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임마누엘 칸트
한자 | 判斷力批判 | ||||
독일어 | Kritik der Urteilskraft | ||||
영어 | Critique of Judgement |
1. 개요
임마누엘 칸트의 주요 저작 중 하나. 독일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과 더불어 3대 비판서로 불리며, 칸트의 3대 비판서 중에서 제일 나중에 나온 저서이다(1790년). <순수이성비판>은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실천이성비판>은 인간은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지를 다룬다면, <판단력비판>은 인간은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지를 다룬다고 할 수 있는데, 이 3대 비판서에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궁극의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칸트의 학문적 야망이 담겨 있다. 다만 판단력비판을 미학적으로 읽는 사람들 혹은 본 문서에서는 주로 판단력비판의 1부를 주로 다루나, 칸트의 3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칸트 스스로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 서술하였다고 논하였으니, 3번째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서 판단력비판을 읽는 사람들은 "종교"와 내용상 겹치는 2부(=목적론적 판단력비판 부분) 및 실천이성비판의 후반부 논의를 독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2. 목차
서언서론
Ⅰ. 철학의 구분에 관하여
Ⅱ. 철학 일반의 영역에 관하여
Ⅲ. 철학의 두 부문을 하나의 전체로 결합시키는 매개로서의 판단력의 비판에 관하여
Ⅳ. 선험적으로 입법적으로 능력으로서의 판단력에 관하여
Ⅴ. 자연의 형식적 합목적성의 원리는 판단력의 초월적 원리이다
Ⅵ. 쾌의 감정과 자연의 합목적성의 개념의 결합에 관하여
Ⅶ. 자연의 합목적성의 감성적(미감적) 표상에 관하여
Ⅷ. 자연의 합목적성의 논리적 표상에 관하여
Ⅸ. 지성의 입법과 이성의 입법과의 판단력에 의한 결합에 관하여
제1부 감성적(미감적) 판단력의 비판
제1편 감성적(미감적) 판단력의 분석론
제1장 미의 분석론
취미판단의 제1계기 : 성질
§1. 취미판단은 감성적(미감적)이다
§2. 취미판단을 규정하는 만족은 일체의 관심과 무관하다
§3. 쾌적한 것에 관한 만족은 관심과 결합되어 있다
§4. 선에 관한 만족은 관심과 결합되어 있다
§5. 종별적으로 상이한 세 가지 만족의 비교
취미판단의 제2계기 : 분량
§6. 미란 개념 없이 보편적 만족의 객관으로서 표상되는 것이다
§7. 상술한 특징에 의한 미와 쾌적 및 선의 비교
§8. 취미판단에 있어서 표상되는 만족의 보편성은 단지 주관적인 것이다
§9. 취미판단에 있어서 쾌의 감정이 대상의 판정에 선행하는가, 또는 대상의 판정이 쾌감에 선행하는가 하는 문제의 구명
취미판단의 제3계기 : 취미판단에 있어서 고찰되는 목적의 관계
§10. 합목적성 일반에 관하여
§11. 취미판단의 기초는 대상의(또는 대상의 표상방식의) 합목적성의 형식 뿐이다
§12. 취미판단은 선험적 근거에 기초를 둔 것이다
§13. 순수한 취미판단은 자극과 감동에 무관하다
§14. 실례에 의한 증명
§15. 취미판단은 완전성의 개념에는 전혀 무관하다
§16. 어떤 대상을 일정한 개념의 조건하에서 아름답다고 언명하는 취미판단은 순수하지 않다
§17. 미의 이상에 관하여
취미판단의 제4계기 : 대상들에 관한 만족의 양상
§18. 취미판단의 양상이란 무엇인가
§19. 우리가 취미판단에 부여하는 주관적 필연성은 제약된 필연성이다
§20. 취미판단이 주장하는 필연성의 조건은 공통감의 이념이다
§21. 우리는 공통감을 전제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22. 취미판단에 있어서 사유되는 보편적 동의의 필연성은 주관적 필연성이지만, 공통감의 전제하에 있어서는 객관적 필연성으로서 표상된다
분석론 제1장에 대한 총주
제2장 숭고의 분석론
§23. 미의 판정능력으로부터 숭고의 판정능력에로의 이행
