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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3 03:52:34

페이퍼코리아

페이퍼코리아
PAPERCOREA
파일:페이퍼코리아_CI.jpg
명칭 페이퍼코리아 주식회사 / PAPERCOREA
기업형태 중견기업
설립일 1944년 10월 9일[1]
주소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외항로 1245
대표이사 권육상
매출액 4841억원[2]
영업이익 346억원[3]
홈페이지

1. 개요2. 역사
2.1. 역대 로고2.2. 참조
3. 계열사4. 기타/여담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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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지회사.

2. 역사



일본 대표 제지회사였던 오지제지(王子製紙)가 함경북도 길주에 북선제지화학공업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자회사로 1934년부터 공장 건설을 시작하여 1935년 12월 시설 완공 후 시험가동에 들어갔는데 당시 자본금 2,000만원이 들었고 최초 500만원이 납입되었다.오지제지가 50% 지분 보유하였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등이 출자하였다. 이것은 북선제지가 당시 식민지 공업화를 추진하던 조선총독부와 맞물려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화신백화점박흥식도 대주주로 참여하였다 한다. 초반에는 연간 펄프 2만톤 가량을 생산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이후 시설을 확장하며 2만 7천톤 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며 일본 전시체제기에는 주요 군수공장의 역할도 하였다.

1943년 조선총독부는 북선제지화학에 제2공장 건설을 종용한다.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악화되면서 선박 부족 및 일본 내 생산능력 저하로 제지의 수급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에 북선제지화학은 당초 방직공장 건설을 위해 조성했던 군산의 공장부지에 1943년 1,000만원 규모로 공장 건설을 계획하여, 44년 10월 제지 공장을 완공 후 조업에 나섰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후 미군정은 군산공장을 적산으로 인정하여 귀속시켰다.[4] 당시 미군정은 경성고무회사 이만수[5] 사장을 공장 관리자로 임명했으나 이 사장이 미군정과 소통의 한계를 드러내며 문제가 일어나자 관리직에서 물러나고 그 뒤로 전주중 교사였던 김원전씨가 2대 관리직에 임명되었다. 그가 임명되고 규모가 점차 늘어나며 당시 국내 제지업계를 주도하였다.[6]

한국전쟁 동안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 뒤로 공장 복구에 힘 써서 51년 정상가동을 시작했으며 정부에서도 당시 지류 수급문제가 커지자 해당 공장에 막대한 원조자금을 투입하였다 한다. 다만 당시 위기가 왔는데 해당 공장을 불하하는 문제였다. 김원전씨의 증언에 따르면 장면 내각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한 사학재단에서 해당 공장을 불하받으려 했고 그걸 가만히 앉아서 뺏길 수 없었던 김원전씨가 우자형씨와 연합신문과 힘을 합쳐서 결국 낙찰을 받아 인수를 했고 1954년 고려제지 (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며 초대 사장에 김원전씨가 취임하였다. 그러다 동업을 하던 우자형씨와 관계가 끊어지고 김씨의 1인 경영체제로 바뀌게 되었고 당시 정부의 제지공장 부흥계획에 따라 비약적 성장을 하게 되었다.

1965년엔 풍국제지란 회사를 인수하면서 신문용지 외 편면지 공장까지 거느리게 되고 1966년에는 연간 생산능력 2만 톤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로도 동원탄광, 부간산업, 수중광업, 한양수산 등 여러 회사를 인수하면서 몸집을 불렸지만 너무 문어발식 확장을 한 것에 더불어 사장인 김원전씨가 정계에까지 진출하려 하는 등 욕심을 부리면서 기업의 쇠락을 불러오게 되었다. 특히 5.16이후 군사정권이 고려제지에 대한 자금지원 중단을 해버리는 등 지원이 거의 사라져버렸으며 경영난에 고려제지는 정부에 상업차관을 신청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 차관을 한 푼도 받지 못했고 고려제지는 생산실적이 점차 감소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임금까지도 밀리는 상황에 이른다. 종업원들까지 공장 정상화를 위해 노력을 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고 당시 정부에선 1972년 9월 고려제지를 공매처분하고 주채무은행이었던 조흥은행이 12억원에 낙찰을 받게 되면서 고려제지는 망하게 되었다.

