하는 일이었다. 파이크가 일자리를 얻은 곳은 핏빛 항구라는 구역이었다. 쉴 새 없이 붉게 물드는 이곳의 목재 선대를 파도조차 씻어내지 못했기에 붙은 이름이었다. 파이크는 곧 이 일에 익숙해졌다. 끔찍한 작업과 변변찮은 급료 모두 말이다. 선장이나 선원들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고깃덩이를 내어주고는 그 대가로 금화가 두둑이 담긴 주머니를 받아갔다. 그러고는 파이크와 동료들이 그 고깃덩이를 팔기 좋게 토막 내는 것이었다. 호주머니 속의 구리 동전 몇 닢보다 더 나은 대가에 굶주리게 된 파이크는 간신히 배의 선원을 구슬릴 수 있었다. 전통적인 바다뱀 군도의 방식으로 사냥을 나설 만큼 용감한 자는 극히 드물었다. 사냥감에게 뛰어들어 맨손으로 견인용 갈고리를 꽂아야 했고, 살아 있는 동안 도륙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담하고 능숙한 파이크는 곧 최고의 작살잡이로 떠올랐고 몸값은 금으로 된 크라켄 주화 한 닢에 달했다.[1] 그는 더 거대하고 위험한 생물의 특정 기관에 비하면 살코기 따위는 고작 푼돈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산 채로 신선하게 채취해야 하는 내장 말이다. 바다 괴물들의 가격은 사냥의 난이도에 따라 정해졌고 빌지워터의 상인들이 가장 높게 쳐주는 생물은 바로 자울치였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이빨로 가득한 이 물고기의 입안에는 포낭이 여러 개 달려 있는데, 그 안에 든 사파이어 수액을 정제하면 다양한 마법에 사용할 수 있어 부르는 게 값이었음에도 룬테라 전역에서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다. 이 푸른빛을 내는 기름이 담긴 작은 유리병 한 개만으로도 배 열 척과 그만한 선원들을 고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경험 부족한 선장과 떠난 사냥에서 파이크는 자신 앞에 놓인 피비린내 나는 길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항구를 떠난 지 며칠이 지나고, 거대한 자울치 한 마리가 해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 쩍 벌어진 거대한 입속으로 줄지어 매달려 있는 사파이어 수액 포낭들이 보였다. 작살 몇 개가 날아가 꽂혔고, 파이크는 한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지금까지 만난 어떤 자울치보다도 크고 오래된 녀석의 입안으로 뛰어들었다. 막 공격을 시작하려던 찰나, 이 생물의 동굴처럼 깊은 목구멍에서 낮은 진동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곧 부글거리는 거품이 해수면 위에서 부서지며 자울치 무리가 나타나서는 작살의 밧줄과 이어져 있는 배의 선체를 밀어붙였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선장은 그만 파이크의 구명줄을 끊어 버리고 말았다. 괴수가 입을 다물기 직전, 이 불행한 작살잡이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광경은 파이크가 산채로 삼켜지는 장면을 지켜보는 동료 선원들의 공포에 찬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파이크의 무덤이 아니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바다 아래, 깊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심해에서 엄청난 압력에 짓눌리면서 여전히 굳게 다물린 자울치의 입속에 갇혀 있던 파이크는 다시 눈을 떴다. 주위에는 푸른 빛이 가득했다. 수천 개의 푸른 빛이 마치 그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고대의 신비한 메아리가 울리며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정신에 침투했다. 파이크는 환영 속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잃는 동안 동료들이 재산을 불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복수와 응징이라는 새로운 갈망이 파이크를 집어삼켰다. 배신자들의 시체로 심해를 채우리라. 처음에는 빌지워터의 모든 이들이 살인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본래 위험한 곳이었기에 이따금 붉은 파도가 밀려온다고 해도 특별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주가 몇 달이 되자 한 가지 공통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새벽마다 잔인하게 살해된 채로 버려진 선장들이 발견되는 것이었다. 술집에서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살인마의 짓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바다에서 버림받은 남자가 공포라는 이름의 저주받은 배에 탑승했던 선원들의 명부를 손에 들고 이들을 처단하며 돌아다닌다는 소문이었다. 한때는 존경과 명성의 상징이었던 "당신, 선장이오?"