§24. 숭고의 감정의 연구의 구분에 관하여
A. 수학적 숭고에 관하여
§25. 숭고의 어의
§26. 숭고의 이념에 필요한 자연사물의 크기의 평가에 관하여
§27. 숭고의 판정에 있어서의 만족의 성질에 관하여
B. 자연의 역학적 숭고에 관하여
§28. 위력으로서의 자연에 관하여
§29. 자연의 숭고에 대한 판단의 양상에 관하여
감성적(미감적) 반성적 판단의 해명에 대한 총주
순수한 감성적(미감적) 판단의 연역
§30. 자연의 대상들에 관한 감성적(미감적) 판단의 연역은 우리가 자연에 있어서 숭고하다고 부르는 것에 적응될 것이 아니라, 단지 미에만 적응되면 된다
§31. 취미판단의 연역의 방법에 관하여
§32. 취미판단의 제1특성
§33. 취미판단의 제2특성
§34. 취미의 객관적 원리란 있을 수 없다
§35. 취미의 원리는 판단력 일반의 주관적 원리이다
§36. 취미판단의 연역의 과제에 관하여
§37. 취미판단에 있어서 본래 대상에 관하여 선험적으로 주장되는 것은 무엇인가
§38. 취미판단의 연역 : 주해
§39. 감각의 전달가능성에 관하여
§40. 공통감의 일종으로서의 취미에 관하여
§41. 미에 대한 경험적 관심에 관하여
§42. 미에 대한 지적 관심에 관하여
§43. 기술 일반에 관하여
§44. 미적 예술에 관하여
§45. 미적 예술은, 그것이 동시에 자연인 것처럼 보이는 한에 있어서, 예술이다
§46. 미적 예술은 천재의 예술이다
§47. 천재에 관한 위의 설명의 해명과 확증
§48. 천재와 취미와의 관계에 관하여
§49. 천재를 이루는 심적 능력들에 관하여
§50. 미적 예술의 산물에 있어서의 취미와 천재와의 결합에 관하여
§51. 미적 예술의 구분에 관하여
§52. 동일 작품에 있어서의 여러 미적 예술의 결합에 관하여
§53. 여러 미적 예술 상호간의 감성적(미감적) 가치의 비교
§54. 주해
제2편 감성적(미감적) 판단력의 변증론
§55.
§56. 취미의 이율배반의 제시
§57. 취미의 이율배반의 해결
§58. 감성적(미감적) 판단력의 유일한 원리로서의 자연 및 예술의 합목적성의 관념론에 관하여
§59. 도덕성의 상징으로서의 미에 관하여
§60. 부록. 취미의 방법론에 관하여
제2부 목적론적 판단력의 비판
§61. 자연의 객관적 합목적성에 관하여
제1편 목적론적 판단력의 분석론
§62. 실질적 합목적성과 구별되는, 단지 형식적인 객관적 합목적성에 관하여
§63. 내적 합목적성과 구별되는 자연의 상대적 합목적성에 관하여
§64. 자연목적으로서의 사물의 특유한 성격에 관하여
§65. 자연목적으로서의 사물들은 유기적 존재자들이다
§66. 유직적 존재자에 있어서의 내적 합목적성을 판정하는 원리에 관하여
§67. 목적의 체계로서의 자연 일반의 목적론적 판단의 원리에 관하여
§68. 자연과학의 내적 원리로서의 목적론의 원리에 관하여 제2편 목적론적 판단력의 변증론
§69. 판단력의 이율배반이란 무엇인가
§70. 이 이율배반의 제시
§71. 위에 든 이율배반을 해결하기 위한 준비
§72. 자연의 합목적성에 관한 여러 가지의 체계들에 관하여
§73. 위에 든 체계들은 어느 것도 그 주장하는 바를 성취하지 못한다
§74. 자연의 기교라는 개념을 독단적으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한 원인은 자연목적을 설명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75. 자연의 객관적 합목적성의 개념은 반성적 판단력에 대한 이성의 비판적 원리이다
§76. 주해
§77. 우리에게 자연목적의 개념을 가능케 하는 인간 지성의 특질에 관하여
§78. 자연의 기교에 있어서의, 물질의 보편적 기계적 조직의 원리와 목적론적 원리와의 합일에 관하여
부록 : 목적론적 판단력의 방법론
§79. 목적론은 자연학에 속하는 것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되는가
§80. 어떤 사물을 자연목적으로서 설명할 때에는, 기계적 조직의 원리는 목적론적 원리 아래에 필연적으로 종속된다는 데 관하여
§81. 자연산물로서의 자연목적을 설명함에 있어서 기계적 조직이 목적론적 원리에 부수된다고 하는 데 관하여
§82. 유기적 존재들의 외적 관계에 있어서의 목적론적 체계에 관하여
§83. 목적론적 체계로서의 자연의 최종목적에 관하여
§84. 세계의 현존재, 즉 창조 그 자체의 궁극목적에 관하여
§85. 자연신학에 관하여
§86. 윤리신학에 관하여 : 주해
§87. 신의 현존재의 도덕적 증명에 관하여
§88. 도덕적 증명의 타당성의 제한 : 주해
§89. 도덕적 증명의 효용에 관하여