조흥은행은 1973년이 공장을 공매 입찰에 넘겼고 고판남씨가 1962년 11월 창립한 한국합판이란 합판회사가 37억 7,000만원에 입찰받았고 고려제지의 고용승계를 하면서 새 주인이 되었다. 동 년 3월 한국합판은 제지산업을 전담할 세대제지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니 당시 고려제지의 경영난을 발판 삼아 전주제지가 국내 1위 자리를 빼앗았고 세대제지 측에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 하였으며 당시 일본 오지제지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976년 세대제지의 한 간부가 일본 홋카이도에 있는 오지제지 공장 중 하나인 도마꼬마이공장에서 약 1개월간 선진제지기술을 배우던 중 신형 박피기인 드럼바커(Drumbarker)의 설계도면을 얻어와 국내 최초로 군산공장에 설치하게 되었는데 그 신형 박피기는 처리시간 대폭 단축 및 전력소비와 소음문제까지 해결하는 효용성을 보였고 나중에 전주제지가 세대제지를 본떠서 자기들 공장에서 드럼바커를 설치했다고 한다.

1981년 세대제지는 고판남 사장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아들인 고병옥 부사장을 사장으로 취임시키며 2세 경영체제로 돌입하였다. 1981년 고판남 회장이 3월 25일 열린 제11대 총선에 군산시·옥구군 지역구로 해서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기 때문기도 했다. 고병옥 사장이 부사장 시절 초지기를 3호기까지 늘리고 최신예기기라 불린 N-1호 초지기까지 도입하면서 생산능력면에서 동종업계 중 1위로 재등극하는 업적을 남겼다 한다. 그러다 1985년 한국합판은 국제 경쟁력 제고 및 계열기업 재편성 목적으로 세대제지를 흡수합병하고 회사명을 (주식회사) 세풍 으로 바꾸었다. 당시 합판산업이 70년대 후반 기준으로 고비를 겪으며 사양화되는 분위기라 합판 감산을 위해 합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면서 제지사업에 총력을 기울이려 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또 다시 전주제지가 생산시설 증설로 세풍에 위기가 찾아오자 세풍 측에선 공장 증설에 박차를 가해 1990년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과 N-2호 초지기 도입계약 체결을 맺었고 92년 9월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다시 세풍의 연간 생산능력은 크게 증대되었다. 그러다 세풍에게 위기가 찾아오는데 계열사를 무리하게 늘리는 과정에 자금난에 봉착하며 1998년 워크아웃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매각작업을 진행하게 된 채권단 및 회사는 2002년 10월 정보통신업체이던 버추얼텍과 2023억원에 매각을 위한 본계약을 체결했는데 이에 대해 제지와 전혀 다른 업종 회사가 어떻게 회사를 운영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버추얼텍이 어떻게 자기보다 10배 가량 큰 규모의 세풍을 인수한 것인지에 대한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했었다. 버추얼텍은 구형우 전 한솔그룹 부회장을 회장으로 영입해 새로운 경영진을 구성했고 2003년 2월 회사 이름을 세풍에서 현재 사명인 페이퍼코리아(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 2017년 연합자산관리주식회사인 유암코에서 최대 주주로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2.1. 역대 로고

파일:oji_old_logo.png
고려제지
1944년 1954년
파일:세대제지공업주식회사.png
파일:주식회사 세풍.png
1973년 1985년
파일:페이퍼코리아_CI.jpg || ||
2003년 ~ 현재