라는 질문은 이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곧이어 이 피의 숙청은 누수 기술자부터 일등 항해사, 무역상, 은행원에 이르기까지 학살의 부두와 관련된 모든 자를 대상으로 삼았다. 지명 수배자 명단에는 새로운 이름이 나붙었고, 이 악명 높은 핏빛 항구의 학살자에게 크라켄 주화 천 개라는 현상금이 걸렸다. 아득한 심해의 일그러진 기억에 홀린 채 움직이는 파이크는 수많은 자들이 실패했던 일에 성공했다. 배덕한 사업가들, 살인자들, 해적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을 불어넣은 것이다. 애초에 공포라는 이름의 배가 빌지워터에 정박한 적이 있었는지조차 아무도 모른다 해도 말이다. 괴물을 사냥한다고 자부했던 도시는 이제 괴물에게 사냥당하고 있다. 파이크는 멈출 생각이 없다. |
2. 그리고, 이빨
메이지어는 팔다리를 제멋대로 벌린 채 썩은 판자 위에 누워 있었다. 아래에서는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며 찰싹거렸다. 그녀의 심장이 느리게 뛸 때마다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 메이지어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멀리 있는 오두막집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그 너머의 별로 시선을 옮겼다. 파이크는 메이지어의 얼굴을 한 번 더 살펴봤다. 생기를 잃은 눈동자가 그의 마음을 후볐다. 자울치잡이 배는 누더기가 된 네 개의 돛을 달고 있었다. 파도는 집채만 했다. 긴 머리카락이 거친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갑판 위 수십 개의 얼굴이 지켜보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 겁에 질린 메이지어의 푸른 눈동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빨이었다. 메이지어어의 새하얀 치아가 아닌, 칼날만 한 끈적한 이빨이 배를 난도질했다. 빛이 사라져갔다. 어둠. 자울치의 입 속이었다. 구명줄이 길게 늘어졌다 싹둑 잘렸다. 자울치의 혓바닥은 미끈거렸다. 땀이 눈으로 흘러 들어가서 쓰라렸다. 붙잡을 곳 없는 손가락은 허공을 몇 번 휘저었다. 물 위로 올라가야 해. 헤엄쳐, 헤엄쳐... 자울치의 이빨은 꾹 다물려 있었다. 그러자 고통이 느껴졌고, 암흑이 느껴졌다. 배가 사라졌다. 눈동자도 함께 사라졌다. 메이지어의 눈동자 말이다. 갑판원이야. 그래. 거기에 있었어. 내 밧줄을 잘랐지. 파이크는 아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부츠를 신은 발로 메이지어의 몸통을 툭 찼다. 부두 끝으로 굴러갈 때까지 파이크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차자 메이지어가 떨어져 물에 떠올랐다. 곧이어 상어 떼가 몰려 들었다. 빙글빙글 돌다 메이지어를 낚아 챘다. 바다는 결코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바람결에 흘러오는 갈매기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들으며 파이크는 살생부에서 갑판원 메이지어를 찾았다. 양피지에 적힌 그녀의 이름에 붉은 줄이 그어졌다. 공포 호의 선원 명부에 적힌 마지막 이름이었다. 끝났다. 이제 살생부는 이름 대신 붉은 선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 잉크는 어디서 났더라...? 불안하고, 초조하고, 불만스러운 감정이 파이크를 갉아먹었다. 몸속에서 들끓는 증오가 요동쳤다. 끝난 게 아니다. 그날 갑판에는 선원들이 잔뜩 있었다. 아마 이 명부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수많은 동료들이 그를 죽게 내버려 두었다. 다른 소리가 들려 왔다. 갈매기도, 파도도,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수없이 들려오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라는 고함도 아니었다. 그 옛날 물에 잠겼던 도시에서 흘러나오던 기억 속의 음악도 아니었다. 새로운 소리, 살아 있는 소리였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말이다. 파이크는 눈을 돌렸다. 나무 계단이 무거운 발걸음에 휘어지고 있었다. 건장한 몸집의 남자가 물 위에 매여 흔들거리는 선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방에 흩뿌려진 핏자국을 본 그는 멈춰 서더니 한 손을 품속에 넣어 화승총을 꺼내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언제든지 발사할 준비를 한 채로. 이렇게 멍청할 데가 있나. 파이크는 달빛 아래로 한 발자국 걸어 나갔다. 남자는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입은 부두 은행원의 동전 지갑보다 굳게 다물려 있었다. 남자의 눈이 커지고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다 위를 떠다니는 해파리 같기도, 바람에 출렁이는 물결 같기도 했다. “누구냐?” 남자가 고함을 질렀다. 