§90. 신의 현존재의 목적론적 증명에 있어서의 의견의 종류에 관하여
§91. 실천적 신앙에 의한 의견의 종류에 관하여
목적론에 대한 총주
3. 해설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다룬 내용은 오늘날 미학의 주요한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다. 『판단력 비판』은 '어떻게 우리에게 취미판단으로서의 선험적 종합 판단이 가능한지'를 다룬다. 즉, 우리가 가진 취향이 이미 가지고 태어난 것인지, 그 취향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 판단하는지, 그 취향에 따른 판단이 종합적 판단으로 확대되는 것이 가능한지 따진다.칸트는 자연을 인식하는 능력인 순수이성(현상계)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결정하는 능력인 실천이성(이성적 이념) 사이를 연결하려 시도한다. 즉 경험으로 아는 물질계의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지성(verstand; understanding)[1]과 철학적으로 어떻게 살것인지 윤리적인 생각을 하게 해주는 이성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한 것이다. 칸트는 이것이 감정을 판단하는 능력, 즉 쾌와 불쾌를 판단하는 판단력을 통해 가능하리라 기대한다. 그리고 이를 미, 숭고, 합목적성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살펴본다.
칸트는 '판단력'을 '특수를 보편에 포섭시키는 능력'으로 규정하였는데, 특수는 개별자 즉 개별적인 대상을 뜻하며 보편에는 원리, 원칙, 법칙, 개념이 해당한다. 그렇다면 '판단'이란 '특수를 보편에 포섭시키는 행위' 정도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판단이란 인간이 특수 즉 개별적 대상을 접하고 그 특수의 속성을 관찰하여, 그 속성을 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는 원리, 원칙, 법칙을 찾아 오거나 그 속성이 제대로 부합하는 개념을 찾아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칸트는 이 판단력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는데,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이 그것이다. 분류의 기준은 '보편이 주어져 있는지의 여부'이다. 이미 주어져 있다면 전자, 주어져 있지 않다면 후자로 분류된다.
- 규정적 판단력: 특수를 이미 주어져 있는 보편에 포섭시키는 능력이다. 의사의 진단, 심판의 판정, 판사의 판결 따위가 이에 해당하며, '이것은 펜이다' 따위의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판단들은 대부분이 이에 속하기 마련이다. 이는 객관적이다.
- 반성적 판단력: 특수만이 주어져 있는 상황에서 그 개별자가 포섭되면 좋을 '그럴싸한' 보편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철학에서 사용하는 탐구태도와 유사할 듯. 칸트에 따르면 반성적 판단력에는 지성과 상상력이 필요하며, 엄밀한 객관성과 필연성을 단언할 수 없기에 이는 주관적이다.
그리고 반성적 판단력을 다시 미감적 판단력과 목적론의 판단력으로 나눈다.(위의 목차 분류에서 가장 상위에 해당) 칸트는 이 중에서 미적 판단력을 다루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 미감적 판단력: 말 그대로 아름다움을 평가하는 능력이다. 우리가 꽃이나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든다고 느끼는 것이 대표적이다. 칸트는 이를 주관적 취미판단으로 정의한다.
- 목적론적 판단력: 이는 목적론적 사고에 의거해 대상의 합목적성을 따지는 능력이다. 자연의 합목적성을 평가하는 능력이다. 칸트는 이를 반성적 취미판단으로 정의한다.
칸트는 이 미적 판단력(감성적 판단력, 미감적 판단력, 취미판단)력을 성질, 분량, 관계, 양상의 4가지 측면에서 살펴본다. 그리고 이에 따라 취미판단의 4가지 특성을 정리하는데, 그것이 바로 무관심성, 주관적 보편성, 목적없는 합목적성, 주관적 필연성이다.