2.2. 참조

3. 계열사

4. 기타/여담

파일:페이퍼코리아 구 부지.png
붉은 선으로 둘러싸인 부분이 페이퍼코리아가 위치했던 지역이다. 페이퍼코리아는 2011년 군산시와 공장 이전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4년여간 논의 과정을 거친 후 2015년부터 공장 이전에 착수했고 조촌동 공장이 있던 자리는 디 오션시티 조성사업이 진행중이다.
* 페이퍼코리아선이라고 해서 군산화물역부터 페이퍼코리아 공장까지 이어지던 3km가 넘는 철도 노선이 있었다. 2008년 6월 페이퍼코리아 측에서 철도노선 사용중단을 하였다.
* 김길준 민선 1,2대 군산시장의 이야기에 따르면 (주)세풍의 계열사인 세풍건설에서 자기에게 F1그랑프리를 군산에서 개최하자고 찾아왔는데 폐 염전 167만평을 용도변경해 자동차 경주대회를 하자는 제안이었다. 전북도지사와 군산시장이 합의해야 용도변경이 가능한데 당지 도지사는 오케이 했다 하고 세풍건설 측에선 F1 그랑프리 본고장 영국을 가보자 제안했다 하나 김 시장은 군산 사업이니 군산시에서 알아서 하겠다 밝히고 일본을 벤치마킹했다 한다. 다만 당시 군산은 위치적으로 볼 때 자동차 경주대회 성공을 장담하기도 힘들단 생각과 폐 염전을 준공업지역으로 용도변경시 공시지가가 10배나 올라가는데 167만평에 대한 차익이 어마어마했다 한다.
김 전 시장은 우선 세풍 측에 167만평 중 20만평을 군산시에 기증하라 요구했고 그 곳에 퍼블릭 골프장, 노인 편의시설을 만들고자 했으나 도지사나 정치권에서 압박을 가해 20만평이 아닌 10만평만 받고 용도변경을 해 줬다 하는데 공사 시작 전 사진 한 장만 딸랑 찍고 공사가 중지되었다 이야기하며 염석호 당시 (시장) 비서실장에 따르면 허가서에 'F1그랑프리 대회를 안 할시 용도를 원 상태로 돌린다'는 조건을 달고 용도변경을 해줬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세풍건설 측이 용도변경 이후 은행에서 997억원을 대출받았는데 세풍 측에서 공사를 제대로 시작도 안하니 군산시에서 용도를 원 상태로 돌려버렸고[8] 은행 측에선 해당 땅 값어치(공시지가)가 원래대로 뚝 떨어지니 난리가 나 세풍 측에 압력을 가했고 이 역풍을 당시 유종근 도지사가 지게 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한다. 결국 김 시장 이야기는 세풍이 F1대회를 치를 생각은 없이 시세차익을 노린 범죄행위를 자행했었단 이야기다. #

5. 참조


[1] 북선제지 군산공장이 완공된 날을 창립일로 삼았다.#[2] 2020년 기준[3] 2020년 기준[4] 소련군정 때문에 북선제지화학공업 전체가 아닌 군산의 제지공장만을 귀속했기 때문에, 회사의 설립기점을 북선제지화학공업이 설립된 1935년이 아닌 군산공장 완공 가동일인 1944년으로 보게된다.[5] KBO 리그의 산파 역할을 했던 '군산야구의 대부' 이용일의 부친.[6] 당시로서 최첨단인 장망식 초지기라는 것을 가지고 있던 유일한 곳이었다 한다.[7] 왜냐면 처음 조촌동 지역에 자리 잡을 때는 이 지역이 군산의 외곽지역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점차 도심이 팽창하게 되면서 도심 가운데 떡하니 자리잡아 버린 셈이 된 것이다. 그것도 규모가 상당히 큰 건물로 남아있으니 더더욱.[8] 돌리기 직전 김 시장이 위암수술로 인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상태였는데 세풍 관계자들이 병원까지 찾아가 김 시장과 염 실장에게 돈이 든 상자, 즉 뇌물을 건넸으나 받지 않았다고 한다.