와서 확인해봐. 화승총은 파이크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섬광과 함께 탕 소리가 났다. 분명히 발사되었지만 나무판자가 박살났다. 파이크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파이크는 안개로 변했다. 소금기와 물방울로 이루어진 안개 말이다. 그에게 어울리는 안개였다. 파이크는 사람들이 자신을 유령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적 있었다. 그러니 절반은 맞는 말이다. 남자는 다시 총을 장전했다. 찡그린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에 파이크는 공기 중에서 그를 둘러싼 채 관찰했다. 탁한 갈색 눈동자는 겁에 질려 있었고, 허연 수염이 거칠게 자라나 있었다. 축 처진 턱살에 비뚤어진 코, 부르튼 입술에 뭉개진 귓불을 보니 선술집에서 무수히 지저분한 싸움을 벌여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선장 같군. 달콤하면서도 거친 두려움의 냄새를 풍긴다. 잔뜩 겁을 먹은 채 떨고 있는 익숙한 공포다. 선장의 냄새가 나는군. 파이크는 직접 확인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거구였던 데다가 바다가 준 사악하게 빛나는 눈동자 때문에 더 거대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름을 말하라'', 파이크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남자는 누군가가 등 뒤에서 불쑥 나타날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물론 지금까지 그걸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술집에서 떠들어대는 공상이나 악몽, 소설이라면 모를까 현실에서는 바지를 적시거나 앞으로 나동그라지는 게 전부였다. 이 건장한 선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꼴사납게 자신의 부츠에 발이 걸려 넘어져서는 통조림통처럼 계단을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파이크는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디뎠다. 녹서스의 갤리온선이 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무역선인가, 아니면 배역자의 배인가? 그에게 차이점은 없었다. 내가 이 계단을 다 내려갈 때까지 질문에 답하도록 해라. 남자는 돛이 흔들릴 정도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뭍 위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헐떡거렸다. 그는 투실투실한 손을 뻗으며 말했다. 기억이 나는군... 저벅. 하얗게 질린 손이 갑판의 난간을 붙잡았다... 저벅. 남자는 일어서려고 했지만 무릎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저벅. 넌 지켜보고 있었어. 저벅. 선창의 시궁쥐 한 마리가 종종거리며 다가왔다. 곧 저녁 식사 시간이다. 게다가 웃고 있었지. 남자는 더듬거렸다. 눈물까지 흘러나왔다. “제... 제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 저벅. 이름. “베케! 베케 니드!” 파이크는 계단을 한 칸 남겨둔 채 멈춰 서서는 살생부를 훑어보았다. 온통 붉은색이었다. 모든 이름에 줄이 그어져 있었다. 여기 있군. 베케 니드, 일등 선원. 그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은 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종이가 잘못 접혀 있었던 것이다. 베케 니드. 그래, 기억나는군. 그 배에 타고 있었지. “난 당신을 만난 적 없소! 오늘이 내 빌지워터에서의 첫...” 사람들은 작살잡이의 갈고리가 박히면 거짓말을 못 하지. 모르는 사실을 가지고 애원하거나 거래할 순 없으니까 말이야. 상어 뼈를 연마해서 만든 날은 쓸만한 도구였다. 강철보다 예리하여 살과 뼈를 부드럽게 분리했다. 베케는 버둥대면 버둥댈수록 고통이 커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두 눈은 진심으로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 눈동자가 파이크의 마음을 후볐다.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 파이크는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오도록 문을 열었고, 베크의 애원은 꾸르륵대며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자울치잡이 배는 누더기가 된 네 개의 돛을 달고 있었다. 파도는 집채만 했다. 제멋대로 자란 수염이 거친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갑판 위 수십 개의 얼굴이 지켜보고 있었다. 탁한 갈색 눈동자였다. 겁에 질린 베케 니드의 탁한 갈색 눈동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