- 취미판단의 제1계기: 성질의 범주에 따른 고찰 → 무관심성
- 취미판단의 제2계기: 분량의 범주에 따른 고찰 → 주관적 보편성
- 취미판단의 제3계기: 취미판단에서 고찰되는 목적의 관계 → 목적없는 합목적성
- 취미판단의 제4계기: 대상들에 관한 만족의 양상 → 주관적 필연성(공통감)
더 쉽게 이를 요약하면 without interest, concept, purpose으로 요약할 수 있다. 취미판단의 4가지 특성을 다시 상세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 : 다른 말로는 무사심성이라고도 한다. 칸트는 미적 대상을 느낄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어떤 이해관계없이 보고 만족한다고 보았다. 칸트의 관점대로라면, 우리가 음식이나 섹시함이나 돈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진정한 미가 아니다. 반면 흘낏 아무런 관심없이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꽃잎이나 유리조각을 '사심없이' 아름답다고 느꼈다면, 그건 미이다. 한마디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과정에는 다른 일체의 개입요소 없이 그냥 아름답다고 느끼는 게 전부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무관심성은 소위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을 주장하는 예술가나 이론가들 사이에서는 거의 금과옥조처럼 여겨진다. 예술가는 그냥 예술이 좋아서 하는 거고, 예술애호가는 그냥 예술이 좋아서 감상하는 거라는 식의 예술지상론이 이 무관심성에 근거하고 있다. 다른 말로 이를 예술의 자율성(autonomy)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미적 판단은 정치나 경제 등 다른 어떤 요소에 종속되지 않는 자율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이 무관심성이 정말인지는 후대의 미학자들이나 예술이론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렇게 따지면 오늘날 경매에서 비싼 값에 거래되는 예술품들은 전부 무관심성에 위배되는 것이 된다. 그냥 투기하기 위해 사는 거지 아름다워서 사는 게 아니게 되니까 말이다. 반대로 이렇게 따지면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회참여예술 같은 것도 성립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건 엄밀히 말하면 무관심성에는 위배된다. 따지고 보면 소녀시대 맴버들의 여성적 매력 등에 끌리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주관적 보편성: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게 얼마나 형용모순인지 알 것이다. 보편성은 객관성을 전제로 한다. 나는 A라고 보는데, 남이 B라고 본다면, 그건 A가 아닌 거다. 모두가 A라고 객관적으로 봐야 그건 A라는 보편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미적판단, 주관적 취미판단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소녀시대를 좋아할 때 그 좋아하는 취향 자체는 순전히 주관적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중에서도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팬덤으로 묶인다. 만약 미가 순전히 주관적이기만 한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은 다 다른 걸그룹을 좋아해야 하고 서로들의 취향이 일치하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걸그룹이나 미인상이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그 까닭으로 칸트는 모든 인간에겐 공통감각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통감각에 대해서는 4번 참고.
- 목적 없는 합목적성 : 다른 말로 무목적적인 합목적성. 칸트는 미적 취미 판단은 목적없는 합목적성을 따른다고 봤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대상의 미를 고찰할 때, 이는 객관적, 규정적이지 않고, 주관적, 반성적, 통제적, 규제적이다. 쉽게 말하면, 물리학적 사실처럼 정확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사람이 느끼는 순간마다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반성하듯 생각하면서 그게 아름다운지 아닌지 판단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칸트는 합목적성은 강제성이 없으며, 단지 그렇게 하도록 요청될 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특별히 딱히 소녀시대를 좋아해야 할 목적이나 당위성이 없지만, 그럼에도 소녀시대를 좋아하고, 자기 멋대로 정한 그 목적에 따라 온갖 덕질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아름답게 느껴야만 하는 의무는 없다. 아름다움을 느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목적을 느끼며 살지 않음에도, 뭔가를 좋아하고 아름다움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예술은 목적성이 없는 짓이지만, 그 예술을 좋아하고 목적에 부합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즉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느낄 줄 알며, 이는 따로 그렇게 하라고 목적을 부여하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정말 참된 미를 가진 것이라면, 우리는 자연스레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 주관적 필연성(공통감각) : 칸트는 미적 판단(주관적 취미 판단)이 이론적 인식(경험)과 실천적 인식(선험)을 매개한다 본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주관적인 미적 감정이 객관적, 보편적인 판단처럼 여겨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주목한 칸트는 공통감각을 취미판단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주관적 감정에 따르는 취미 판단이 근거하는 보편적 원리. 칸트에 따르면, 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저것은 아름답다'는 데 동의하게 해주는 공통적인 상식이다. 즉 다시 말하면, 주관적 보편성이 가능하려면 곧 공통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칸트는 이 공통감각에 의거하는 취미판단은 합목적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반론이 가능하다.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팬덤이 많기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다른 걸그룹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칸트가 말한 미적 판단의 특성들은 굉장히 이상적인 것들이다. 만약 정말 칸트가 말한 것처럼 우리 인간들 모두가 사심 없이 순전히 좋아라 하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세계평화 실현일 것이다.
이를 요즘 식으로 설명하면, 우리는 취향은 다 다르지만 뭔가 좋아하는 게 있다. 칸트는 이를 보편화해 나아가, 우리 모두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이것이 서로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 본 것이다. 칸트는 이 취미 판단을 통해 이론적 인식(경험)과 실천적 인식(선험)을 매개할 수 있다 보았다.[4]
칸트는 이러한 4가지 특성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을 미와 숭고로 나눈다.
- 미(beauty): 칸트는 미를 지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로 정의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지성은 경험적 대상을 분류하고 규정, 정의하려는 인식능력이다. 반면 상상력은 판단력 산하에 있는 능력으로, 자유롭고 창조적인 정신행위이다. 상상력은 앞서 말한 무목적성을 가지며, 따라서 그 자체로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 당연히 이는 앞서 이야기한 예술지상주의(예술을 위한 예술)과 연관된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낄 때 자기목적성, 자기지시성을 따른다.(앞서 말한 무관심성)
그리고 칸트는 미적 쾌의 감정은 결코 사물이 주는 감각적 느낌이나 대상의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봤다. [5] 사물화된 것(예술품 같은 것)을 볼 때의 경험은 인식행위가 된다. 진정한 취미판단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미는 개념을 떠나 보편적으로 만족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합목적성에 의해서, 미적 쾌(만족)는 궁극의 목적을 항한다고 한다. 인간이 제작한 미술작품에 대한 평가는 단지 성질, 분량, 관계, 양상에 근거하여 형식적으로 미의 정도를 파악하는 것일 뿐이다.[6]
- 숭고(sublime): 아름다움은 일차적으로 모든 대상의 형상에 관계하나 숭고는 우리가 대상의, 그것도 어떤 무한한 크기에 대하여 느끼는 심미적 정서이다. 이것은 조화와 질서가 아닌 혼란과 무질서에 의해 유발된다.
칸트는 숭고를 논한 로마시대 학자 디오니시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인용한다. 롱기누스에 따르면 숭고는 신적인 것이며, 거대한 크기의 감각적 자연을 통해서 파악되며, 그 안에서 완결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칸트는, 자연물은 단지 이성적 이념을 매개하는 감성적 대상일 뿐이며, 크기를 존재론적으로 완결짓는 요소로 이해하지 않는다. 칸트에게 있어 숭고한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이성의 관념이다.
칸트는 숭고를 다시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구분한다.
- 수학적 숭고 : 단적으로 말하면, 매우 매우 큰 것이다. 칸트는 대표적으로 피라미드를 예시로 들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이라고 했다. 요즘식으로 굳이 말한다면 우주나 수학의 무한 개념을 생각해보자. 이 수학적 숭고를 느낄 때 인간은 감정, 인지, 사고 능력의 한계로 그 크기를 인식하지 못할 정도가 되고, 이 때 눈 앞의 감성적 자연은 '절대적으로 큰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조화나 규칙을 느끼게 되는 미와 달리(황금비를 생각해보자), 수학적 숭고는 아예 인지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그런 조화나 규칙을 발견할 수도 없고,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끼는 게 아니라 도리어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처음에 수학적 숭고에 부합하는 어떤 것을 접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합목적적인 게 아니라 도리어 반목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고 한다. 굳이 표현하면 아름답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크기에 전율하며 압도당하게 된다고 할까? 칸트에 따르면 숭고의 감정은 불쾌의 감정이다. 이 불쾌감은 인간의 상상력이 이 끝없는 무한한 것을 완전히 그려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에 좌절하기 때문에 나온다. 인간은 감성적 자연 내에서 절대적 총체성의 이념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감각적 사유 작용인 이성은 전체로서의 무한을 사유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성이 자연의 한계를 넘어섬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에 불쾌는 쾌로 전이되고 전체를 합목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역학적 숭고 : 수학적 숭고가 대상의 양적 크기를 그 중심 계기로 삼았다면, 역학적 숭고는 대상의 힘의 크기가 관건이 된다. 수학적 숭고가 우주나 무한처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어떤 것이라면, 역학적 숭고는 폭풍이나 원자폭탄처럼 역동적으로 크게 휘몰아치는 힘이다. 다만 이 역학적 숭고를 느끼려면 '공포'와 '안전', 두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강화유리벽이 설치된 튼튼한 건물 안에서 경험할 때에는 그 허리케인을 숭고롭게 보게되지만, 밖에 나가서 그걸 겪게 되면 끔살당한다. 어쨌든, 역학적 숭고는 대상의 힘의 크기가 무한한 것처럼 판정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판단력 비판』에 대해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길 원한다면 다음 문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김상현, 『칸트 판단력 비판』(토픽맵에 기초한, 철학 고전 텍스트들의 체계적 분석 연구와 디지털 철학 지식지도 구축), 철학사상 별책 제5권 제6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5.
참고로 위 칸트의 미학론에 대한 내용은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시험 지문으로 출제되어 수많은 학생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준 것으로 유명하다. 문제가 많은 칸트 씨
4. 초판 서문
"판단력비판"의 서문은 초판과 재판의 서문이 서로 다른데, 당초 칸트는 "판단력비판"을 끝으로 자신의 철학이 완결되었다 생각, 앞서 출간된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의 요지와 3대 저작의 상관성에 대해 장황한 서문을 써서 덧붙였다. 하지만 이후 자신의 철학에 보충할 부분이 더 있음을 깨달았고 마침 출판사로부터 독자들이 "서문이 너무 길다"고 불평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재판본에서는 초판본의 서문을 삭제하고 새로 서문을 써서 덧붙였다. 다만 초판 서문에는 3대 비판서에 대한 칸트 본인의 설명이 들어있는 만큼, 칸트 3대 비판서를 독파할 사람이라면 우선적으로 읽어아 하는 부분이라 현재 국내에 번역된 판본들(이석윤 역, 백종현 역)은 초판 서문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1] Verstand: 영어로는 보통 "Understanding"으로 번역된다. 도올 김용옥은 기존 번역어 '오성(悟性)'이라는 표현은 그냥 이해력이나 비슷한 개념을 의미하는 'understanding'을 번역한 것인데, 번역자들이 불필요한 지적 허세를 부리려고 오성이라는 어려운 용어를 썼다고 비판한 바 있다. 21세기 이후 한국의 칸트 번역에서는 "Verstand"를 '지성(知性)'으로 번역하는 진영도 늘어나는 중이다. 이들은 Verstand가 오성의 깨달을 '오(悟)'처럼 어떤 대오각성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고하고 개념화하고 판단하고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 즉 '앎'의 능력이므로 알 '지(知)'를 써서 지성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성은 사고, 개념화, 판단, 인식, 이해를 모두 포괄하는 데 반해 이해력은 '이해'에만 한정된 능력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2] 흄도 이 부분에는 동의하였다. "아름다움은 사물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 안에 있다."[3] 엄밀히 말하자면 '소녀시대를 좋아하'는 것은 미를 느끼는 일 이라 할 수 없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있어 단순히 '좋아함'은 개인적 만족감과 크게 결부된다. 즉 취미판단의 첫 번째 조건인 무관심적 만족감 부터 이미 위반하는 것. 또한 13절. 순수한 취미판단은 매력과 감동에 독립적이다. 16절. 어떤 대상을 일정한 개념의 조건 아래서 아름답다고 언명하는 취미판단은 순수하지 않다- 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느끼는 것은 칸트가 말하는 취미판단의 과정에서 미 라고 판단하기 어렵다.[4] 18세기 당시 사람들처럼 칸트 역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철학은 결국 신으로 귀결된다. 기존의 종교적 가치와 자신의 철학적 사유가 조화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우리는 원래 태어날 때부터 (선험적으로, 즉 신이 만든 대로)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탑재하고 있다 본 것이기도 하다. 반면 당시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윤리적 행동도 경험으로 훈련되어야만 할 수 있다 보았다. 칸트는 영국 경험론과 대륙 합리론을 조화시킨 것이고,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칸트를 대단하다 여기는 것이다.[5] 칸트의 말을 정말 제대로 따른다면, 진정한 미는 사물화, 구체화할 수 없다. 반면 이전 예술가들은 자기 작품이 아름답다고 했으니... 둘 중 하나가 틀린 셈.[6] 사실 그래서 미학자들이 어쩔 수 없이 예술작품을 놓고 예를 들며 설명하긴 하지만, 미학자들은 그걸 진짜 아름다움 그 자체일 것이라 확정하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어디까지나 흘낏 미의 특성을 보여주는 예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